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한 뼘 성장드라마
수녀원에서 하룻밤 본문
시간이 지금도 마음에 남아있다.
내게는 10년의 나이 차가 있는 수녀언니가 있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수녀가 되었고 지금은 아프리카 잠비아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다. 언니의 수녀원은
원주에 본원이 있는데 양로원, 병원, 고아원, 장애인시설 같은 사회복지시설을
운영한다. 96년에 첫
해외선교를 시작했는데 언니가 그 첫 해에 간 것이다.
언니는 아주 거기에 살면서 3년마다 3개월의 휴가를 받아 우리 나라에 돌아온다.
우리 나라도 도움을 받아야 할 곳이 천지인데 어디 남의 나라까지 가느냐 하는 사람도
있지만 우리 나라는 거의 40년 가까이 한 독일인
수녀의 도움을 받았다. 여기
총원장 수녀님이 독일 사람인데 63년인가 우리 나라에 와서 지금까지 피와 땀,
살과 뼈를 바치고
있다. 노인복지에 평생 크게 힘쓴 탓에 지금은 당신 머리도
다 하얗다. 지난 6월 사회복지 부분에서 호암상을 받으셨는데 그 1억원의
상금이
나는 더 반가웠다. 가뭄에 단비처럼 얼마나 요긴하게 쓰실까 해서.
이 아프리카 선교활동을 돕는 바자회가 10월 8일 반포성당에서 있는데, 수녀원은
그 준비로 한창 바빴다. 수녀님들은 한지 공예도
하고 계셨고 십자수도 놓고 계신다고
했다. 그렇게 열심히 하는데도 바자 품목이 너무 적은 것 같다고 걱정을
하셨다. 그래서 내 바로
위 언니가 퀼트 작품을 여러 가지 해 가지고 지원사격
차 우리들을 거느리고 간 것이다.
나도 아이들 크면 배우고 싶은 것 중에 하나인 퀼트는 여러 가지 조각 천을 잇고
누벼서 만든 아주 아름다운 수공예품이다. 커피 알이나
포푸리를 넣은 간단한
토끼인형부터 가방, 쿠션, 러그, 그리고 어린이용 이불까지 요즘 만든 것들을
모두 가지고 왔다. 이불은 본래
언니가 그림이(조카) 것으로 만든 건데 그림이가
수녀이모 돕는데 내놓겠다고 해서 가지고 왔다.
우리는 수녀원 바로 옆에 있는 양로원에 별채처럼 지어진 노인들을 위한 물리치료
실에서 잤다. 수녀원엔 손님방이 몇 개 있지만 다
1인실이다. 와! 너무 좋았다. 우리
집보다 넓고 우리 집보다 깨끗하고 아이들에겐 우리 집보다 더 재미있는 게 많은
듯 보였다.
화장실도 크고 온습포를 만드는 샤워실도 크고 밥 해먹을 도구만 없지 우린 콘도
같다며 웃었다. 각종 기구는 위험하지도 않으면서
아이들이 놀기에 더없이 좋았다.
소미와 소은이, 그림이는 웬만한 교실 만한 물리치료실 안을 뛰어다니고 보행
연습하는 얕은 계단 몇
개를 오르락내리락하며 정신이 없었다.
뭐든 풍족할 것이 없는 게 수도자들 생활이다. 그런데 나는 정말 '마음을 다한
대접받음'이 어떤 것인가를 여기서 경험했다. 저녁을
먹고 소은이 먹이라고 준비해주신
우유를 들고는 물리치료실로 갔더니 거기엔 벌써 작고 낡았지만 아주 깨끗한
이부자리 몇 채와 아이들이
좋아하는 과자 두 봉지, 포도 두 송이가 준비되어
있었다. 거기다가 아이들 있다고 벌써 난방까지 살짝 해놓으셨지 뭔가.
아침엔 할아버지, 할머니들 식사 후 우리들을 식당으로 오라고 하셨는데, 풍족하지
않지만 깔끔하고 맛있는 반찬으로 소미 밥에 수저까지
정갈하게 한 상 차려 있었다.
