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한 뼘 성장드라마
추기경님 선종에 부쳐 본문
나는 김수환 추기경님 선종 소식을 들은 지 24시간 만에 섬광처럼 내가 추기경님 생전에 가까이서 뵌 적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지금 우리 집엔 없지만 어린 시절 내 앨범을 찾아보면 사진도 분명히 한 컷 남아있을 것이다. 수녀언니가 다녔던 집 가까운 군종성당에 자주 놀러 다니다가 그 당시 가톨릭신자도 아니면서 언니를 따라 사목방문차 오신다는 추기경님을 뵈러 그냥 쫄래쫄래 따라갔던 것이다. 여고생일 때다.
하지만 추기경님을 추억할 만한 인상적인 에피소드는 없다. 신부님과 신자들에 둘러싸인 어른이니 먼발치에서 저런 분도 있구나 했을 뿐, 기념 촬영했을 때 나를 손짓으로 부르는 사람이 있어 슬그머니 한 귀퉁이 끼었을 뿐이다. 때는 오월 신록이 한창일 때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하니 얼떨결에 한 일이라도 그게 어디냐 싶다. 이 쌀쌀한 날씨 속에서도 저렇게 마지막 모습이라도 뵈려고 끝도 없이 줄을 선 사람들도 있는데. 오늘 소미소은이와 명동성당에 다녀오면서 저 깊은 데서 속절없는 감사가 우러나왔다. 정말 조문객들이 그렇게 많을 수가 없었다. 나 혼자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지만 아이들에게까지 쌀쌀한 날씨를 참고 서너 시간을 기다려 조문하자 할 수 없어서, 우리는 소성당의 추모미사에 참례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할머니들이 ‘요 어린 것들이 어찌 여길 다 왔냐, 참 이쁘다’ 하실 정도로 조문 행렬에서도 미사 행렬에서도 아이들은 거의 볼 수 없었다. 봄방학이긴 하지만 상갓집에 아이들은 잘 데리고 가지 않는 우리 풍습을 생각하면 이상할 것도 없다. 성당길을 내려오면서 추기경님 생전 모습이 담긴 사진들을 보았다. 그리고 다 내려와서는 다시 성당을 올려다보았다. 전경이 눈에 들어온다.
명동성당은 나를 참 부끄럽게 하는 곳이다. 6월 항쟁이 있던 그 해, 나는 명동성당을 쉽게 찾을 수 있는 가까운 학교를 다녔지만 민주화에는 관심이 거의 없던 철부지였다. 지금 생각하면 어쩌면 그럴 수 있을까 싶다. 중1때 아버지 엄마가 이유도 모른 채 검정세단에 태워져 안기부로 연행되어 열흘 만인가 돌아오신 충격적인 사건 이후 부모님과 한 방에서 자면서 이불속에서 진땀을 흘리며 들어야 했던 두 분의 공포어린 대화를 경험한 내가 독재권력의 횡포에 그다지도 무감각했다니. 대학시절까지 그 패닉상태가 이어진 것이 아닐까 싶지만 사실 그것도 핑계다.
국문과 학생이던 선배가 대동제니 뭐니 나를 자기 학교로 데리고 다니고, 그 자신이 수배위기에 놓이면서 내 마음을 졸이게도 했지만 나에게 ‘의식화’는 쉽게 일어나지 않았다. 그때 나는 첫사랑이지만 짝사랑으로 호되게 가슴앓이를 하는 중이었고 민주화는 먼 나라 이야기였다. 내게 시대의 아픔은 첫사랑으로 단단히 마취되어 있었다.
그렇게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야 세례를 받았다. 김수환 추기경님이 사목방문 하셨던 그 군종성당의 당시 신부님이 전역하셔서, 공교롭게 다시 내가 직장 다니며 작은 언니와 자취를 했던 동네 성당의 주임신부님으로 오셨다. 수녀언니는 그때 수녀원에 입회한 후였고, 신부님은 나를 보시자 ‘너 잘 만났다’하신 얼굴로 언제 세례 받겠느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으셨다. 짜식이 여태 하느님 동네에 발을 담그지 않았냐 하시며.
나는 사흘을 사제관에 불려갔다.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지만 저는 좀 놀고 싶어요, 일요일엔 미사 꼭 가야하고 고백성사 해야 하고 그래야 하는데, 어디 가지도 못하고 꼬박꼬박 지켜야 하는 게 부담스럽고 자유를 잃는 것 같아 싫어요, 쫌만 더 놀다가 세례 받을게요 했다가, 무진장 긴 말씀을 꼬박 한 시간 동안 앉아 들어야 했다.
