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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파업하는 날

M.미카엘라 2000. 6. 10. 16:19
유난히 그런 날이 있다. 몸이 도대체 내 정신의 통제를 받지 않고 파업을 하는 것
같은 날. 아침부터 잠도 도무지 확 깨지 않고 물먹은 솜처럼, 뼈대라곤 한 개도
남아있지 않은 것처럼 흐물흐물 침대에 풀어진 채 수습이 안 되는 형편이다.
오늘이 그런 날이다. 이런 날 어른이라면 내게 도움은 못 줄지언정, 옆에서 힘들게 는
하지 않으면서 적당히 컨디션이 좋아질 때를 기다리며 눈치라도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그게 아니다. 그런 날은 유난히 아이들도 이것저것 해달라
주문이 많고 사고를 더 친다. 늘어질 대로 늘어져 도대체 눈꺼풀을 올릴 생각을
않는 엄마에게 주목을 받고 싶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내가 피곤에 절어서
신경까지 까슬해진 탓에 아무것도 달갑게 보이지 않는 까닭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어째든 이런 논리적인 생각은 그나마 찬물이라도 한 잔 마시고 정신을
차린 후 아이들이 비로소 제대로 보일 때나 가능한 일이다.
평소엔 9시나 넘어야 깨는 소미가 8시 반도 안 되어서 깼다. 오줌을 눕고 싶다 길래
눈은 그대로 감은 채 잠에서 다 깨지 않은 입술을 간신히 움직여 혼자 한번
해보라고 했다. 욕실로 가는 소미를 실눈 겨우 뜨고 확인하고는 또 늘어졌다. 요
며칠 일 때문에 밤을 새기도 하고 잠을 설치고 하다가 어제 좀 일찍이다 싶게
12시쯤 잠자리에 들었다. 푹 잘 잤는데 이런 날은 어김없이 더 피곤하다. 아마도
몸은 그 동안 피로 탓에 내친 김에 더 자라고 사인을 보내는 것 같다.
그런데 욕실에서 뭐라고 찡찡대는 소리가 들렸다. 왜 그러느냐고 소리치니 팬티에
오줌이 묻었다는 것이다. 몸을 움직여 일어나는 일이 아마득했다. 소은이가 침대에서
떨어질까봐 아래로 내려놓고 머리는 산발을 한 채 가보았다. 변기에 올라가지
않고 욕실 바닥에 일을 본 모양인데, 팬티를 너무 내려서 발목쯤에 걸린
채로 주저앉았으니 당연히 팬티는 오줌막이가 된 꼴이었다. 손끝에 힘도 없고
짜증이 났다. 아무 소리도 않고 좀 거칠게 팬티를 벗기고 씻겼다.
오늘은 설상가상으로 공동청소날이다. 겨우 정신을 차려 소은이를 업고서 거들고
들어왔는데 여전히 몸은 변함이 없었다. 소은이 기저귀를 갈고서 우유에 시리얼을
한 그릇 타서 소미에게 주었다. 다 먹은 후엔 비디오를 보고 싶다길래 한 편을
틀어주었다. 그리곤 방으로 들어가 어질러진 채로 있는 이불더미에 다시 고꾸
라졌다.
아니나 다를까 소은이가 거실서 실실 기어오는 기색이더니 내가 누워 있는 옆에
반쯤 열린 붙박이장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놀았다. 열 때마다 "끼끼 끼끼 끼이
이익…" 이러길 계속하는데 뭐라 할 수도 없고…. 그러다가 그것마저 실증이
났는지 내 얼굴을 움켜쥐듯 잡고 일어나 건듯건듯 제 몸을 흔들어대고, 또 배와
가슴을 타고 넘어다니기도 했다. 소미는 웬일인지 비디오엔 집중하지 않고 들락
날락거리며 "엄마, 자지 마. 엄마아" 하며 온 신경을 들쑤셨다.
"자는 게 아냐. 엄마가 힘들어서 눈감고 쉬는 거야."
그래도 막무가내로 자지 말라며 고함을 질렀다. 한참을 그렇게 소미에게 졸리다가
결국 자리를 털고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자기는커녕 더 피곤했다. 비디오를
끄고 오디오에 내가 좋아하는 음악 CD를 걸었다. 음악으로 내 속에 있는 피로를
몰아내자는 생각이었다. 볼륨을 높이는데 소미가 말했다.
