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한 뼘 성장드라마
레슨 끝! 실전 시작! 본문
시원하고도 아쉽다. 소미는 얼마 전 일곱 살 때부터 시작한 피아노 레슨을 약 9년 만에 그만 두었다. 그동안 모두 다섯 군데 피아노 학원에서 여섯 분의 선생님께 배웠다. 최근 피아노 학원에서만 5년을 배웠는데 이곳에서 가장 실력을 많이 키웠다. 나는 올해까지만 레슨을 받고 학년 말에 학원 콘서트홀에서 부담 없이 졸업연주회까지 하며 유종의 미를 거두었으면 했다. 체르니 40번 레슨의 종반을 향해 가고 있었기 때문에 여기까지 마침표를 찍어주었으면 했던 것이다. 선생님도 학원의 최고 상급생인 소미가 그만두는 게 많이 아쉬우신 모양이다.
내년에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소미는 지난 2월 학기가 시작되기 전 내게 진지하게 상의를 해왔다. 더 늦기 전에 이제쯤 학원의 도움을 좀 받아야겠다고. 다른 건 필요 없고 영어와 수학만 넉넉잡고 고2까지 3년만 다니겠으니 보내달라 한다. 중1까지는 설렁 공부해도 성적이 좌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2학년부터는 점점 학습량이 많아지고 내용이 깊이 들어가며 힘들어했다. 사춘기는 절정이라 놀고만 싶고, 공부가 소홀하니 성적이 툭 떨어졌다. 내심 ‘아이쿠야! 이래선 안되겠다!’싶었던 모양이다.
흥미로운 건 소미가 자기 성격과 습관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더욱 필요성을 느낀 대목이다. 아이쿠야 싶어서 정신 차리고 자기를 찬찬히 들여다보니, 학교에서 돌아와 침대나 방바닥만 보면 자꾸 눕고 자는 것이 이미 습관이 되었더라는 것이다. 계획을 세워도 실천하지 못한 채 시간만 휙휙 가더란다. 그래서 심화학습을 위한 도움이 절실하기도 하고, 자기한텐 조금 강제적 환경이 필요하겠다 싶어서 학원을 결심했다고 고백했다.
나는 더 보탤 말이 없었다. 이렇게 자기 분석까지 끝냈는데 말릴 이유가 없었다. 넉넉지 않아도 부모로서 들어주어야 했다. 나도 언젠가는 혼자 힘들어하면 학원의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저렇게 먼저 말해오니 차라리 더 잘됐다. 자기가 선택해서 스스로 가는 모양새니 더 책임감이 생길 것이다.
근데 우리 소은이는 왜 자기가 더 난리인지 모르겠다. 내가 순순히 소미에게 그럼 가거라 했더니만, 소은이가 바로 따지듯 말하기 시작했다. 엄마, 그런 사람이었냐, 난 엄마가 우리를 끝까지 공부학원 보내지 않고 키울 줄 알았다, 그래서 엄마가 좋았다, 언니가 엄마 교육철학에 오점을 남기게 생겼다, 내가 엄마의 교육철학을 실현시켜주는 딸이 되겠다, 난 끝까지 학원 안 가고 공부해서 뭔가를 보여주겠다…. 아이구 참… 너무 잘난 딸을 두어 별 소리를 다 듣는다 정말.
“헤이 손손! 엄마 교육철학이 뭔지 니가 아셔? 엄마 교육철학에 ‘우리 딸들 절대 학원 같은 덴 안 보내고 성공시키겠다’ 그런 건 애초부터 없었거등! 너 지금 그건 좀 오바야, 필요하면 가서 열심히 배워야지. 오점은 무슨 오점! 하지만 기대는 할게. 니 말대로 한번 보여줘 봐! 엄마는 돈 굳어서 좋고 넌 성공해서 좋고. 학원 안 가고 공부 잘하면 엄마야 완전 좋지! 나 정말 이 담에 우리 손손 때문에 ‘어떻게 학원 한번 안 보내고 딸을 저렇게 훌륭히 키울 수 있었습니까?’ 뭐 이런 인터뷰 당하는 거 아냐 이거? 상상만 해도 벌써부터 떨린다야~”
소미가 자존심 상할까봐 나야말로 더 깔깔대며 오바했다.
암튼 그렇게 소미는 3학년 들어서자마자 공부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먼저 영어부터 시작해서 적응을 하고, 중간고사 이후부터는 수학까지 적응해나갔다. 그런데 두 과목만 하는데도 매일 하던 피아노 레슨이 어려워졌다. 초등학생 때까지만 피아노를 배우고 마는 아이들이 많은 이유를 알았다. 피아노 선생님은 그게 제일 안타깝다고 하셨다. 6학년 딱 그 시기만 지나면 아이들 스스로 피아노 치는 맛을 알고 재미있어하는데, 딱 거기서 멈추는 게 너무 아깝고 아쉽다는 것이다. 그동안 들인 시간과 비용이 적지 않아도 이도저도 아닌 실력이 되어버리는 게 초등학교 고학년 때 피아노를 중단하는 거란다. 무수히 많은 부모를 설득했지만 번번이 실패해서 피아노교육에 회의와 좌절이 들어 힘든 때도 많으셨다 했다.
