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한 뼘 성장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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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정원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가

M.미카엘라 2003. 5. 2. 00:38

사람들이 놀란다.
"우리 엄마 아무래도 얼마 못 사실 것 같애."
이러니까 나보다 듣는 사람이 더 놀란다.
-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그 말이 그렇게 쉽게 나올 수 있냐.
-그런 말 해놓고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먹는 거 보니 이제 너도 나이 드는 거냐.
그랬던 것 같다. 그 말을 하고 신선한 샐러드를 먹었던가 그랬던 것 같다.

 

지난 토요일과 일요일에 친정에 다녀왔다. 소미와 소은이는 외할머니 집 언제 가냐고 날마다 나를 졸랐는데 갈 시간이 있었다가도 포기하고 안 간 때가 2주전쯤이다. 애들은 가기도 전부터 이번에 외할머니 집에 가면 열 밤 정도 자고 오자고 자꾸 졸랐다. 친할머니는 워낙 아이들 눈높이에서 아이들 마음을 잘 읽고 놀아주시니 더할 나위 없이 좋아하고, 외할머니는 가끔 괴팍하고 거칠게 말하시는데도 자주 보고 싶다 하고 외갓집 가고 싶다 했다. 2년 터울 두고 내 산바라지에 두 아이 목욕시키고 기저귀 빨아 길러주셨으니 뭘 모를 것 같은 아이들이라도 그 끈끈한 정을 감 잡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나는 가기 전에 아이들을 앉혀놓고 외할머니의 형편을 소상하게 들려주었다. 할머니가 혼자서는 전혀 움직이지 못하신다. 할머니는 온 뼈 마디마디가 다 아프시니 절대로 옆에서 놀다가 잘못해서 할머니한테 넘어지는 일이 없어야 한다. 할머니는 작게 말하는 소리는 잘 못 들으시니까 좀 가까이 크게 말해야 한다. 할머니는 큰 기저귀도 하고 계신다. 사람이 늙고 병들면 그렇게 아무 것도 못하게 될 때가 있단다. 그렇다고 할머니 흉보거나 밉게 생각하면 안 된다. 할머니가 누워만 계시니까 소미 소은이를 더 보고 싶어하신다. 그러니까 할머니 만나서 즐겁게 해드리고 잘해드리자. 뭐 이런 등등.

엄마가 그런 형편이시라 2주 전 큰오빠는 우릴 오지 못하게 했다. 소미, 소은이에게 외할머니 이런 모습 보여드리는 게 뭐 좋겠냐 하면서 휴일인데 쉬어라 했다. 그리고 2주 전 나는 선선히 그렇게 했다. 그게 부끄러운 일이라서, 못 보여줄 일이라서 포기했던 건 아니었다. 엄마를 바로 볼 자신이 없었다. 불과 1년도 안 되어 갑자기 확 늙어버린 엄마가 너무 낯설고 또 불과 얼마 전부터 완전히 거동을 못하시게 된 일이 잘 실감이 안 난다. 내겐 너무 빠른 속도였고 잡을 수도 없었다.

아이들은 할머니에게 무얼 해드릴까 한참을 서로 의견이 오가더니만 소미가 메모지에 또박또박 적은 계획표를 내밀었다. 할머니 안아드리기, 할머니한테 노래 불러드리기, 할머니한테 그림책 읽어드리기, 할머니한테 예쁜 말하기, 할머니 손잡아 드리기 등이다. 아이들은 전래동화가 있는 그림책 두 권을 가방에 골라 넣고 나는 이것저것 조금 장을 보아서 친정으로 향했다.

나는 엄마가 가는 귀를 잡숫고 식욕을 거의 잃으시고 도무지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아프신 것보다, 나날이 기력을 잃으시는 중에도 의외로 정신은 맑다는 게 더 가슴 아프다.

"엄마, 부산이모 딸 알죠? 막내딸 미갱이(미경이) 말예요. 알지 엄마? 엊그제 부산에서 결혼했대요. 평일 날 오전에 해서 여기서는 아무도 못 갔지 뭐. 엄마도 아프시고. 알아요? 엄마? 미경이?"
오랜만에 희미하게 웃으며 겨우 어눌하게 입을 떼신다.
"그으래? 그럼 그 미국사람하고 했다냐?"
"음, 엄마 아시네. 정확히는 프랑스 사람이야. 그 시댁 어른들이 미경이 무진장 이뻐한대요. 미경이 말이 거기서는 여기 하는 거 반만 어른들한테 잘 해도 대접받고 산대. 너무 좋아하고 이뻐한대. 걔가 실제 이쁘기도 하잖아요. 잘됐지 뭐. 그쵸?"
"그려. 어쩌다 외국 사람을 다 만나 결혼했으까이."
"프랑스에서 공부했으니 뭐… 괜찮아 엄마. 잘 살면 돼. 행복하면 되지 뭐. 이모도 이젠 좋아하시는 눈치던데."
"그래, 그렇다. 요즘 세상에."

