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한 뼘 성장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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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충전소

언니노릇은 힘들어!

M.미카엘라 2001. 1. 6. 15:32
친정엄마가 지난 7월에 두 아이들 홍역할 때 다녀가시곤 한 3개월만에 오셨다.
그 동안 고추 널고 말리느라 애쓰시다가 어찌 잘못해서 팔목을 다쳐 아직도 왼팔을
잘 못쓰셨다. 깁스를 오래하셨는데 아직도 오른쪽 팔목보다 눈에 뜨이게 붓기가 남아
있었다. 젊은 사람들 같지 않아서 완전히 회복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다.

나를 마흔 셋에 나으셨으니 이젠 연로하신 데다가 그렇게 몸이 불편하게 되니 마음의
상심이 크신 것 같았다. 전화를 해도 목소리가 우울하고 식사도 전처럼 잘 안 하신다는
새언니 말을 들었다. 오시라고 했다. 소은이도 아장아장 걸으면서 잘 노니 그냥 오셔서
애들 노는 것 구경하시라고 했다.

이젠 친정 조카들도 모두 커서 시집 간 애도 있고, 군대간 녀석에, 직장 다니느라
서울에 있는 애도 있으니 집이 고적할 대로 고적했다. 오빠와 새언니는 작은 목장을
꾸리느라 젖소들하고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으니 엄마는 너무 적적하실 게 분명했다.
나는 절대 효녀가 못되는데도 요즘 그 꼬장꼬장한 면모를 다 잃으시고 쇠약해진 모습을
뵈면 마음이 자주 쓰인다.

소미는 외할머니를 반겼다. 내가 "팔이 많이 아프시니 잘 해드리자, 할머니 업어주세요
라는 말은 하지 말자"하고 세뇌교육을 시켰다. 그랬더니 적잖게 머리 속에 그 말을 저장해둔
모양이었다. 하긴, 애들은 시키지 않아도 기특할 정도로 뭐든 잘할 때가 있다. 한마디로
'짓이 나서'이기도 하고 변덕이 발동할 때이기도 하다.

늘 소은이를 밀고 때리고 엎어뜨려서 누르기를 보통으로 하는 소미가 한번 짓이 나서
동생을 돌보기로 마음먹으면 참으로 눈꼴셔서 우습다. 동생보다 만 두 살밖에 안 많은
네살바기가 어휘선택도 말투도 닭살 돋게 어른처럼 하면서 극진한데, 정작 보살핌을
받는 소은이는 너무 성가시고 불편해서 전처럼 그냥 좀 맞고 조르기 당하는 게 차라리
낫다는 표정이다.

소은이가 점심상 차리는 부엌에만 와서 노니까 소미는 굳이 소은이 손을 잡고 할머니가
계신 거실쪽으로만 가려고 했다.
"소은아, 할머니한테 가자. 할머니 앞에 가서 놀아야지. 옳지, 옳지 우리 소은이 착하다.
'함미니'해봐 응? '함미니 사랑해요'해봐 응?"

말이 빠른 소은이가 할머니를 '함미니'라고 하는데 그 발음까지 흉내내며 기어이
할머니 앞에 가서 재롱떨면서 놀기를 종용했다. 할머니 손목 부은 걸 보고 나더니
제 딴엔 오랜만에 오신 할머니를 위로해드리자는 갸륵한 심사가 있었던 것이다. 나도
기특한 마음이 들어서 갔다가 다시 돌아올지언정 소은이가 거실로 가주길 바랬다.

그런데 막무가내 소은이가 언니의 이 깊은 속을 알 리가 없었다. 말로만 '함미니'
따라하면서 퍼질러 앉아서 계속 딴 짓에 열중이었으니 속이 탈대로 탄 소미가 팔을
잡아끌고 난리가 났다.
"아유, 우리 소은이 착하다. 언니가 소은이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그래. 빨리 할머니한테
가자 응?"

내가 소은이는 여기 있고 싶은가 보다, 그냥 내버려둬라 해도, 엄마도 괜찮으니 그냥
두라고 해도 계속 끈질기게 가자고 했다. 그러다가 회유책까지 쓰는데 내 참! 내가
잘 쓰는 수법인데 속으로 '이그, 우리 큰딸 너두 속상하지? 소은이가 언니 말 안 들으니
화나지? 속 좀 상할 거다. 이제 엄마 맘 알겄냐?'하며 웃음을 참고 지켜봤다.

"소은아, 언니가 좀 기다려주께. 쫌 있다 갈 거지? 우리 소은이는 착하니까 쫌 있다
갈 거야"하면서 소은이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내가 보기엔 쫌 있다가도 안 갈 것
같은데, 제 맘 같을 거라 생각한 것이다.

결국 소미 손에 소은이는 질질 끌려가기 시작했다. 소은이는 소리를 지르며 엉덩이를
빼고 소미는 나를 보고 도와달라고 소리쳤다. 내버려두라고 했더니 소은이 손을 팍 놓았다.
그러더니 예의 그 누르기를 하며 손으로 등을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너 왜 언니 말을 안 들어? 왜? 맞아, 맞아!"
결국 둘을 억지로 떼어놓았는데 분해서 우는 소은이는 점심상을 차리자 뚝 그쳤다.

저녁엔 엄마를 모시고 온천에 갔다. 신발을 벗고 탈의실로 들어서자 거기서 일하시는
듯한 아주머니가 아장아장 걸어 들어가는 소은이가 인형 같다며 발딱 안으셨다. 나무
평상 위에서 소은이 옷을 벗겨주시는 걸 보았는데 소미가 나를 쿡쿡 찌르며 말했다.
"엄마, 소은이 데리고 와."
"아냐, 아줌마가 소은이 예뻐서 옷 벗겨 주신대. 괜찮아. 엄마가 여기서 보고 있잖아.
곧 데리러 갈 거야."
소은이가 낯설어서 울자 더 애가 닳아서 빨리 데리고 오라고 난리였다. 참, 아까하곤
사뭇 달랐다.

탕 안으로 들어가서는 계속 소은이를 따라 다니며 넘어질까 멀리 갈까 노심초사였다.
미끄러질까봐 바닥에 고무무늬가 있는 양말을 신겨놓으니 제 세상을 만나서 좀체로
가만있질 않는 소은이 따라다니느라 제가 더 바빴다.
"엄마 소은이 좀 멀리 못 가게 하세요."

정말 왜 많은 사람들이 자식은 적어도 둘은 낳아야 한다고 말하는지 잘 알 수 있는
하루였다. 언니노릇 한 번 되게 해보려던 소미에게 치인 하루가 힘들었는지 소은이는
돌아오는 차 안에서 잠들었다.

지난 여름 오후. 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