가톨릭 신자는 그렇게 되었다. 미지근하게 시작한 신앙생활은 뜨거워졌다가 때로 다시 미지근해지고 차가웠다가 다시 슬그머니 온기가 돌기를 반복하며 여기까지 왔다. 좋은 일이 있어도 내가 잘난 줄 알고 산 세월이 십수년, 결혼하고 출산하고는 이제 하느님은 둘째 치고 자식 부끄러운 줄 알고 좀 신앙인답게 살자 결심하고 노력하다가도 끈기 없이 곧 스르르 나사 풀리기는 금방이었다. 오래 전에 어디서 들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답게 살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이 늘 이 모양이다’라는 말이 서늘하게 오랜 세월 가슴에 꽂혀, 가톨릭 신자로서 그 부분에서 뭐 한 가지도 귀감이 되지 못하는 부족한 나를 바라보며 최근까지도 자괴감을 느낄 때가 많았다.
그런데 추기경님이 선종하시고 다시 꺼내든 그 분의 회고록에서, 전에는 읽지 못했던 큰 위로의 말씀을 찾았다. 서울대교구장직을 이임하던 1998년 당시, 30년 동안 짊어지고 온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소감 중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아쉬운 점은 있다.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길 만큼 믿음이 굳건하지 않았고, 하느님께서 나에게 맡겨준 양떼를 죽도록 사랑하지 못했다. 하느님께 은총을 구하는 기도도 부족했다. 그러나 시곗바늘을 돌려 30년 전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더 잘할 자신은 없다.”
헉~ 타인에게 귀감이 되셨던 추기경님이 굳건하지 못했던 믿음을 고백하시다니, 죽도록 사랑하지 못했던 것을 자책하시다니, 놀라울 뿐이지만 한편으로 ‘후유~’하며 안도의 한숨도 조용히 쉬게 되었다. 진심으로 당신을 가치 없는 존재로까지 격하시키는데 나 같은 사람은 말해 뭣하랴. 실로 오랜만에 부끄러운 내가 정직하게 들여다보였지만, 나름 위로라면 신앙은 바로 이런 자신의 부족한 점을 합리화하거나 과장, 미화하지 않고 정직하게 인정하는 데서 시작하는 것 아닐까 깨닫게 되었다는 점이다.
뼈아프게 느낀 인간적인 부족함을 신에게 의탁하며 채워주십사 하고 어린아이 같은 모습으로 청하는 것. 그게 설령 지금은 남들 보기에 성공적이지 못한 모습이라 할지라도, 때로 믿음이 흐려지고 이게 기도한다고 될까 하는 의심이 생긴다 할지라도, 어느 순간 다시 고개를 들어 계속 간절히 청하고 자신의 언행을 살피고 실천하는 ‘과정의 연속’ 그것이 우리가 신께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의 모습이 아닐까 혼자 생각해본다.
신앙공동체도 마찬가지다. 완전하거나 완벽한 것은 신의 영역이다. 제 아무리 성자(聖子)도, 추기경님도 완전할 수 없는데, 하물며 수많은 사람이 이끌어가는 신앙공동체 역시 인간이 하는 일, 크든 작든 완벽하게 좋을 수 없다. 광활하고 드넓은 푸른 숲도 몇몇 나무는 생장에 좀 문제를 가지고 있거나 병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몇몇 나무가 전체 숲을 망치기는 쉽지 않다. 나는 그래도 가톨릭이라는 신앙공동체가 아주 건강한 숲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을 드러내시지 않지만 김수환 추기경님 같은 분이 또 어딘가에 많이 계셔 지금도 끊임없이 흙을 북돋우고 가지를 쳐주며 그 분의 유업을 받들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과정의 연속이다.
엄혹한 시절 속에서 빛나는 시대정신으로 우리에게 등불이 되셨던 분이 가셨다. 그리고 그 분과 함께 수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목숨과 청춘을 바쳐 독재 권력과 싸웠다. 그 시절 모습을 뉴스로 보던 소은이가 물었다.
“엄마, 착한 사람들은 왜 그렇게 약했어요?”
“약하지 않아. 저렇게 용기 있고 강인했던 분들 때문에 우리가 지금 이렇게 편하게 사는 거야. 감사해야 돼.”
정말 그 분들 덕분에 입 가진 사람은 누구라도 쉽게 별별 소리 다하는 좋은 세상이 된 이 마당에 나 역시 숟가락 하나만 달랑 꽂았다. 그래서 민주화의 성지라는 명동성당 아래서 더욱 오래오래 부끄러울 수밖에 없고 나는 그저 고개만 숙인 채 조용히 선종하신 추기경님의 안식을 기원하고 돌아왔다. ***
'엄마의 정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당신의 몸만 보내드립니다 (0) | 2009.05.28 |
---|---|
역설: 나는 아직 못 보냅니다 (0) | 2009.05.25 |
초콜릿 단상 (0) | 2009.02.14 |
올해의 슬로건 (0) | 2009.01.03 |
내 친구는 전교조 선생님입니다 (0) | 2008.12.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