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한 뼘 성장드라마
그녀는 야누스 본문
1. 야누스의 이쪽
정월 초하루도 지나고 정월 대보름도 막 지나 이제 새해인사 나누기도 멋쩍은 며칠 전, 소은이가 느닷없이 내일은 한복을 입고 유치원을 가야겠다고 했다. 나는 갑자기 유치원에 무슨 한복이냐고 펄쩍 뛰는데 선생님께 세배를 하겠노라는 것이다. 이어서 세배를 하고 세배돈을 받겠다는 속내를 거침없이 드러내는데 실소가 절로 나왔다.
“아구구, 그럴 거면 한복도 입지 말고 세배도 하지 마.”
“왜요오?”
“세상 천지에 선생님한테 세배돈 받는 사람이 어딨어? ‘한해동안 잘 가르쳐주셔서 고맙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하는 감사인사를 하면서. 세배돈을 주신다고 해도 ‘세배돈 받으려고 세배하는 거 아니예요’ 해야지. 그렇게 말하지 않을 거면 관둬!”
“…… 알았어요. 그렇게 할게요. 그러니까 한복 입혀주세요.”
“정말이지? 근데 친구들이랑 같이 하기로 한 거야?”
“아니요. 그냥 나 혼자 할 거예요.”
“으잉, 혼자? 정말? 할 수 있어?”
“그럼요. 벌써 여섯 살 언니 됐는데요. 엄마는 참!”
“친구들이 빙 둘러서서 구경할지도 모르는데? 정말 혼자 할 수 있어?”
“네. 그럼요.”
“잘 생각해봐. 하지 못하고 돌아올 거면 그냥 가. 거추장스럽잖아.”
“아니예요. 할 거예요. 나 한복 좋아하잖아요. 설날 지나고도 많이 입고 놀았잖아요.”
꿋꿋했다. 그렇게 해서 소은이는 모처럼 일찍 일어나서 스스로 준비하고, 소미에게서 물려받은 치마저고리, 두루마기, 버선에 꽃신, 조바위까지 일습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섰다. 그 조신한 차림새에 등엔 짊어진 초록색 유치원 가방이 튀기는 했지만 어쩌랴. 나중에 편하게 갈아입을 옷과 함께 선생님께 튈 대로 튀는 차림으로 보내게 된 사연을 적은 짧은 편지를 넣었다.
그리고 나는 오전을 궁금하게 보냈다. ‘정말 혼자 할까’하는 의구심이 그때까지도 맴돌았다. 그리고 오후가 되어 이윽고 아이들이 돌아왔다. 나도 궁금했고 소은이도 내게 자랑하고 싶은 게 많은 모양이었다. 문을 열자마자 소나기처럼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소은이는 놀랍게도 원장 선생님을 비롯해서 연령별 각 반 선생님 네 명, 그리고 특별수업 선생님까지 무려 여덟 명의 선생님께 세배를 했다고 자랑이 늘어졌다. 그 중에서 세배 받는 걸 가장 좋아했던 선생님은 외국인 영어선생님이셨다고 덧붙였다. 일주일에 두 번 하는 영어시간이 마침 그날 있었다는 것을 잊었다. 친구들이 보는데도 했냐고 하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한다는 말이 걸작이다.
“친구들이 나를 자랑스러워했어요. 그리고 부러워했어요. 남자친구들은 나한테 반했어요.”
나와 소미는 그 말에 깔깔댔다. 가방을 열어보니 거기 돈이 조금 있었다. “너어~” 그러면서 곱게 눈을 흘겼더니 결백하다는 듯 펄쩍 뛰며, “엄마, 아니예요. 제가 선생님한테 ‘세배돈 받을라구 하는 거 아니예요’ 그랬단 말이예요. 근데도 자꾸 원장 선생님이랑 선생님이 주시잖아요”한다. 세배돈 대신 받은 과자봉지가 또 가방 속에 있는 걸 보고 그냥 픽 웃고 말았다. 쑥스러움도 없이 부끄러움도 없이 씩씩하게 하고 돌아온 용기가 참 가상하다. 그건 아무래도 날 닮은 것 같지는 않은데 생각해보면 용기라기보다 한복을 워낙 좋아해서 좀 자랑을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이틀 뒤 유치원에서 돌아온 소은이는 문이 열리자마자 애석하다는 듯이 소리쳤다.