"엄마, 이런 노래 싫어. 소미 노래 틀어줘."
동요를 틀어달란 소린데 순간 막을 수 없는 짜증과 분노까지 봇물 터지듯 나왔다.
"싫어. 절대로 못 틀어. 왜 맨날 엄마는 듣고싶은 음악도 못 듣게 하니? 아무 때나
비디오 틀어달래고 소미가 듣고 싶은 음악만 틀어달라고 하고. 엄마도 듣고 싶은
음악이 있고 보고싶은 테레비가 있어. 엄마는 소미가 듣는 노래 듣고 싶지 않을
때도 잘 들었어. 그러니까 소미도 듣기 싫어도 엄마 노래 들어. 엄마도 소미가
맨날 보는 비디오 지겨워 이젠. 맨날맨날 아침부터 밤까지 소미, 소은이
돌보는 일도 힘들어 아주. 엄마도 더는 참을 수 없는 일도 있어."
알아듣건 못 알아듣건 막 쏴대듯 퍼댔다. 그리고는 음악소리를 더 크게 했다. 소미는
소파에 쭈구리고 누워 가만히 내 말을 소낙비 맞듯 듣고 있었다. 좀 자숙하는
듯 했다. 그러나 입을 여니 또 그 소리였다.
"엄마, 소미 노래 듣고 싶어."
"뭐? 그래도 엄마 말 못 알아들었어? 듣기 싫어도 오늘은 엄마 노래 들어. 엄마도
이 노래 들어야 기분이 날 것 같애."
소미는 울었다. 그러나 나는 오늘은 도무지 딸들의 기분을 맞출 수가 없었다. 누가
내 기분 좀 맞춰주었으면 살겠다. 좀 격한 감정에 브레이크를 걸어야지 하면서도
나도 이럴 때가 있다, 너희들도 사랑하지만 나는 나도 너무 사랑한다, 나도 사람
이다 하고 알아만 듣는다면 노골적으로 내 딸들에게 소리치고 싶었다.
우는 아이를 외면한 채 밥을 차렸다. 큰 면기에 미역국을 떠서 밥을 말아 푹푹 퍼
먹으면서 짬짬이 소은이에게 떠 먹였다. 소미는 울게 내버려두다가 밥은 먹여야
할 것 같아서 겨우 달래 몇 번 먹게 했다. 소미가 조금 남긴 밥, 소은이가 조금
남긴 것을 모두 다 먹었다. 소은이는 그네에 매달려서 졸리운지 밥풀을 짖이겨
붙이고서 눈을 비비며 칭얼댔다. 미역국에 만 밥이 채 위장에 다다르기도
전에 소은이를 들쳐업고 띠를 허리에 꽉 졸라맸다. 몸뚱이가 곰이 된 것 같았다.
순간 '그래 내가 무슨 사람이냐. 짐승이지' 싶은 생각도 들어서 눈물까지 핑
돌았으나, 이내 '내가 오늘 왜 이러냐, 너무 오버하고 있네' 하며 감정을 수습했다.
설거지를 하며 소미더러 나가 놀다오라니까 "네, 엄마"하고 이쁘게 말하고 나가더니
곧 뭐가 그리 사무치게 그리운지 다시 돌아와 재미없다고 했다. 다른 날은 나가지
말라고 해도 어느새 없어지던 애가.
조금 있다가 똑똑 소리가 났다. 문을 빠끔히 열고 까만 눈 네 개가 초롱거렸다. 옆집
사는 남매 준희, 준규였다.
"소미 아줌마, 소미하고 놀면 안 돼요?"
속으로 '휴'소리가 났다.
소미를 보고 준희, 준규랑 같이 나가 놀라니까 고개를 젓는다.
"밖에 바람 불어요. 소미네서 놀고 싶은데…"
그래, 들어와라. 너희들 아니래도 힘든 건 마찬가지니. 소은이가 잠들었는지 고개를
푹 떨구었다. 엄마로서 몸이 파업해도 마음은 파업하지 말아야 하는데 얼굴이
꼬지지한 채 잠든 아이를 보니 가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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