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한 뼘 성장드라마
용감한 원주행 본문
지난 수요일에 버스를 탔다. 두 꼬마군사(?)를 이끌고.
20년 전 여중생 시절의 국어선생님과 20년지기 친구를 만나러 원주행을 용감하게
감행한 것이다. 나는 면허증은 없지만 이 소중한 사람들을 만나는 일을 포기할
수 없었다. 친구에게 내가 버스 타고 너희 집으로 가겠노라고 주저앉고 말했다.
친구에겐 막 두 돌을 지낸 딸이 하나 있어서 움직이자면 그 친구가 움직이는 게
쉬웠지만 여러 가지로 내가 좀 고생하는 게 나았다. 친구 집은 우리집보다 조금
넓고 일단 에어컨이 있다. 하룻밤을 지낼 것인데 이 무더위에 세 아이와 세 어른이
복작이기엔 친구 집의 조건이 좋았다. 그리고 선생님이 춘천에서 오시는데
장호원에 사는 우리를 데리고 다시 원주로 가시기엔 너무 복잡했다. 돌아올
때만 선생님 차를 타고 오기로 했다.
집에서 이천 가는 길은 그래도 버스를 타고 더러 가보았다. 하지만 이 거리가 한
25분에서 30분 걸린다. 그리고 우리가 탄 원주행 버스가 능서와 여주를 거쳐가는
노선이어서 1시간 20분이 걸렸다. 거기서 택시로 다시 15분 정도를 가야 비로소
친구의 아파트에 닿을 수 있었다.
시간을 넉넉히 가지고 움직였다. 소은이는 배낭식으로 업는 캐리어에 태우고, 소미
손을 잡고 가방 하나를 들고 움직이자면 시간 여유가 있어야 아이들에게 짜증을
내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소미를 오줌 누이고 몇 가지 부탁 말을 조근조근
일렀다. 그나마 젖을 먹이고 친구네도 아이용품이 있을 터라, 아주 최소한의
물건만 챙기니 중간 크기의 숄더백 하나면 충분했다.
나는 이천행 버스에서 좀 멀미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사람들의 눈총을 받지 않고
원주까지 잘 가야할 텐데 하는 걱정이 크다보니 괜히 이랬다 싶은 생각까지 드는
게 스트레스가 되었던 모양이었다. 옛날 엄마들은 셋도 넷도 모두 데리고 차를
탔을 건데 둘을 데리고 이렇게 안 하던 멀미까지 하다니 좀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소미는 크게 문제가 없었다. 이것저것 즐겁게 물어오고 말도 잘 들었다. 그런데 소은이가
이천 가는 차안에서 토끼잠을 자더니 정작 원주행 버스 안에서 잠시도 가만히
있질 않았다. 우유에 빨대를 꽂아 먹여주려고 해도 제가 들고 먹겠다고 소리를
지르다가(아프고 난 후 눈에 띄는 특징이다) 엎지르고 버둥대고 난리였다.
떼를 조금 부리는데 아직도 시간은 많이 남았다. 차안에선 젖을 물리지 않으려던
계획이 틀어져 창가에 앉은 소미 쪽을 보고 젖을 먹였다. 차안은 휴가철이었지만
빈자리도 있을 정도로 한가했다.
젖을 먹이면서도 그 다음은 무엇으로 아이를 잡아둘까 바삐 요리조리 생각을 굴렸다.
그러다가 가방에 넣었던 풍선 생각이 나서 그걸 두 개 불어서 하나씩 주었다.
한참을 잘 가지고 놀았다. 결국 나중에 소은이는 풍선을 제 앞니로 물어뜯어
터뜨리고 말았다. 놀라기는커녕 곧바로 소미의 풍선을 빼앗으려고 달려들었다.
도무지 앉을 생각을 않고 거의 내 무릎과 의자에서 서서 가다시피 한 소은이는 뒤에
앉은 청년과 장난을 했다. 의자와 의자 사이 벌어진 틈으로 뒤쪽을 보면서 소리도
없이 한참 놀았다. 뒷좌석에서도 한마디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영화 <이티>에서처럼
검지 손가락을 마주 대기도 하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원주에 도착했는데
1시간 30분 걸린다던 시간이 10분이나 줄어든 게 너무 고마웠다.
택시를 잡았는데 기사는 아기엄마라서 그냥 지나가려다가 섰다고 했다. 자기 아내도
조금 전 아이를 데리고 외출을 했다고 했다. 어찌 고마운지 더위가 싹 가시는
게 이 나들이가 더없이 즐거웠다.