“아이 참, 엄마 오늘도 한복 입고 갔어야 돼요. 오늘 체육선생님이 오셨거든요. 세배 못 받으셔서 얼마나 슬프시겠어요. 엄마, 내일 또 입고 가까?”
2. 야누스의 저쪽
나는 월요일 아침부터 소은이의 종아리에 매를 대고 유치원을 보내지 않았다. 오래오래 참았던 아침전쟁에 종지부를 찍을 참이었다. 아침마다 음악으로 깨워, 진하게 뽀뽀해줘, 궁뎅이 두들겨줘, 충분히 잠깰 시간 줘, 정 뭐하면 안아서 변기에 앉혀주기까지. 그렇게 아침을 시작한다. 그런데 요즘은 그게 영 잘못된 것인가 싶게 헷갈리는 나날이다.
소은이는 거의 날마다 징징대며 내게 모든 걸 다 해달라고 성화다. 한동안 내 급한 성격을 어쩌지 못하고, 또 유치원 버스 놓칠까 노심초사하며 전부 해준 적이 있었다. 그러다가 변기에 앉혀두고 좋은 말로 조근조근 달래서 시켜볼라치면 욕실에서 20분이고 30분이고 세월아 네월아 한다. 그렇게라도 제대로 하고 나오면 좋으련만 머리카락 한 올에 물 한 방울도 안 묻히고 세수 다했다고 하고, 입 벌려 보라고 하니 입 냄새 그대로다. 45분 버스를 타야 하는데 스스로 하라고 두었더니 30분이 넘도록 그 모양이니 분통이 터진다. 지난번엔 스스로 할 때까지 두었다가 아침을 굶고 간 적이 있다.
나는, 씻는다고 상의는 모두 벗고 내복바지만 달랑 입고 징징 설치던 소은이에게 아무 말도 안 하고 매로 종아리를 두 대 때렸다. 그리고 오늘 유치원 가지 말라고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는 왜 나만 때리시는 거예요오. 엉엉!”
그렇게 울면서도 갈 거라고 했다.
‘너 자꾸 그러면 유치원 안 보낸다.’ 이 말은 자주 했던 말이다. 유치원 가지 말라고 하면 그래도 몸을 후다닥 재게 놀리면서 갈 거라고 소리치는 걸 보았기 때문에 이런 협박성 말을 남발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 더 이상 협박이 아니다. 나도 집에서 할 일이 많아서 시간도 필요하고 힘도 필요한 상황인데… 그래도 결심은 굳었다.
소미만 서둘러 집을 나서게 했다. 소미에겐 한마디로 뭐라고 하지 않았지만 소미도 적잖이 긴장하는 눈치였다.
“소미, 엄만 한다면 해. 설마 했지?”
유치원 안 보내겠다고 했을 때 아이들은 정말 ‘설마 엄마가…’라는 말을 저희들도 모르게 흘린 적이 있었다. 오늘 그 ‘설마’가 어떤 실제상황을 가져오는지 생생히 보여주리라 생각했다. 소미를 데리고 나가려는데 침대가 있는 방으로 가서 엎어졌다. 나는 소은이를 발랑 들어다가 저희들 방에 데려다 놓았다.
“엄마 방에 가지 말고 너희 방에서 생각해. 오늘은 엄마가 너무 화가 나서 소은이가 엄마 침대에 있는 것도 싫어.”
유치원 버스에서 선생님께 간단한 상황을 전하고 돌아오니 상의는 벌거벗은 채, 머리는 사자 머리로 산발을 해가지고 내가 들어다 놓은 그대로 엎드려 있다가 일어났다.
“엄마아!”
울먹이는 목소리로 내게 엉겨 붙으려는 걸 떼어놓았다. 요 깜찍한 ‘수작’을 모를 줄 알고? 소미는 안 그러는데 요건 꼭 잘못한 뒤에 이런 식으로 무마하려고 든다. 그런 모습이 없는 소미가 어떤 땐 냉정하게 느껴져 소은이가 이럴 때는 이뻐서 몇 번 넘어가주었지만 오늘은 달랐다.
“엄마아, 왜 나를 안 사랑하시는 거예요오?”
