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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충전소

파워 할머니

M.미카엘라 2000. 6. 15. 11:50
주말에 어머님이 오셨다. 28개월이 되어가는 소미고모의 딸 도연이도 버스를 타고
외할머니 손잡고 따라왔다. 엄마와 처음 떨어져서 대중교통을 이용한 첫나들이를
해서 그런지 아주 의젓해 보였다. 소미는 오늘로 딱 만 35개월이 되니까 도연이
보다는 약 7개월이 빠른 셈이다.
그런데 이 꼬마 아가씨는 키도 몸무게도 손, 발 크기도 소미를 웃돈다. 특히 손,
발이 꽤 커서 소은이에게 물려주는 신발은 소미가 한 축 신고 물려주어도 될
정도로 크다. 하지만 얼굴은 여러 아이들 속에 섞여있어도 눈에 확 뜨일 정도로
깜찍하게 예쁘다. 거의 복숭아빛 피부에 눈이 크고 동그란데 7, 8년 전 미국
영화로 기억되는 <내 사랑 컬리수>의 깜찍한 아역배우를 떠올리면 그만이게
닮았다.
어머님은 워낙 아이들을 좋아하신다. 특히 '강보에 싸인 아기'가 좋다고 하시는데
지금은 외손주인 도연이와 도훈이 연년생 남매를 보아주신다. 도훈이가 소은이보다
두어 달 빠르게 태어났으니 고모네 집도 목하 '전쟁중'임은 안 봐도 그림이
그려진다. 아직 환갑은 안 되셔서 젊으시다고 볼 순 있지만 육아는 팔팔한 젊은
사람도 힘겨운 일이 아닌가. 보통 전쟁터가 아닐 그 속에서도 지치지 않고
즐겁게 아이를 돌보시는 어머님을 보면 그저 놀라울 뿐이다.
지난 5월 어머님은 당신 친정어머니와 바로 아래 여동생과, 몇 년 동안 조금씩 모
으신 돈으로 일본을 다녀오셨다. 천주교 성지를 다녀오셨는데 거기서 사 가지고
온 손주들에게 줄 올망졸망한 선물을 구경시키고 싶으셨던 것이다. 우리집에
오실 땐 늘 어디서 구하셨는지 모를 온갖 작은 장난감을 봉지봉지 가지고 오시니,
이튿날 놀러왔다가 본 우리 이웃이 더 놀란다. 늘 노점이나 상점 같은 곳을 예사로
지나치지 않으시는 모양이다.
이번 선물은 또 볼 만하다. 색색깔 예쁜 가지가지 모양의 일본산 사탕 두 봉지,
소미 밥 비벼 먹이라고 사오신 맛있는 일본 간장, 누르면 말하는 펭귄, 건전지 힘으로
뱅뱅 도는 펭귄, 전화번호 녹음하는 미아방지용 미키마우스 목걸이, 아이스바
만들어주라고 사오신 예쁜 용기, 누르면 스폰지로 된 아이스크림 부분이 튀어
나오는 아이스크림콘 장난감, 머리끈 한 쌍, 머리핀 세 개 등이다. 다 늘어
놓기도 숨차다. 거기다 내 우산과 면스카프까지. 선물을 설명하는 어머님의
얼굴은 도대체 누가 선물을 하고 선물을 받는 사람인가 모를 정도로 신이 나
있으셨다.
또 재미있는 것은 소미 소은이 소유를 분명하게 정해서 가져오셨고, 조금 욕심 많은
도연이가 여기 와서 같은 물건을 보면 자기 거라고 떼쓸까봐 아예 도연이 선물로
주신 것까지 싸들고 오셨다는 점이다.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어머님은
아무튼 못 말려" 했다. 소미아빠 선물은 단 한 개도 없다는 점이 또 우습다.
일요일 점심을 비빔국수로 준비하는 동안, 어머님은 낯가림을 채 벗지 못한 채 우는
소은이를 들쳐업고 두 아이들을 데리고 집 앞 놀이터를 나가셨다. 결국 소은이는
할머니 등에서 골아 떨어졌고, 등이 가벼워진 어머님은 뒷베란다 청소를
해주셨다. 정리는 그럭저럭 되어있었는데 바닥이 너무 더러웠다. 청소해야 되는데
하면서도 하기 싫어서 미적댄 참이었다. 어머니는 할 일이 생겨서 물 만난
고기처럼 기운이 나서 물청소를 하셨다. "왔으면 뭐 한 가지 도움이 되고 가야지"
하시면서.
국수는 별로 안 좋아하는데 참 맛있어서 밥은 따로 안 먹겠다고 하시며 한 그릇을
말끔히 비워주시는데 아주 기분이 좋았다. 스스로 요리와 살림엔 취미도 재미도
못 느낀다고 하시면서 맛을 아는 입만 발달했다고 하신다. 그런 점이 내겐 오히려
편할 때가 많다. 요리 못하는 내가 해드리는 건 맛있다고 그러시는 건 이상하다.
인사시겠거니 하지만.
어머님을 '손주들에게 사랑받고 싶어하는 할머니'라고 표현한다면 너무 지나칠까.
그 정도로 손주들을 예뻐하 고 손주들이 당신을 좋아하며 잘 따르길 바라신다.
결혼 전부터 봐도 소미아빠를 중심으로 워낙 시댁 식구들이 모두 아이를 좋아해서,
지금은 소미나 도연이가 잘 안 안기거나 따르는 기색이 없으면 어른들이
더 상처를 받을 정도니 무슨 말을 더 하랴.
나라고 천사나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 아닌 이상 어머님에 대해서 모두 좋기만 했을까.
반대로 어머님이라고 내가 좋기만 하셨을까. 어머님은 그 좋고도 많은 장점들이
단숨에 가려질 정도의 한 가지 큰 단점 탓에 이 맏며느리는 울기도 많이
울었다. 성당에서 고백성사를 해도 풀리지 않는 상처와 앙금으로 오랜 시간
고통을 받았다. 소미아빠와 어머님도 잘 아시고 인정하시는 그런 시간들이 쌓여
오늘까지 왔지만 어머님껜 분명 미워만 할 수 없는 인간적인 매력이 있다.
좀체 지치지 않는 파워풀한 아기사랑(아이들이 좋아서 유치원 보모할머니를
지내신 경력이 있다), 마음에 어려운 일이 닥치면 더 힘을 내는 씩씩함, 아직도
소녀 같은 취향, 대화가 되는 즐겁고 유쾌한 성품, 수다가 넘치는 귀여운(?)
시어머니다.
나는 '딸 같은 며느리', '친정엄마 같은 시어머니'라는 말을 별로 믿지 않는 편이다.
어찌 해도 며느리는 며느리고 시어머니는 시어머니다. 다른 세대를 살아왔고 다른
환경에서 살아왔다. 그걸 먼저 인정하고 살아야 친정피붙이 같지 않은 어떤
부분에 대한 기대가 큰 실망으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본다. 그저 내 도리와 내
예의 다하기를 기본으로 하고, 앞에서 늘어놓은 어머님의 장점들을 최대한 크게
보고 살고 있다. 이렇게 머리로는 이해가 되면서도 가슴으로 확 다가서지 못하는
상대가 시어머니라고는 하지만 말이다. 그저 늘 당신은 내 편이라고 하시며
다 이쁘게 잘 보아주시는 어머님이 고맙기만 하다.
소미와 도연이는 너무 죽이 잘 맞아 땀까지 뻘뻘 흘려가며 재미나게 놀았다.
"도연아, 소은이 생일 때 내가 너네 집에 갈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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