식구들이 모두 밖으로 나가고 난 아무 말 없이 누워만 있는 엄마의 겨드랑이를 잡아 일으켜 기대어 앉게 해드리고 말을 붙였다. 그런데 그만 딱 그 이야기만 나누고 다시 누우셨다. 그조차도 겨우 하고 힘겨워하셨다. 누우신 엄마의 눈빛이 이제 예전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나는 느꼈다. 다른 세상을 쫓고 계시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엄마를 바로 보는 일이 힘겨웠다.

그러나 어쨌든 아직 저리도 정신이 좋은 양반이 얼마나 고통일까. 말하는 것도 힘들어하시는데 그저 잠도 오지 않아 희미하게 정신이 들어있는 낮 시간에는 무슨 생각을 하실까. 아무 생각도 없으시진 않을 텐데. 이제 병원에서 해 줄 수 있는 뾰족한 치료가 없는 노환에 당신 몸이 속수무책 무너지는 상실감의 크기는 얼마만한 것일까. 자식들에게 평생 당신 속옷 빨래 한번 안 하게 하신 양반이, 아랫도리를 자식들에게 맡겨야 하는 심정은 어떤 것일까. 이런 것들에 생각이 미쳤지만 가늠해보고 싶은 마음을 잡아돌렸다. 가늠해봐야 그 깊은 심정 근처도 못 가고 가슴만 미어질 게 분명했다.

소미와 소은이는 계획했던 일들을 하나하나 할머니 앞에서 해 보였다. 그림책 읽는 소미 옆에서 소은이는 연신 나무 등걸 같은 엄마의 손을 잡고 쓰다듬었다. 아이들에게 부드러운 과일을 잘라 주면서 할머니 먹여 드리라 했더니 너무 좋아했다. 앞산과 작은 마을이 훤히 보이는 옥상에서 노는 재미에 외갓집 가자는 아이들인데, 할머니 과일 드시게 해라하면 두 말 않고 쪼르르 내려와 손을 씻고 접시를 받아들었다. 내가 한 일보다 아이들이 한 일이 더 많았던 주말과 휴일이었다.

오늘은 저녁 무렵에 시어머님과 할머니(남편의 외할머니시며 친정 엄마 연배이시다. 제대로 된 호칭인지 모르지만 아이들은 '상할머니'라고 부른다)가 오시기로 했다. 아이들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었더니 너무 좋아했다. 그런데 곧이어 소미가 대뜸 싫은 표정이었다.

"난 상할머니 싫어. 외할머니가 더 좋아."
"왜에? 소미 상할머니 좋아하잖아. 너희들 얼마나 예뻐하시는데. 요즘 좀 아프셔서 기운도 없으시고 말씀도 없으시니 안 그래 보이니? 괜히 하는 소리지?"
이럴 리가 없다 소미가 상할머니를 좋아한다는 것은 내가 아는데.
"왜에? 언니는. 난 상할머니도 좋고 친할머니도 좋고 외할머니도 좋은데."
"그래도 난 싫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엄마의 엄마니까 외할머니가 좋아."
"그럼 소미는 아빠 안 사랑해? 할머니는 아빠의 엄마고 상할머니는 아빠의 외할머닌데?……음, 알겠다. 소미가 며칠 전에 외갓집 갔다와서 그러는구나. 외할머니가 아파서 누워 계시면서 아무 것도 못하신 걸 보고 와서 마음이 안 좋은 거지? 외할머니가 불쌍하고 가엾어서. 그래서 외할머니를 더 좋아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거지?"

내가 소미 마음속을 정확히 꼬집긴 꼬집었나보다.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쑥스러운 듯 고개만 끄덕끄덕했다.
"그래, 우리 소미 마음이 착해. 엄마가 니 맘 알아. 상할머니 오시는 게 좋다고 하면 괜히 외할머니한테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그런 거지? 그리고 엄마도 서운해하면 어쩌나 그래서 그런 거지?…… 괜찮아. 엄마는 소미가 외할머니 말고도 친할머니, 상할머니는 물론, 다른 할머니들을 좋아하고 할머니들한테 잘하는 게 아주 이뻐. 상할머니 오시는 게 좋다고 해도 돼. 응?"

근래 들어 보기 드물게 이쁜 짓이다. 소미가 하도 요즘 말을 안 듣고 사사건건 시비라 적잖이 지친다 생각하는 중이었는데 그래도 그 안에 고인 생각은 꽤 깊다. 자기 딴엔 엄마 맘 생각한다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불쑥 꺼낸 것인데 그 속을 내게 들켰다. 나는 소미가 무안해 할까봐 꼭 안아주면서 괜찮다고, 우리 소미 이쁘고 고맙다고 말해주었다.

"우리 엄마 아무래도 오래 못 사실 것 같애."
이 말을 나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는가.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걸 보니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려고 애쓴 효과가 있다. 이것도 내 딴엔 준비라고 하는 짓이다. 마음의 준비를 미리 이렇게 말로 한다고 해서 나중에 그 충격과 슬픔이 덜할지 어떨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나는 이러면서 마흔 셋에 나를 낳으신 엄마와의 이별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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