소미가 무채와 북어를 넣어 끓인 국에 호박 나물, 고사리 나물, 김부각,
김치 등으로 골고루 밥을 한
그릇 뚝딱 비웠을 정도다. 소미 먹는 걸 보니 내가
다 배가 부를 지경이었다.
한 식구든 손님이든 그 대접과 보살핌엔 차이가 없었다. 성심을 다한 마음을 떠나
행동하는 일은 없어 보였다. 그러면서도 모두 밝고
맑은 미소와 말씨가 소은이
마음까지 녹였는지 낯선 여러 수녀님들이 번갈아 안아도 우는 법이 없었다.
양로원은 모두 50명의 노인들이 완전 무료로 수녀님들의 보살핌을 받고 있다. 대부분
할머니들이고 할아버지는 다섯 분이라고 했다.
70대는 젊은 축에 속하고 대부분
80대 이상이다. 모든 구석구석이 깨끗하고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 노인 냄새라는
게 없었다. 총원장
수녀님이 의사라 의료지원이 거의 완벽하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돌아가시면 염습에 입관, 장례미사까지 모두 수녀님들이 한다.
할머니들은 도무지 아기들 볼 기회가 없으신 터라 소미, 소은이를 너무 환영하셨다.
파르르파르르 날개가 떨리는 나비 핀을 꽂으시고
입술연지도 살짝 바르신 한 멋쟁이
할머니가 소은이를 안아보려고 하시는데, 그 넓은 식당을 걸어서 돌아다니고
싶어서 엉덩이를 뺐다.
도토리같이 야무지고 똘망똘망한 게 낯도 많이 가리겠다고
척 알아보시는 품, 나는 노인들의 그런 눈을 아주 좋아한다.
내가 책임 수녀님께 할머니들이 요구하시는 것이 있으면 다 들어주시느냐고 물었다.
분에 넘치도록 이생의 삶 중 여기서 사는
동안만이라도 한이 없도록 다 들어드린다고
했다. 행불자도 많지만 자식이 있어도 버려진 분들이 많다고 한다. 나비핀
할머니께는 알로에
화장품을, 영양제 타령하시는 할머니께도 좋은 걸로 하나
사드렸다고 한다. 가진 한도 안에서는 드시는 것에 아낌없이 쓴다고 했다.
언니는
나더러 우리도 늙으면 가진 돈 다 가지고 여기 와서 살자고 해서 웃었다.
'그래, 우리들 때는 양로원 가는 일이 뭐 볼썽
사나울 것도 없이 자연스러울 테지.'
일요일이라 오전부터 자원봉사자들이 많았다. 학교의 사회봉사성적 때문에 온 고등학생들,
직장 동아리, 군인 다양했다. 다른 데서는
여간해서 고등학생을 안 받는데
그 이유가 모든 일을 다 일일이 가르쳐야 하기 때문이란다. 마늘을 어떻게 까야
하는지 모르는 아이들도
있다니 놀라울 다름이다. 돕기는커녕 짐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수녀님 말씀이 성장기에 잠시나마 이런 곳에서 봉사한 경험을 갖은 아이들은
그래도 커서 삶이 조금 다르지 않을까 해서 되도록
모두 받아들이려고 한단다.
저 두 남학생은 천주교 신자도 아닌데 자기들이 좋아서 추석 전날까지도 여기서
살았다고 하셨다.
시어머님의 오랜 세뇌로 이담에 '박사수녀님'이 되겠다는 소미를 바라보았다. 소미가
제 스스로 주말을 이런 봉사활동으로 보내는 아이로
자란다면 나 정말로 성적에
동동거리는 에미가 되지 않으리라 마음속으로 결심했다. 나도 엄두도 못내는
숭고한 삶을 실천으로 보여주기만
한다면 내가 내 딸의 어떤 부분을 타박할
수 있을까. 업고 다녀야지.
아침 일곱 시 수녀원 미사에서 연로하신 외국신부님의 강론이 아직도 사람을 모으는
푸른 종소리처럼 마음에
남아있다.
"수도공동체는 빠이빠이하고 세상을 떠나오는 곳이 아닙니다. 더욱 세상으로, 사람들을
향해, 이웃들 사이로 뛰어들 준비를
하고 오는 곳입니다. 그것이 참 수도정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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