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한 뼘 성장드라마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가 본문
사람들이 놀란다.
지난 토요일과 일요일에 친정에 다녀왔다. 소미와 소은이는 외할머니 집 언제 가냐고 날마다 나를 졸랐는데 갈 시간이 있었다가도 포기하고 안 간 때가 2주전쯤이다. 애들은 가기도 전부터 이번에 외할머니 집에 가면 열 밤 정도 자고 오자고 자꾸 졸랐다. 친할머니는 워낙 아이들 눈높이에서 아이들 마음을 잘 읽고 놀아주시니 더할 나위 없이 좋아하고, 외할머니는 가끔 괴팍하고 거칠게 말하시는데도 자주 보고 싶다 하고 외갓집 가고 싶다 했다. 2년 터울 두고 내 산바라지에 두 아이 목욕시키고 기저귀 빨아 길러주셨으니 뭘 모를 것 같은 아이들이라도 그 끈끈한 정을 감 잡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나는 가기 전에 아이들을 앉혀놓고 외할머니의 형편을 소상하게 들려주었다. 할머니가 혼자서는 전혀 움직이지 못하신다. 할머니는 온 뼈 마디마디가 다 아프시니 절대로 옆에서 놀다가 잘못해서 할머니한테 넘어지는 일이 없어야 한다. 할머니는 작게 말하는 소리는 잘 못 들으시니까 좀 가까이 크게 말해야 한다. 할머니는 큰 기저귀도 하고 계신다. 사람이 늙고 병들면 그렇게 아무 것도 못하게 될 때가 있단다. 그렇다고 할머니 흉보거나 밉게 생각하면 안 된다. 할머니가 누워만 계시니까 소미 소은이를 더 보고 싶어하신다. 그러니까 할머니 만나서 즐겁게 해드리고 잘해드리자. 뭐 이런 등등.
엄마가 그런 형편이시라 2주 전 큰오빠는 우릴 오지 못하게 했다. 소미, 소은이에게 외할머니 이런 모습 보여드리는 게 뭐 좋겠냐 하면서 휴일인데 쉬어라 했다. 그리고 2주 전 나는 선선히 그렇게 했다. 그게 부끄러운 일이라서, 못 보여줄 일이라서 포기했던 건 아니었다. 엄마를 바로 볼 자신이 없었다. 불과 1년도 안 되어 갑자기 확 늙어버린 엄마가 너무 낯설고 또 불과 얼마 전부터 완전히 거동을 못하시게 된 일이 잘 실감이 안 난다. 내겐 너무 빠른 속도였고 잡을 수도 없었다.
아이들은 할머니에게 무얼 해드릴까 한참을 서로 의견이 오가더니만 소미가 메모지에 또박또박 적은 계획표를 내밀었다. 할머니 안아드리기, 할머니한테 노래 불러드리기, 할머니한테 그림책 읽어드리기, 할머니한테 예쁜 말하기, 할머니 손잡아 드리기 등이다. 아이들은 전래동화가 있는 그림책 두 권을 가방에 골라 넣고 나는 이것저것 조금 장을 보아서 친정으로 향했다.
나는 엄마가 가는 귀를 잡숫고 식욕을 거의 잃으시고 도무지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아프신 것보다, 나날이 기력을 잃으시는 중에도 의외로 정신은 맑다는 게 더 가슴 아프다.
"엄마, 부산이모 딸 알죠? 막내딸 미갱이(미경이) 말예요. 알지 엄마? 엊그제 부산에서 결혼했대요. 평일 날 오전에 해서 여기서는 아무도
못 갔지 뭐. 엄마도 아프시고. 알아요? 엄마? 미경이?"
식구들이 모두 밖으로 나가고 난 아무 말 없이 누워만 있는 엄마의 겨드랑이를 잡아 일으켜 기대어 앉게 해드리고 말을 붙였다. 그런데 그만 딱 그 이야기만 나누고 다시 누우셨다. 그조차도 겨우 하고 힘겨워하셨다. 누우신 엄마의 눈빛이 이제 예전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나는 느꼈다. 다른 세상을 쫓고 계시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엄마를 바로 보는 일이 힘겨웠다.
그러나 어쨌든 아직 저리도 정신이 좋은 양반이 얼마나 고통일까. 말하는 것도 힘들어하시는데 그저 잠도 오지 않아 희미하게 정신이 들어있는 낮 시간에는 무슨 생각을 하실까. 아무 생각도 없으시진 않을 텐데. 이제 병원에서 해 줄 수 있는 뾰족한 치료가 없는 노환에 당신 몸이 속수무책 무너지는 상실감의 크기는 얼마만한 것일까. 자식들에게 평생 당신 속옷 빨래 한번 안 하게 하신 양반이, 아랫도리를 자식들에게 맡겨야 하는 심정은 어떤 것일까. 이런 것들에 생각이 미쳤지만 가늠해보고 싶은 마음을 잡아돌렸다. 가늠해봐야 그 깊은 심정 근처도 못 가고 가슴만 미어질 게 분명했다.
소미와 소은이는 계획했던 일들을 하나하나 할머니 앞에서 해 보였다. 그림책 읽는 소미 옆에서 소은이는 연신 나무 등걸 같은 엄마의 손을 잡고 쓰다듬었다. 아이들에게 부드러운 과일을 잘라 주면서 할머니 먹여 드리라 했더니 너무 좋아했다. 앞산과 작은 마을이 훤히 보이는 옥상에서 노는 재미에 외갓집 가자는 아이들인데, 할머니 과일 드시게 해라하면 두 말 않고 쪼르르 내려와 손을 씻고 접시를 받아들었다. 내가 한 일보다 아이들이 한 일이 더 많았던 주말과 휴일이었다.
오늘은 저녁 무렵에 시어머님과 할머니(남편의 외할머니시며 친정 엄마 연배이시다. 제대로 된 호칭인지 모르지만 아이들은 '상할머니'라고 부른다)가 오시기로 했다. 아이들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었더니 너무 좋아했다. 그런데 곧이어 소미가 대뜸 싫은 표정이었다.
"난 상할머니 싫어. 외할머니가 더 좋아." 내가 소미 마음속을 정확히 꼬집긴 꼬집었나보다.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쑥스러운 듯 고개만 끄덕끄덕했다.
근래 들어 보기 드물게 이쁜 짓이다. 소미가 하도 요즘 말을 안 듣고 사사건건 시비라 적잖이 지친다 생각하는 중이었는데 그래도 그 안에 고인 생각은 꽤 깊다. 자기 딴엔 엄마 맘 생각한다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불쑥 꺼낸 것인데 그 속을 내게 들켰다. 나는 소미가 무안해 할까봐 꼭 안아주면서 괜찮다고, 우리 소미 이쁘고 고맙다고 말해주었다.
"우리 엄마 아무래도 오래 못 사실 것 같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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