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한 뼘 성장드라마
그녀의 실체 본문
옛날에 ‘엘리자베스’라는 공주가 커다란 성에 살았다. 그 성에는 비싸고 아름다운 옷들이 많았다. 공주는 ‘로널드’라는 왕자와 결혼하기로 되어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무서운 용 한 마리가 나타나 성을 부수고 뜨거운 불길을 뿜어 많은 것을 태워버렸다. 공주의 아름다운 옷도. 그리고 로널드 왕자를 잡아가버렸다. 공주는 달리 입을 것을 없어서 눈에 띄는 종이봉지 주워 입고 용을 찾아나섰다. 공주는 무서운 용을 만나서도 떨지 않고 기발한 재치와 기지로 침착하고 지혜롭게 용을 물리쳤다. 그리고 로널드 왕자를 구해내었다. 그런데 엘리자베스 공주를 본 로널드 왕자 왈.
“엘리자베스, 너 꼴이 엉망이구나. 아이고 탄 내야. 머리는 온통 헝클어지고, 더럽고 찢어진 봉지나 걸치고 있고. 진짜 공주처럼 챙겨 입고 다시 와!”
그러자 엘리자베스 공주가 말했다.
“그래 로널드, 넌 옷도 멋지고 머리도 단정해. 진짜 왕자 같아. 하지만 겉만 번지르르한 껍데기야!”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은 결국 결혼하지 않았다.
이것은 오늘 소은이가 유치원에서 가져와 읽은 아주 유쾌한 그림책이다. 소은이네 유치원에선 학기 초에 어린이들에게 각각 한 권의 책을 정해주고 사서 가져오게 했다. 30명 정원에 모두 30권의 유치원 문고가 생긴 셈이다. 이 책을 2학기 들어 1주일에 기본 한 번, 아이에 따라 두 번까지 빌려가게 해준다.
그리고 책에 함께 달려 보내는 독서지도노트가 있다. 유치원에 있는 30권의 책에 대한 재미있는 독후활동 자료가 가득하다. 아직 글씨가 서툰 아이들은 엄마의 도움을 받아서 할 수도 있는데, ‘독후감 쓰기’가 아니라 종이접기, 연상되는 것 써보기, 주인공 되어보기 등등 가볍고 지루하지 않게 할 수 있는 문항이 세 개 정도라, 읽기와 쓰기가 조금 되는 아이들은 충분히 할 수 있다. 소은이는 유치원에서 돌아오자마자 내게 읽어달라고 하고 그 자리에서 혼자 뚝딱 해치운다. 일주일에 꼬박꼬박 두 권씩 빌려오길 몇 주째 하고 있는데 꽤 즐겨하는 눈치다.
꼭 빌려오려고 기다린 책인데 앞 친구가 먼저 빌려갔다는 둥, 언니가 부탁한 책이 있었는데 오늘도 못 빌려와서 언니가 실망하겠다는 둥, 친구들이 재밌다고 해서 기대를 많이 한 책인데 자긴 실망했다는 둥, 하는 이야기를 돌아와서 쏟아내는 입이 그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울 수가 없다.
그런데 오늘 이 <종이 봉지 공주>를 가져와 함께 읽은 후 소은이가 해놓은 독서지도노트를 보고 나는 완전히 정신을 잃었다. 뭐라고 표현할 수가 없다. 직접 보여드리는 수밖에… 독후활동 자료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왕자는 더럽고 찢어진 종이봉지를 입은 공주에게 다시 옷을 입고 오라고 했어요. 내가 만약 공주라면 뭐라고 했을까요?>
그랬더니 소은공주가 쏟아낸 말은 이러하다.
내가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다가 급기야 폭소하고 난 후, 정신 차려 무슨 코멘트를 하려 하니 일언지하에 내 입을 막는다.
“엄마, 이건 내 숙제니까 엄만 상관 쓰지 마세요.”
나, ‘꿀 먹은 왕비’가 되었다.
*주:
‘상관 쓰지 마세요’는 ‘상관하지 마세요’와 ‘신경 쓰지 마세요’의 합성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