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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이 스토리

M.미카엘라 2000. 8. 14. 21:37
벌써 며칠째 햇볕이 쨍쨍하고 무더워 아이들과 보내는 하루가 길고 길기만 하다.
아직도 한 일주일이 더 더울 것이라니 생각만으로도 숨이 턱까지 차 오른다. 그래도
한 가지 좋은 점은 쉴새 없이 나오는 수건이며 아이들 옷가지 빨래가 빨아
널자마자 버썩버썩 고소한 내를 풍기며 잘 마른다는 점이다. 나는 집안일 중에서
빨래 너는 일, 개는 일을 좋아하는데 이렇게 잘 마른 빨래를 개는 일은 아주
상쾌하다.

빨래 건조대가 있는 베란다에 한 바구니의 빨래를 널었다. 군인 아파트는 옛날에
지은 게 많아서 같은 15평이라고 해도 베란다 폭이 요즘 지은 민간아파트보다
좁다. 그리고 타일이 아니고 시멘트를 바른 채 그것도 푹 내려앉았다. 그래서 이
베란다를 잘 이용하는 방법이 군인가족 넓은 집 쓰기 요령의 하나가 되어버렸다.

우리 집은 이곳에 이사한 지 일 년이 다 되어갈 때쯤 내가 남편을 조르고 졸라 새 단장을
했다. 새 단장이라고 해봐야 두툼한 스티로폼 두 장을 잘라 깔고 그 위에 조각 장판을
구해서 깔았다. 거기다가 소미의 장난감을 모두 정리해두니 거실을 훨씬
넓게 쓸 수 있었다. 겨울이라도 해가 바른 날이면 춥지 않아서 놀기도 너무 좋다
그런데 단점이 베란다 끝에 옥상과 연결된 배수파이프가 있어서 비가 많이
오면 눅눅하다는 것이다.

지금 빨래를 널고 돌아서는데 꼬질꼬질한 장난감이 눈에 뜨였다. 지난 장마를 지낸
장난감들은 더러 곰팡이까지 슬어서 말이 아니었다. 언제 한번 장난감 좀 닦아야지,
닦아야지 했는데 순간 '그래 오늘 하자' 하고 마음먹었다. 보관상자가 있어서
더러움이 덜한 블록과 큰 바구니에 담긴 헝겊 인형들만 빼고는 모두 욕실로
가져가서 닦았다.

건전지가 들어가는 것을 따로 내놓으면서 정말이지 장난감이 언제 이렇게 늘었나
싶었다. 자잘한 플라스틱 인형부터 소꿉놀이, 쇼핑카트, 태엽 감는 인형 따위를 비눗물에
풀어놓으니 한 그릇이었다. 사실 곰곰이 따져보니 나나 남편이 사준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소미가 돌과 생일에 받은 선물, 그밖에 손주들 선물 사주는
것이 큰 즐거움인 시어머님이 평소 우리 집에 오실 때 사오신 선물들, 또
언니가 얻어다준 소꿉놀이 세트, 블록들이었다.

요즘은 아이가 있는 어느 집엘 가도 발에 채이는 건 온통 장난감일 정도로 놀이감이
풍성하다. 좀 어지르지 말아라, 어지른 것 좀 치워라, 안 치우면 간식 안 줄 거다,
다 컸으면 치울 줄도 알아야지, 유치원 다녀도 말짱 헛거다 따위의 말을 짜증
섞인 목소리로 아이들에게 퍼붓기 일쑤지만 장난감점에 가면 우리 아이에게
뭐 부족한 거 없나 하고 눈이 동그래지는 것이 요즘 엄마들이고 또 나다. 전집
교구를 100만 원어치 가까이 사놓고, 놀다가 어지르는 꼴 보기 싫어서 아예
장롱 속에 넣어둔 사람도 보았다. 나는 얼마 전에 큰 유통점에 가서 물놀이 장난감을
사줄까 했다가 갑자기 그 생각이 나, "아니! 이제 그만!"하고 낮은 소리로
말하면서 냉정하게 돌아왔었다.

언젠가 장난감을 적게 가지고 노는 아이들이 많은 장난감을 가진 아이보다 창의성이
더 발달한다는 기사를 읽은 기억이 난다. 장난감이 없어서 스스로 놀이감을 찾아내고
만들어내는 과정을 갖는 아이가 더 창의적이란 뜻일 게다. 지난 2월까지
우리 앞집에 살던 다섯 살 혜림이는 장난감이 아주 적은 편이었다. 혜림이
엄마가 워낙 알뜰해서 아주 필요한 것 말고는 여간해서 낭비를 하지 않았던
사람이다. 덕분에 혜림이는 텔레비전이나 비디오 보는 것을 그다지 즐기지 않았고
겨울이라도 웬만큼 추우면 밖에서 노는 것을 더 즐겼다. 감기가 걸려도 잘
이겨내고 똘똘하고 씩씩한 모습이 예뻤다.

생각해보면 나 어릴 때만 해도 어디 장난감이 있기나 했나 싶다. 화학조미료 '미원'
속에는 초창기 때 미원을 음식에 넣을 때 쓰라고 아주 작은 스푼이 들어있었다.
어른 손톱 만한 동그란 부분에 길고 가는 자루가 달린 하얀 플라스틱 소재였다.
소꿉놀이할 때 최고급 놀이감에 속했던 그 스푼이 너무 갖고 싶었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지금은 온갖 과일, 채소 모양에 싱크대, 가스렌지, 냄비, 접시, 포크, 수저 정말이지
현란할 정도다. 그러나 실물와 다름없이 완벽한 모양을 하여 바나나는 바나나로
밖에 쓸 수 없고 싱크대는 싱크대로 밖에 쓸 수 없다. 거기엔 동글납작한 돌맹이
하나가 접시도 되고 빈대떡도 될 수 있었던 부모 세대의 어린 시절과는
달라도 한참 다른 세대차이가 있다.

요즘 어린이들의 능력 척도처럼 꼽히는 창의력, 혹은 EQ를 넘치는 장난감이 키워
줄 수 있는 건지에 대한 질문에 대해선 나도 회의적이다. 햇볕에 널어 말렸던 장난감을
정리하면서 이제 되도록 내가 스스로 장난감을 사주는 일은 없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소미가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사랑하는 우리 소은이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케잌이라고 만든 것이 아주 기막혔다. 왕골 같은 재질로 얼기설기 짠 목침에
색색깔의 색연필을 꽂아서 만들었다. 소은이 앞에서 들고 서서 성의껏 노래를 부르다
나와 눈이 마주쳤는데 "엄마, 네모난 케잌이 이뻐요?"한다.
"그으럼, 세상에서 제일 이쁘다. 소은이는 행복하겠다."
아이들은 정말이지 기발하고 재미있는 놀이감을 더 잘 만들어낼 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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