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한 뼘 성장드라마
아홉 평의 여유 본문
7년 전 크리스마스 때 성당에서 빙고게임 이겨서 받은 동양매직 토스터. 결혼선물로 받았지만 약 6년 넘게 고이 한구석에 모셔두었던 작가 이외수 그림 한 점. 이 두 가지는 이번에 이사를 하고 나서 집안 잘 보이는 곳에서 반짝반짝 빛을 내게 된 물건들이다. 15평(요즘은 제곱미터로 표시하라하는데 아직도 이게 편한 분 많을 줄 안다) 군인아파트에서 24평 일반 아파트로 이사를 하면서 딱 9평 늘어난 여유 공간에 나타난 뉴페이스(?)다.
토스터는 포장박스 그대로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새 물건이지만 내가 알기로 이 제품은 단종된 것 같다. 투박하고 그다지 예쁜 모델이 아닌 이 제품을 요즘 어느 전자제품 상점에서도 본 적이 없다. 빵도 굽고 토스트 피자도 하고, 감자 고구마 정도도 간단히 구울 수 있으니 ‘미니 전기오븐’이라는 편이 더 맞다. 전기압력밥솥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부엌에서 꽤 잘 쓰인다.
그림엔 문외한이지만 집안에 그림 한 점 걸어두고 싶은 감수성은 있는데도 도무지 넉넉하고 안전한 빈 벽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좁은 공간에 살다보니, 아는 사람은 부러워하는 이외수 작가의 그림이 내내 어두운데서 빛을 보지 못했다. 이제 걸어놓고 보니 반가운 사람 만난 것처럼 즐겁다. 이 그림 처음 선물 받고 기뻤던 신혼의 새댁 시절이 생각나 감회가 새롭다.
우리 식구는 서울에 첫 전입신고를 했다. 부대 내 어떤 규정 때문에 바로 옆에 군인아파트를 두고도 거기에 입주를 하지 못하고 세를 얻었다. 그런데 별로 아쉽지 않다. 아홉 평의 여유가 이다지 마음까지 넉넉하게 만들 줄 몰랐다. 방은 그래도 여전히 불만이 남지만 거실과 부엌으로 이어지는 공간이 탁 트여서 확실히 넓다. 아주 살 것 같단 소리가 여기만 쳐다보면 절로 난다. 식사 때마다 두 사람이 밥상 양쪽을 잡고 좁은 기역자 통로를 조심스레 꺾어서 부엌과 거실을 오가는 일은 하지 않아도 된다. 흐흐, 이렇게 쓰고 보니 잘 모르시는 분은 우리 집에 한 4,50평은 되는 줄 알겠다.
그런데 군인아파트 밖은 불안과 자유가 교차한다. 자유로운 느낌은 군인아파트 안에서와 달리 군인의 아내로서 긴장해야 할 어떤 마음가짐에서 확실히 ‘쉬어’자세가 되기 때문이다. 불안감은 아이들 때문에 생긴다. 군인아파트 안에서는 아이들을 밖에서 편하게 놓아길렀다. 따로 울타리가 탄탄하게 쳐져 있고 보초병이 있고 그런 건 아니지만 그래도 될 정도로 안전하고 느긋하고 평화로운 분위기가 확실히 있다. 이 아이가 누구네 집 아이고, 저 아이 아빠가 대강 누구고, 저 애는 어느 동에 사는지 알음알음 다 알기 때문에 내 아이 네 아이 할 것 없이 서로서로 봐주는 분위기가 있다고나 할까.
헌데 이젠 그런 것이 없다. 마침 이사할 무렵부터 뉴스에 안양의 초등학생 여자어린이 실종사건이 보도되면서 허전함과 불안감이 나도 모르게 생겼다. 좁다고 낡았다고 타박을 간간히 하면서 살았지만 군인아파트의 울타리가 어떤 것인지 새삼 알게 되었다.
또 가까이 우리가 다니게 될 성당은 납골시설 문제로 반대여론을 가진 주민들과 마찰이 있어서 주변 분위기가 어수선하고 긴장이 감돈다. 검은 현수막에 갖가지 구호성 문구가 걸리고 가로수에서 하얀 소복이 펄럭대고 일요일엔 성당을 향한 확성기에서 끊임없이 납골시설을 반대하는 노래와 구호가 흘러나온다. 그래도 지금은 많이 진정된 거라는데 소미와 소은이는 이 길을 건너 성당에 가고 학교에 가야 한다.
그래도 우리 집 주변은 참 조용하고 안온한 편이다. 마음에 든다. 소미 소은이는 지금 용인학교의 방학숙제에서 자유로운 채, 겨울방학을 편안하게 보내고 있다. 책 많이 읽고 음악을 듣고 보드게임을 하고, 대본을 쓰고 종이로 등장인물을 만들어 인형극도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방학에 수영을 시작해볼까 했는데 소은이는 다음 주부터 성당에서 첫영성체 교리를 3주간 날마다 빡빡하게 하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개학이 이 달 25일이란다. 30일을 간신히 넘긴 겨울방학이라니… 놀랐다. 서울은 다르네! 2월 초 설 연휴까지 푹 놀아주고 개학하는 게 보통 아닌가 싶은데, 애들도 그 사실을 알고 눈이 동그래진다. 나야 모…좋다 사실. ^^
서울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2008년. 아쉽지 않게 문명(?)을 누리리라. 남편의 다음 근무지는 강원도가 될 가능성이 거의 백 퍼센트라는데…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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