하지만 선생님은 소미는 평생 피아노가 자기 것이 되는 실력은 갖추었으니, 전공자가 될 것이 아니면 지금 그만 두어도 괜찮다고, 충분히 훌륭하다고 내 아쉬운 마음을 위로하셨다. 잘 참고 연습 잘해주어서 예뻤고, 레슨 안 해도 음악적 재능과 감성이 풍부해서 오래오래 피아노 즐기며 잘 치게 될 것이라는 말씀도 덧붙이셨다. 필요하면 방학 때만 단기로 대가들의 곡을 한 곡씩 배워 완성하는 프로그램을 할 수도 있으니 언제든지 오고 싶으면 오라고도 하셨다.
참, 떠올려보니 9년 동안 고비도 많았다. 처음부터 제대로 가르치지 않으려면 시작도 하지 않겠다 결심했던 게 악기교육이었는데, 지루한 연습을 견디기 어려워 해 정말 진지하게 그만두려 했던 고비가 세 번 있었다. 피아노 연습 때문에 선생님이 다 미워져서 학원에서 돌아오기만 하면 선생님 험담만 한 바가지만 하던 날도 촘촘하다. 그래도 여기서 그만 두면 시간과 비용 모두를 버리게 되는 것이란 생각 때문에 수없이 많은 당근과 채찍으로 달랬다. 너무 힘들어할 땐 선생님과 몰래 통화해서 연습량 살짝 줄여주고, 피아노 연주회도 데려가고, <말할 수 없는 비밀> <노다메 칸타빌레> 같은 피아노 치는 학생 이야기가 있는 영화나 드라마도 보여주고, 미루고 미루다가 두 해 전엔 크리스마스 선물로 중고피아노를 사주었다.
하지만 내가 만들어준 자잘한 당근보다 더 효과적인 동기는 스스로 세운 목표였다. 피아노를 전공할 생각이 없는 아이나 나는 ‘그냥 배워두면 좋은 일이 많을 것 같아서, 일상이 풍요로워질 것 같아서’가 흐릿한 목표의 전부였지만, 소미는 6학년 때부터 성당에서 반주를 하고 싶다고 했고 그 실력이 될 때까지 피아노를 열심히 배우겠다는 목표를 가졌다. 덕분에 이후 소미는 피아노 레슨 때문에 나와 실랑이를 한 적이 없다.
더구나 중학교에 올라가 친구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의 되고 나더니 피아노 치는 마음이 더 즐거워졌다. 이루마의 곡을 쳤는데 애들이 난리가 난 모양이다. 몇 군데 틀리게 쳤는데도 “와~ 소미야! 너 진짜 잘 친다. 진짜 부럽다. 나도 참고 피아노 계속 할 걸. 포기한 게 후회돼” 막 이런다는 것이다. 90% 가까운 아이들이 피아노를 배운 경험이 있지만, 음악선생님이 소미네 반 아이들 중 피아노 치는 사람 손들라 하니 모두 세 명이었다고 한다. 소미는 자기가 피아노 칠 줄 아는 게 너무 자랑스럽고 포기 안하길 정말 잘했다고 한다. 이런 소리는 소은이의 피아노 레슨에까지 영향을 주어 소은이는 즐겁게 피아노를 친다. 나는 손 안대고 코 푼다.ㅎㅎ
소미는 얼마 전부터 미사시간 성가 반주의 꿈을 이루었다. 지난주엔 미사곡만 따로 반주하던 아이가 예고도 없이 안 와서 난리가 났었는데, 미사 끝나고 수녀님이 소미에게 한 번도 안 쳐본 미사곡 악보를 주시며 쳐보라 하셨단다.
“엄마, 수녀님 앞에서 막 당황하며 쳤는데 어머머... 생각보다 막 잘 쳐지는 거예요. 이게 웬 일? 수녀님이 왜 칠 줄 알면서 안했냐고 그러시는데, 나도 완전 놀랐는데 뭐!”
소미는 이런 말을 전하며 얼굴이 환해졌다.
“성당에서 가영 언니가 이제 나한테 다 물려주려고 해요. 언니도 내년이면 고3이라...그 언니도 오래 쳤어요 사실. 내가 반주할 실력이 되니 그 언니가 제일 좋아해요. 후계자가 생겼다고. 수녀님이 주일학교 반주단도 만들까 하시는데, 내가 아무래도 회장을 해야 하지 싶어. 요즘 내가 제일 잘 나가~ 히히...”
소미의 기쁨과 자랑스러움 만큼 나도 요즘 그렇게 흐뭇할 수가 없다. 토요일 오전엔 저녁 미사 반주를 앞두고 피아노를 오래도록 치는데 나나 소미, 아니 우리 식구 모두 일주일 동안의 정신적 피로를 그때 싸~악 푸는 것 같다. 남편도 좋은지 씨익 웃으며 “솜솜이야? 가르친 보람이 있네”한다.
하지만 나는 학교에서 돌아와 소미가 해질녘에 치는 피아노 연주를 가장 좋아한다. 무슨 마음으로 교복도 안 벗고 간식도 안 찾고 오자마자 피아노를 치는지 모르지만, 해가 기우는 시간이 주는 고즈넉함에 더해진 피아노 소리는 하루의 고단함과 분주함을 최상급으로 위로하며 행복감에 젖게 한다. 그때만큼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의 연주보다 간간히 삑사리 나는 우리 소미 연주가 더 큰 감동이다. ㅎㅎ
지난해 11월에 친 이루마 곡. 극구 손만 찍으라고 성화...ㅋ
카메라 들이대니 긴장했나?
뭐가 그리 급한지 그냥 내달린다. 요 연주들은 좀 맛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