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한 뼘 성장드라마
욕심, 채움과 비움 사이 본문
부모의 욕심은 자주 비워내고 비워낸다 해도 어쩔 수 없이 생긴다. 운동과 식이요법으로 건강을 지키는 다이어트가 그냥 생활 속에서 평생 해야 하는 것처럼, ‘부모 되기’ 또한 다시 채워질지언정 결국 자식에겐 도움이 되지도 않는 자기 욕심과 욕망을 평생 비워내는 과정이어야 한다는 것을 느낀다.
나도 평범한 요즘 부모라, 특별히 어떤 부분을 살려 잘 기른 다른 집 아이들을 만나면 솔직히 못내 시샘이 나는 때가 있다. 학교성적이 아주 좋은 아이... 이건 아니다. 영어를 유창하게 잘 하는 아이... 대단하다 싶어도 뭐 시샘까지 날 정도는 아니다. 자기 목표와 열정이 뚜렷해서 어떤 분야에 대한 관심을 일찍부터 뚜렷하게 드러내는 아이... 사실 어른들도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 잘하는지 모르는 사람 많다. 아직 어리니 더 많이 기다려야 한다.
그런데 나는 책을 많이 읽은 독서력 좋은 아이들을 만나면 순간 기가 죽는다. 소미와 소은이도 책을 좋아하고 평균 아이들보다 많이 읽는 편이지만 특정 분야의 책을 좋아하는 편식이 뚜렷하고, 아직도 아이들의 독서수준과 책에 대한 애착이 내 성에 차지 않는다. 안다. 이게 내 욕심이고 집착인 걸.
2주 전쯤 이야기다. 오랜만에 아이들을 데리고 종로의 큰 서점을 찾았다. 여기저기서 선물로 받은 도서상품권이 모아진 걸 아는 아이들이 안달을 부린지 꽤 되었다. 평소 인터넷 서점에서 보고 사줄 때는 만화책은 언감생심 나한테 말도 못 꺼내지만, 직접 책방을 찾을 때는 그 눈앞에 보이는 즐비한 만화책 앞에서 엄마가 한 권 정도 안 사주고는 못 버틴다는 것을 아이들은 알고 있다.
하지만 만화책도 만화책 나름, 내용은 볼 것도 없으면서 보통 어린이책보다 더 비싼 경우가 많아서 진짜 돈 아깝다. <졸라맨 공포특급>을 사겠다는 소은이와, 이상하게 <오싱>이나 <태백산맥>만화를 1권도 아닌 중간권을 사겠다고 조르는(어차피 엄마가 다 사줄 거 아니니 그림이 좋은 걸로 고른 품이다) 소미에게 지치는데, 갑자기 옆에서 책을 고르던 한 남자아이가 내게 불쑥 말을 붙인다.
“이런 건 만화보다 원래 책으로 보는 게 나은데요 훨씬.”
아, 고 녀석 참...
“아이구, 너 참 말 잘했다. 내 말이 지금 그 말 아니냐. 너 참 대견하다. 몇 학년이니?”
“5학년이요.”
“우리 소미하고 동갑이네. 너 같은 생각을 갖고 있으면 우리가 다툴 일이 없을 텐데.”
“이야~ 너 정말 이 담에 한 인물하게 생겼다. 그래 너는 무슨 책을 골라 읽고 있었니?”
퇴근 후 서점으로 온 남편까지 옆에서 감탄을 하면 물었다.
“저요? 이거….”
표지를 보여주는데 <한 권으로 읽는 한국사>였다. 깨알 같은 글과 사진이 가득한 손에 꽉 잡히는 두툼한 포켓북이었다.
“근데 이건 여기 없구요, 저쪽에 어른 책 파는데서 가져와서 좀 읽는 거예요. 제 동생이 여기서 책 고르고 있어서.”
나는 본 적도 없는 이 아이의 부모에게 불현듯 샘이 났다. 고른 책이나 말 하는 품새나 동생을 챙기는 마음이나 모두 어찌 그리 참하고 의젓하고 바른지. 아, 정말 이런 아이를 만나면 나는 기가 죽는다.
남편은 우리가 있는 책꽂이 뒤쪽에서 다른 만화책에 정신이 팔린 소미를 부르려고 했다. 그러나 나는 그의 팔을 잡았다. 남편이 아이에게 무슨 말을 할지 잘 알기 때문이다. 자존심 강한 소미, 그 정도면 독서력 좋은 소미를 괜하게 마음 상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소은이는 누가 뭐라든 마음도 안 상하고 화도 안 내고 꿋꿋하게 <졸라맨> 말고는 타협을 하지 않고 그것을 손에 넣는 일에만 정신을 쏟지만, 소미는 다르다. 내가 빨리 정신을 차린 것이다. 나도 남편이 하고 싶어하는 말이 턱밑까지 차올랐지만 빨리 균형을 잡았다. 그리고는 <졸라맨>도 사주고, 만화 <오싱> 8권도 사게 해주고, 빼어난 그림체로 탁월한 시대물을 내놓는 신일숙의 만화 <아라비안나이트> 1권까지 사서 안겼다.
하지만 아이들은 집에 돌아와서 곧 후회했다. 돌아오는 전철에서 다 읽어버린 <졸라맨>이 너무 시시했고, <오싱>은 너무 재미있는 것 같은데 만화로 사지 말고 엄마가 그렇게 권했던 네 권짜리 <어린이를 위한 오싱>을 살 걸 그랬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엄마가 무조건 사서 안겼던 <아라비안나이트>는 너무 재미있으니 어쩌면 좋으냐고 한다.
잘못된 판단으로 인한 시행착오와 실수가 깊이 가르칠 것이다. 나는 이때는 아무소리도 안 했다. 사극 <이산>을 통해 궁중 여인들의 삶에 깊은 관심을 가진 소은이가 맨 먼저 고른 아름다운 삽화가 있는 <인현왕후전>에 대해, 내 친구가 보내준 <어린이를 위한 ‘경청’>을 읽고 다른 시리즈에 큰 관심을 갖게 된 소미가 <어린이를 위한 ‘배려’>를 고른 것에 대해서만 칭찬했다.
엊그제는 <오싱> 네 권과 <아라비안나이트>2권~5권까지를 사서 안겼다. 그래서 소미소은이는 이 책들 속에서 요즘 마냥 행복하다. 내 욕심을 잠시 내려놓으니 나도 행복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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