“넌 엄마가 널 안 사랑해서 이런다고 생각해? 엄만 지금도 소은이 사랑해. 근데 요즘 아침마다 소은이 하는 건 더 이상 못 참아주겠어. 소은이는 엄마가 왜 이렇게 화가 났는지 정말 모르겠어?”
“알아요. 제가 징징거리고 아침에 준비 잘 안 해서 그래요.”
(하이구, 말이나 못하면 정말)
“맞았어. 그러니까 오늘 집에 있으면서 벌 서는 거야. 유치원 차를 못 타게 되면 얼마나 하루가 길고 심심한지 알아보는 게 벌이야. 오늘 사실 엄만 아무것도 안 주고 굶기고 싶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어서 밥은 준다. 그치만 간식은 사탕 하나도 줄 수 없고 엄마는 소은이가 유치원 갔다고 생각하고 일을 할 거니까 노는 것도 알아서 놀아야 돼.”
“벌은 언제까지예요?”
“언니가 유치원에서 올 때까지.”
“근데 엄마, 왜 저한테 이쁜 말로 안하세요? 화난 것처럼.”
“당연하지. 아직 엄마가 화도 안 풀렸고 이런 미운소리 듣는 것도 벌에 속하는 거니까.”
“네에...”
그리고는 둘이 아침으로 떡국을 먹고 나는 나대로 일하고 소은이는 소은이대로 혼자 놀았다. 노여움도 없다. 그렇게 호되게 맞고도 잠깐 울다가 다시 천연덕스러워진다. 뒷베란다로 가는 걸 내가 쳐다보니까, “엄마, 나 간식 찾으러 가는 거 아니예요. 다른 거 가지러 가는 거예요”하면서 친절한 설명을 하지 않나, 저희 이모와 통화하고 났는데, “엄마, 소미 언니 어저께 처음으로 이 빠졌다고 얘기 안 하셨죠? 현주이모가 깜짝 놀랄 텐데”하면서 훈수까지 한다.
그러나 그렇게 꼼지락거리며 노는 것도 오전까지는 좋았다. 뭔가 열심히 그리고 쓰고 나쁘지 않아보였다. 그러나 그것도 시들해졌는데 말도 안 붙여주고 일만 하는 엄마, 물어봐도 그다지 엄마가 곱게 응대하지 않는 형편에, 입도 슬슬 궁금해지는 게 역력했다. 점심밥 먹자고 하니까 안 먹고 싶단다.
“그럼 할 수 없지. 엄마만 먹어야지. 배고파져서 다시 밥 달라고 해도 소용없어. 저녁까지 기다릴 수 있어? 그리고 간식도 먹을 수 없는 거 알지?”
“아니예요. 먹을 게요. 근데 쪼끔만 주세요오!”
쪼끔만 먹기는…… 바지락을 넣은 시금치된장국에 고등어구이, 김, 김치까지 척척 얹어가며 밥그릇 국그릇을 깨끗이 비웠다.
그리고 오후에는 몸부림이 나고 있었다. 만화영화도 조금 보다가 시시하고, 한 시 조금 넘어서 앞집 태곤이네 아이들이 돌아오는 소리가 들리는데 놀러 가면 안 되느냐고 물었다.
“소은이 지금도 벌 서는 중인 거 몰라?”
아무소리도 못했다. 혼잣말로 ‘아후, 언니는 언제 오냐 정말. 심심한데…’한다. 그렇게 몸부림 나는 오후 세 시간을 보내고 소미가 오니 아주 구세주를 만난 형상이었다. 우리 언니 너무 이쁘다는 둥, 보고 싶었다는 둥, 착한 언니라는 둥, 아주 눈꼴이 시어서 못 봐줄 정도로 찬사를 퍼부었다.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엄마의 잦은 협박성 멘트는 언제든지 현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으려니 한다. 다만 이런 버릇들이기도 아이들이 유치원이나 학교 가는 걸 즐거워한다는 걸 전제로 한다. 그리고 집에 있어보니 그럭저럭 좋다고 생각하거나 재미가 들려버리면 곤란하니 조절을 잘해야 한다. 텔레비전을 좋아하는 소미였다면 나는 텔레비전도 못 보게 했을 것이다. 정말 심심하게, 아주 지루하게, 되도록 불편하게, 끝내는 몸부림 나게 만들어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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