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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제, 즐거워져라!

M.미카엘라 2008. 4. 8. 13:33

 

 

자랑은 아니지만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재미있는 책 잘 고르는 엄마’라는 나름의 평가를 받고 있는 기분 삼삼한 엄마다. 신문 책 섹션에서 본 서평, 책 광고, 독자리뷰, 출판사 홈페이지, 어린이문학잡지 등을 자주 기웃거리고 아이들 취향도 고려하며, 보통 학교나 도서관에서 추천하는 필독서는 참고하지 않는 목록을 만드는 일이 즐거운데, 한 권씩 사서 내미는 단행본 책들에 대해 소미와 소은이가 ‘어떻게 엄마는 이렇게 재미있는 책을 잘 고르냐’고 칭찬한다. 내 눈높이가 아이들과 어느 정도 보조를 맞추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즐거워진다.

 

그런데 3월 말 나는 한 권의 프랑스 동화책을 선물 받았다. 정확히는 소미와 소은이에게 주는 선물이다. 번역하신 분이 직접 사인을 하여 솜손에게 전해 달라 하신 이 책의 제목은 <방학숙제>. 지은이가 수지 모건스턴. 낯익다. 소은이가 요즘에 가방에 넣어가지고 다니며 읽는 책 <조커, 학교가기 싫을 때 쓰는 카드>, 두 딸이 열광하며 본 책 <엉뚱이 소피의 못 말리는 패션>, <공주도 학교에 가야 한다> 같은 책을 쓴 작가다. 이미 기발한 상상력으로 아이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주는 재미있는 책을 쓰는 사람으로 검증을 받은 작가라 나도 기대가 되었다. 거기에 역자의 사인이라니… 솜손이 껌뻑 넘어갈 일이다.  

 

 

 나는 그 분과 헤어져서 돌아오는 길에 책을 읽었다. 각각 반이 다른 5학년 엠마, 위고, 파리다, 조슬랭 네 친구의 여름 방학숙제에 관한 이야기다.

 

엠마의 선생님 실비실비는 교대를 졸업한 초짜 선생님인데, 별 시시콜콜한 규격이 세세히 정해져있는 온갖 문구류를 다음 학기를 위해 준비해오라는 것이 방학숙제다.

 

 

 

위고의 선생님 로르는 눈빛에 초점이 없이 자기만의 세계에 빠진 듯한 선생님인데, 숙제가 적힌 목록은 ‘백지’다. 도대체 뭘 하라는 건지, 가장 당황한 것이 이 반 아이들이다. 그래서 위고는 ‘찾을 수 없는 물건의 목록’을 세 주제로 분류해서 창의적으로 만들기로 했다. 그야말로 '내 맘대로 목록'이다.

 

 

 

 

 

파리다의 선생님 알렉상드르는 스포츠카를 타고 다니는 멋지고 게다가 친절하기까지 한 젊은 남자 선생님인데, 숙제 또한 섬세하고 감성적이다.

 

 

 

조슬랭의 선생님 플륌코크는 특이한 패션취향을 당당히 고수하는 완고하고 권위적이고 고집 센 스타일의 중년여성인데, 관념적인 13개의 단어를 사전 도움 없이 정의해오라는 숙제를 내밀었다.

 

 

 

기상천외하면서도 때로 막막한 방학숙제 목록을 집어든 네 아이의 고군분투가 그려지는 이 동화를 중간까지 보면서, 나는 왠지 스피디하고 자극적인 할리우드 영화에 익숙한 영화팬이 처음으로 나른한 프랑스영화를 보면서 낯설고 좀 지루하고 재미없는 상황을 만난 것 같이 느껴졌다. 숙제는 특별하고 남달랐지만 이상하게 네 아이 이름을 번갈아 소제목으로 달며 진행되는 이야기에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작가가 나중에 이 이야길 어찌 수습해갈까 궁금하긴 했지만, 끝까지 내처 읽지 못하고 집에 돌아와 아이들에게 이 책을 내밀었다. <마리가 사랑에 빠졌어요> 이후 같은 분에게 두 번째 번역 책을 선물 받은 아이들은 표지 다음 장에 적힌 역자의 사인을 보고 역시 흐뭇해하고 신기해했다.

 

그런데 곧 놀라운 건 이 책을 읽은 두 아이 반응이다. ‘책 잘 고르는’ 이 엄마와 반응이 비슷할지 모르겠다는 염려를 저 멀리 던져버리며 조롱하듯 폭발적이다.

 

소미는 “아, 나도 이런 숙제 좀 받아봤으면… 나는 파리다네 숙제가 젤로 맘에 들어. 이런 숙제는 너무 즐겁게 할 거야. 엄마, 이거 좀 보세요. 조슬랭 숙제 때문에 웃겨 죽겠어요. ‘지능’의 뜻을 쓰라니까 ‘나는 지능이 없다. 나한테 없는데 그 뜻을 어떻게 쓰랴?’ 이러는 거예요. 우하하하~~ 진짜 미치겠다.”