그렇게 만난 선생님과 친구니 얼마나 즐거운지 몰랐다. 친구인 민지 에미는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어놓고 점심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모두 7,8개월만에 만나는 것으로
오랜만이다. 선생님은 여전히 시골 중학교 국어교사이시고 우리만 이렇게 커서
딸들까지 낳았다.
셋이 함께 만난 경우는 한 3년만이니 풀어야 할 회포는 끝도 없었다. 아이들 셋이
뭉친 모습도 가관인데 그 가운데서도 즐겁기만 했다. 우리야 일상생활이지만 아이가
없으신 선생님은 적잖이 정신이 없으신 기색이셨다. 친구와 나는 서로 말은
안 했지만 큰소리를 내도 서너 번은 내고, 엉덩이에 손이 가도 한 번은 갔을
상황에서도 꾹꾹 참았다. 좋은 말로 달래고 어르고 칭찬했다. 선생님께 좋은
엄마의 모습을 보여드리려고 했던 것이다.
그 노력 덕분에 메일을 통해 선생님으로부터 좋은 엄마가 된 내 모습이 대견하다는
칭찬을 들었지만 솔직히 가슴이 찔렸다. 그런 칭찬은 내게 턱없이 과하다. 그렇지만
선생님을 만나면 그래서 힘이 나고 용기가 난다. 옛 제자에게 한번도 시들하지
않게 보여주시는 끝없는 애정과 적절한 자극이, 새 건전지처럼 내 몸에
쌩쌩하게 전해진다. 어른도 칭찬 한 마디에 이렇게 기분이 좋아지는데 아이들은
오죽할까. 바른 칭찬은 또 얼마나 아이를 자라게 할까. 아이들에게 걸핏하면
큰소리 내는 일이 부끄럽다.
다음날 선생님은 남편이 근무였던 터라 우리집에서 또 하룻밤을 묶으셨다. 소미는
"성생님, 성생님"하면서 선생님을 잘도 따랐다. 아침에 자고 일어나서도 성생님
어디가셨냐고 할 정도였다. 온천욕을 같이 할 정도로 친구처럼 이문 사이된 선생님이
더 가깝게 느껴진 시간. 아직도 우리의 추억여행, 지금 이야기가 무수히 오가며
깊어갔던 친구 집에서의 여름밤이 꿈결처럼 느껴진다.
20년 전 여중생 시절의 국어선생님과 20년지기 친구를 만나러 원주행을 용감하게
감행한 것이다. 나는 면허증은 없지만 이 소중한 사람들을 만나는 일을 포기할
수 없었다. 친구에게 내가 버스 타고 너희 집으로 가겠노라고 주저앉고 말했다.
친구에겐 막 두 돌을 지낸 딸이 하나 있어서 움직이자면 그 친구가 움직이는 게
쉬웠지만 여러 가지로 내가 좀 고생하는 게 나았다. 친구 집은 우리집보다 조금
넓고 일단 에어컨이 있다. 하룻밤을 지낼 것인데 이 무더위에 세 아이와 세 어른이
복작이기엔 친구 집의 조건이 좋았다. 그리고 선생님이 춘천에서 오시는데
장호원에 사는 우리를 데리고 다시 원주로 가시기엔 너무 복잡했다. 돌아올
때만 선생님 차를 타고 오기로 했다.
집에서 이천 가는 길은 그래도 버스를 타고 더러 가보았다. 하지만 이 거리가 한
25분에서 30분 걸린다. 그리고 우리가 탄 원주행 버스가 능서와 여주를 거쳐가는
노선이어서 1시간 20분이 걸렸다. 거기서 택시로 다시 15분 정도를 가야 비로소
친구의 아파트에 닿을 수 있었다.
시간을 넉넉히 가지고 움직였다. 소은이는 배낭식으로 업는 캐리어에 태우고, 소미
손을 잡고 가방 하나를 들고 움직이자면 시간 여유가 있어야 아이들에게 짜증을
내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소미를 오줌 누이고 몇 가지 부탁 말을 조근조근
일렀다. 그나마 젖을 먹이고 친구네도 아이용품이 있을 터라, 아주 최소한의
물건만 챙기니 중간 크기의 숄더백 하나면 충분했다.
