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한 뼘 성장드라마

선제와 선재 본문

사랑충전소

선제와 선재

M.미카엘라 2002. 7. 5. 16:21
요즘은 다른 과일보다 자두가 제일 맛이 좋다. 날마다 저녁에 과일트럭이 아파트 앞에 오는데 자두 사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큼직하고 단단하지만 시지 않고 물이 많은 맛좋은 자두를 한 입씩 베어 물면, 나는 두 아이 얼굴을 하나하나 쳐다보며 "맛있다. 그치? 진짜 맛있지?"를 연발한다. 대답들은 안 하고 고개만 주억거리는데 뉴스는 서해교전 상황을 숨가쁘게 전하고 있었다.

"북한 경비정의 선제공격으로 우리 고속정의 조타실에 불이 났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소은이가 자두 먹던 입을 떼면서 우하하하 웃어댔다.
"우하하하! 선제공격이래! 선제공격!"
전사자도 4명씩이나 되어 우리 나라 전체가 침통한 분위기이고 제 아빠도 부대에 들어가 감감무소식인데 소은이는 그게 뭐 웃을 일인지 원……. 하지만 소은이에겐 그 말이 너무나 재미있을 수밖에 없다. 소은이는 지난번 살던 동네에서 눈만 뜨면 날마다 보고 놀았던 친구 '선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유선재'

소은이는 곧이어 소미를 쳐다보며 우스워죽겠다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이번엔 갑자기 축구 이야기다.
"언니 어제 유스(뉴스)에서 선제골을 넣었다고 그랬어. 선제골! 웃기지? 유선재골! 우하하하! 기찬이 돌잔치 가서 선재한테 '어제 유스에서 선재골 나오는 거 봤다' 이르케 말하면 혜영이 이모하고 선재도 깜짝 놀랄 거야 아마. 그러고 재미있다고 막 웃을 거야 아마. 우와! 재밌다. 웃기지 언니?"
그랬더니 소미의 맞장구가 한술 더 떴다.
"선제골? 그럼 내가 넣으면 소미골이네. 으하하하!"
"그럼 소은이골, 삼촌골, 군인아저씨골, 할머니골, 아빠골, 엄마골, 선생님골도 있겠네."

아이고 머리야! 두 딸들은 말도 안 되게 누구골, 누구골을 연발하며 수다가 그칠 줄 몰랐다. 그러면서 자두에서 나온 물이 팔꿈치로 흘러 뚝뚝 떨어지는 것도 모르고 지들끼리 숨넘어가게 웃어댔다.

나는 두 아이의 기상천외한 대화(?)에 씩 웃고 말았다. 그러다가 곧 아랫도리는 팬티만 입은 채 두 다리 쭉 뻗고 퍼질러앉은 소은이의 포동포동한 허벅지가 눈에 들어와, 순간 낄낄 소리 내서 웃었다. 그 옆에 앉은 새 다리같이 가늘고 약한 소미 다리에 견주면 우람하다. 제 언니 몸무게를 1킬로 차이로 바싹 따라붙고 있으니 조만간 추월하지 싶었다. 그런데 소은이가 이 때를 놓칠 리 없었다.
"엄마, 엄마도 웃겨? 선제골? 그치? 재밌지 엄마? "

나는 '그래, 무진장 웃기다' 이러고서는 박장대소했다. 애들은 내 이런 반응이 진짜 재미있어서 그런 줄만 알고 신이 나서 더 재잘재잘 댔다. 나는 선제와 선재를 어떻게 다르게 쓰는지, 또 '선제'는 무슨 뜻인지 설명하려다가 이내 그만 두었다. 그게 뭐 이 시점에서 중요한가 싶었다.

부럽다. 별로 재미있지도 않은 것을 재미있어하는 나이, 말로 충분히 설명하지 못해서 듣는 사람은 썰렁해도 자신은 풍부한 상상으로 너무너무 재미있는 나이, 말을 전혀 엉뚱하게 해석해서 좌중을 웃게 만드는 나이, 발음이 아직 어눌해도 그게 더 귀여운 나이가 부럽다.