 

3학년짜리 소은이는 책을 들고 누워서 읽다가 벌떡 일어나서 등을 들썩이며 웃다가 낄낄대다가 ‘내가 미쳐~’ 이러면서 중얼대길 몇 차례. “엄마, 엄마도 이거 다 읽으셨죠? 너무 재밌지 않아요?”하고 물었다.

 

또 소미는 “다시 찬찬히 보니까 이 책 표지가 너무 재밌다. 애들은 숙제 하느라 난리 났고 뒷표지로 이어지는 길에서 선생님들이 기다리고 계신 거 보이세요? 진짜 재밌네”한다.

 

그때 소은이가 “근데 선생님들이 기다리시면 뭐하냐. 진짜 이 책은 맨 끝에 반전이 끝내줘. 완전 황당하고 허탈이야. 이거 너무 놀랐어. 엄마도 선생님들의 반전이 너무 웃기지 않아요? 근데 조슬랭네 선생님은 우리 선생님 닮았어. 맞아. 많이 닮았어.”

 

반전? 나는 개인적으로 조슬랭네 숙제가 맘에 든다고 끼어들다가 반전이 있다는 말에 군침을 꿀꺽 삼켰다. 사실 다 안 읽었는데, 이렇게 되면 안 읽을 수 없다. 몸이 근질근질하다.

 

소은이 말대로 반전은 완전히 기막혔다. 선생님들은 그렇게 고심해서 짠 듯이 보이는 숙제에 대해 관심 없거나, 기억하지 못하거나, 다른 데로 전근을 가버리거나, 다른 일에 골몰하다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나타나거나 했다. 엠마의 새 선생님은 반 아이들에게 실비실비 선생님이 남프랑스로 가셨다고 알리면서 종이와 볼펜을 꺼내라고 하지만, 엠마네 반 아이들이 자랑스러운 기분만큼 묵직하게 준비해온 숙제가방엔 종이와 볼펜 ‘고것만’ 없었다. 난 여기서 깔깔 폭소했다.

 

어른들이 그렇다. 열나게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요구하지만 까맣게 잊어버리기도 잘한다. 나만 해도 아이들에게 저녁 때 뭐 검사하겠으니 잘 해둬라, 안 해놓았으면 그에 상응한 벌을 내리겠노라 해놓고 그냥 지나가는 경우가 많다. 숙제 매일매일 내주고 검사하겠다고 엄포 놓고 선생님은 숙제검사 안한다고 애들이 투덜거리기도 한다. 참 위트를 섞어 어른들이 애들을 대하는 현실을 제대로 꼬집었다. 이래서 수지 모건스턴의 작품을 읽은 아이들은 어이없으면서도 시원하게 폭소한다.

 

소은이의 한 마디에 책을 비로소 끝까지 읽은 나와 소은이는 개학날의 반전에, 소미는 다양하고 특별한 숙제 그 자체에 재미의 무게를 실었다. 파리다의 숙제는 나 중학교 때 국어선생님이셨던 ‘미 루’선생님의 숙제와 닮은 데가 있다. 우리 선생님도 교과서 밖의 숙제, 자연에서 찾는 숙제를 잘 내주셨다. 소미한테 이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아주 부러워한다.

 

나는 관념적인 단어를 사전 도움 없이 정의해오라는 플륌코크 선생님의 숙제도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조슬랭의 엉뚱하고 익살스러운 정의가 웃음을 자아내지만, 생활 속 체험이나 경험, 사색을 통해 해결해야 하는 이 숙제는 나름대로 값지다.

 

요즘 소은이는 숙제 많다고 날마다 울상이다. 아이들의 창의력과 상상력이 어느 때부터인가 우리 교육의 최고 가치처럼 되어버린 마당에 이왕이면 숙제도 좀 더 재미있고 즐겁게 할 수 있는 것이면 좋겠다. 그런데 문제는 파리다나 조슬랭의 숙제 같은 걸 우리나라 아이들이나 부모들은 적잖이 귀찮아한다는 것이다. 그런 숙제는 ‘쓸데없이 시간 많이 잡아먹는 귀찮은 숙제’일 뿐이고, ‘안 해가도 성적에 지장 없는 숙제’ 일 뿐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런데 저 숙제를 애쓰며 해간 엠마의 친구들은 정말 쓸데없는 일을 한 것일까. 선생님이 검사하며 칭찬해주고 알아주지 않았기 때문에 가치가 없을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기억하든, 알아주지 않든 아이들은 숙제를 하는 동안 충분히 생각하고 고민하고 안타까워하고 고군분투했다. 이것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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