나는 이천행 버스에서 좀 멀미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사람들의 눈총을 받지 않고
원주까지 잘 가야할 텐데 하는 걱정이 크다보니 괜히 이랬다 싶은 생각까지 드는
게 스트레스가 되었던 모양이었다. 옛날 엄마들은 셋도 넷도 모두 데리고 차를
탔을 건데 둘을 데리고 이렇게 안 하던 멀미까지 하다니 좀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소미는 크게 문제가 없었다. 이것저것 즐겁게 물어오고 말도 잘 들었다. 그런데 소은이가
이천 가는 차안에서 토끼잠을 자더니 정작 원주행 버스 안에서 잠시도 가만히
있질 않았다. 우유에 빨대를 꽂아 먹여주려고 해도 제가 들고 먹겠다고 소리를
지르다가(아프고 난 후 눈에 띄는 특징이다) 엎지르고 버둥대고 난리였다.
떼를 조금 부리는데 아직도 시간은 많이 남았다. 차안에선 젖을 물리지 않으려던
계획이 틀어져 창가에 앉은 소미 쪽을 보고 젖을 먹였다. 차안은 휴가철이었지만
빈자리도 있을 정도로 한가했다.
젖을 먹이면서도 그 다음은 무엇으로 아이를 잡아둘까 바삐 요리조리 생각을 굴렸다.
그러다가 가방에 넣었던 풍선 생각이 나서 그걸 두 개 불어서 하나씩 주었다.
한참을 잘 가지고 놀았다. 결국 나중에 소은이는 풍선을 제 앞니로 물어뜯어
터뜨리고 말았다. 놀라기는커녕 곧바로 소미의 풍선을 빼앗으려고 달려들었다.
도무지 앉을 생각을 않고 거의 내 무릎과 의자에서 서서 가다시피 한 소은이는 뒤에
앉은 청년과 장난을 했다. 의자와 의자 사이 벌어진 틈으로 뒤쪽을 보면서 소리도
없이 한참 놀았다. 뒷좌석에서도 한마디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영화 <이티>에서처럼
검지 손가락을 마주 대기도 하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원주에 도착했는데
1시간 30분 걸린다던 시간이 10분이나 줄어든 게 너무 고마웠다.
택시를 잡았는데 기사는 아기엄마라서 그냥 지나가려다가 섰다고 했다. 자기 아내도
조금 전 아이를 데리고 외출을 했다고 했다. 어찌 고마운지 더위가 싹 가시는
게 이 나들이가 더없이 즐거웠다.
그렇게 만난 선생님과 친구니 얼마나 즐거운지 몰랐다. 친구인 민지 에미는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어놓고 점심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모두 7,8개월만에 만나는 것으로
오랜만이다. 선생님은 여전히 시골 중학교 국어교사이시고 우리만 이렇게 커서
딸들까지 낳았다.
셋이 함께 만난 경우는 한 3년만이니 풀어야 할 회포는 끝도 없었다. 아이들 셋이
뭉친 모습도 가관인데 그 가운데서도 즐겁기만 했다. 우리야 일상생활이지만 아이가
없으신 선생님은 적잖이 정신이 없으신 기색이셨다. 친구와 나는 서로 말은
안 했지만 큰소리를 내도 서너 번은 내고, 엉덩이에 손이 가도 한 번은 갔을
상황에서도 꾹꾹 참았다. 좋은 말로 달래고 어르고 칭찬했다. 선생님께 좋은
엄마의 모습을 보여드리려고 했던 것이다.
그 노력 덕분에 메일을 통해 선생님으로부터 좋은 엄마가 된 내 모습이 대견하다는
칭찬을 들었지만 솔직히 가슴이 찔렸다. 그런 칭찬은 내게 턱없이 과하다. 그렇지만
선생님을 만나면 그래서 힘이 나고 용기가 난다. 옛 제자에게 한번도 시들하지
않게 보여주시는 끝없는 애정과 적절한 자극이, 새 건전지처럼 내 몸에
쌩쌩하게 전해진다. 어른도 칭찬 한 마디에 이렇게 기분이 좋아지는데 아이들은
오죽할까. 바른 칭찬은 또 얼마나 아이를 자라게 할까. 아이들에게 걸핏하면
큰소리 내는 일이 부끄럽다.
다음날 선생님은 남편이 근무였던 터라 우리집에서 또 하룻밤을 묶으셨다. 소미는
"성생님, 성생님"하면서 선생님을 잘도 따랐다. 아침에 자고 일어나서도 성생님
어디가셨냐고 할 정도였다. 온천욕을 같이 할 정도로 친구처럼 이문 사이된 선생님이
더 가깝게 느껴진 시간. 아직도 우리의 추억여행, 지금 이야기가 무수히 오가며
깊어갔던 친구 집에서의 여름밤이 꿈결처럼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