소은이는 대부분 말의 발음이 정확해서 많은 사람들이 놀라지만 잘 안 되는 발음을 최근 하나 발견했다. '내려' '버려'에서 뒤에 'ㄹ' 발음이 잘 안되는 모양이다. '내여' '버여' 이렇게 말하는데, 난 처음 그게 요즘 한창 아기처럼 말하는 것에 재미를 붙인 탓에 일부러 그러는 줄 알았다. 그랬더니 다른 말은 평소처럼 똘똘하면서 유독 그 말을 할 땐 내여, 버여다.

반면 어휘력은 나날이 느는데 나도 때때로 놀란다. 집에 차로 15분 정도 떨어진 동네에 성당의 교우가 사시는데 그 집에 갔다가 놀이터에서 계속 놀겠다고 했다. 언니 올 시간이 되어서 너무 많이 놀 수는 없다고 달랬더니 "엄마, 그럼 미끄럼틀, 그네, 시소 딱 한번씩만 타고 서둘러서 가야겠다" 한다. '서둘러서?' 소은이가 그 말을 쓰는 건 처음 듣는다.
"으응? 서둘러서? 우리 소은이가 그런 말도 할 줄 알아? 근데 소은아, 서두르는 게 뭐야?"
"응, 그거, 빨리하는 거…."

어른이 된다는 건 세상의 음지와 양지를 모두 알아버려, 궁금한 것도 없고 호기심도 점점 줄고 재미있는 일도 그다지 없어지는 일이다. 어려운 말을 이해하고 한자어도 많이 알게 되고 말의 겉뜻과 속뜻을 따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창의력은 점점 줄고 생각은 판에 박히고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누군가에게 편지 한 줄 쓰는 일도 너무 어려워하는 게 많은 어른들이다.

아이들은 아는 말은 적어도 자기가 아는 한도에서 기막힌 말들을 쏟아낸다. 아는 게 많지 않은 탓도 있지만 생각에 고정관념이 없는 덕분일 것이라는 생각이 더 많이 든다. 아이들이 시인이고 작가라는 말, 내 아이뿐만 아이라 그 모든 아이들이 시인이고 작가의 소질을 보인다는 것은 아이들과 늘 가까이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시어머님이 좀 젊으셨을 때 이웃집 꼬맹이가 했던 말이라며 들려주신 이야기가 있다. 너무도 귀여워서 지금도 두고두고 잊히지 않는다고 하셨다. 전해들은 나도 아주 인상적이어서 여기에 잠깐 옮겨본다.

어머님은 그때 우리처럼 군인관사에서 살고 계셨는데 어떤 여름날, 우리 소은이 정도 되는 이웃집 여자아이가 밖에서 놀다가 갑자기 막 울면서 집으로 뛰어들어가더라고 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눈이 동그래졌는데 조금 있다가 그 아이가 다시 문밖으로 나왔다. 눈가에는 아직 눈물자국이 가시지 않았는데, 조금 전까지와는 달리 멋쩍은 듯 안심된다는 듯 씩 웃으며 자초지종을 말하더란다.
"구름이 이사 가는 거래요, 구름이. 우리 집이 떠내려가는 게 아니고 구름이 가는 거래요."

어머님이 하늘을 쳐다보니 흰구름이 제법 빠르게 한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고 하셨다. 평소 자주 보기 어려운 광경이었으니 아이는 순간 자기 집이 움직인다고 생각해서 놀랐던 모양이다. 우리가 기차를 타고 앉아있는데 맞은편 기차가 출발하면 꼭 내가 탄 기차가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처럼 말이다.

나는 이 육아일기에서 비록 내 아이들에 한정되어 있지만, 그렇게 아이들이 어른의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그 순간을 잘 잡아 보이고 싶다. 그런 주옥같은 말이나 행동은 그 당시에는 그렇게 인상적으로 다가오는데 이상하게도 생각보다 빨리 잊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번 글도 그 어감을 있는 그대로 옮길 생각으로 '서둘러서' 메모해둔 것을 토대로 썼다.



'사랑충전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생일선물  (0) 2002.07.22
냄새의 여왕  (0) 2002.07.12
4500만에서 두 명 빠진 함성  (0) 2002.06.06
생활 속, 돌격 앞으로!  (0) 2002.05.02
씹을 수는 없는 껌 이야기  (0) 2002.0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