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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충전소

거지 뱃속

M.미카엘라 2004. 4. 9. 17:50

 

 “엄마, 오늘 저녁은 무슨 반찬 해주실 거예요?”

 “글쎄 뭐가 좋을까? 먹고 싶은 거 있니?”

 “네. 된장찌개나 뭐 청국장 같은 거요. 그거 안 먹은 지 좀 됐다 그쵸?”

 “그러지 뭐. 된장찌개 할게. 두부도 있고 팽이버섯도 있으니까.”

 “아니요. 청국장. 그거 해주세요. 두부 많이 넣어서요. 그 부드러운 콩도 많이”

 

 소미는 딱 토종 입맛이다. 참기름 살짝 뿌려 조그맣게 자른 명란젓, 고등어나 코다리, 갈치 같은 생선을 무 넣고 조린 것, 골뱅이하고 묵, 오이, 양파를 함께 새콤달콤 매콤하게 무친 것, 홍합살 넣은 미역국, 고추장양념 돼지불고기, 누룽지 끓인 것, 김치전, 당면하고 돼지고기 조금 넣고 끓인 김치찌개, 나박하게 썬 무와 두부가 어우러진 시원한 생태찌개, 김치 조금 넣은 콩비지, 바지락 넣은 순두부, 메밀국수나 비빔국수 이런 것을 좋아하는 것으로 보아 칼칼하고 개운한 맛을 즐기는 듯 보인다.

 

 오늘 학교에서 보낸 급식에 관한 설문지를 표시하다가 ‘편식을 한다면 특별히 어떤 음식을 싫어하는가’하는 물음에 딱히 답할 내용이 없어서 망설이는데, 소미는 ‘기름기 많고 느끼한 음식’이라고 써달라고 했다. 그건 편식하는 건 아니라고 말해줬지만 일단 썼다. 새롭거나 낯선 음식, 생전 처음 보는 음식을 두고도 망설임 없이 “엄마, 저거 한번 먹어볼래요”라고 말하는 터라 가리는 것도 그다지 없다.

 

 그런데 나는 늘 가늘가늘한 몸에 작은 키, 엄지와 검지로 만든 동그라미 안에 쏙 들어가서도 넉넉하게 남는 손목이 안쓰럽다. 학교에서 돌아올 때마다 묵직한 책가방을 메고 씩씩대며 상기된 얼굴로 들어서는 모습이 예쁘면서도 애처롭다. 어릴 때는 잘 먹지 않아서 안 크는 거다 했는데, 좀 커서는 골고루 먹는데도 잘 크지 않아 한약을 먹이기도 했다. 아직도 2년 전에 입던 겉옷을 그럭저럭 입고 있으나 좀체 잘 아프지 않으니 최근엔 편하게 ‘체질이려니…’한다.

 

 그런데 최근 부쩍 ‘크려나보다’하는 생각이 드는데 무얼 먹고 나도 돌아서면 배가 고프다고 아우성이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소미가 뱃속에 걸귀 들린 거지 하나 기르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을 정도로 소미의 식욕은 왕성해졌다. 3월 달에 학교 급식을 그렇게 기다리고 있었는데 3월 말쯤 시작된 급식은 아주 대만족인 눈치였다. 처음엔 밥 떠주시는 분들이 너무 많이 주시면 어쩌나 걱정했었는데, 집에서 먹는 것보다 많이 담아주셔도 너끈히 다 먹는다고 했다. 집에서는 흰 우유에 자주 코코아 가루를 타먹으려고 하지만, 1교시 끝나면 나눠주시는 흰 우유는 너무 고소하고 맛있다고 재잘재잘 말한다.

 

 며칠 전엔 소미가 돌아오는 시간에 내가 점심을 먹고 있었다. 분명히 밥을 먹고 바로 버스 타고 돌아왔을 것인데 또 밥상머리에 앉는 게 아닌가.

 “소미, 또 먹게?”

 “네. 조금만 먹을게요.”

 “학교에서 막 먹고 돌아오는 길 아냐?”

 “맞아요. 그래도 더 먹을 수 있어요.”

 그리고는 삼치조림에 김, 오이지무침에 뚝딱 아침밥 정도 양을 먹어치웠다. 그리고 하는 말.

 “엄마, 제가요. 하루에 밥을 네 번은 먹어야겠어요. 아침, 점심, 저녁 그리고… 점심하고 저녁 사이에 간식 말고 배부르게 먹는 밥요. 그걸 뭐라고 부를까. 점심하고 저녁 사이 먹는 밥을?”

 “새참.”

 “새참이 뭐예요?”

 “아, 농사일 하시는 어른들이 오후 일하시다가 출출하실 때 드시는 밥이야. 국수나 빵 뭐 간단한 다른 걸로 드시기도 하지.”

 “전요. 과자나 우유 같은 거나 하는 간식은 따로 먹을 거구요, 밥이나 밥만큼 되는 것으로 먹을래요. 아! 생각났다. 그걸 ‘햇살’이라고 할 거예요. 점심에서 저녁 사이 먹는 거. 알았죠 엄마? 이제 맨날 맨날 햇살 주세요.”

 

 그래서 난 요즘 오후 '햇살'에 신경을 쓴다. 과자나 과일은 당연히 먹는 거고 한탕 배불려주어야 할 것으로, 찐만두, 찐고구나, 찐감자, 메밀국수, 잔치국수, 주먹밥, 부침개, 떡, 샌드위치 같은 것들을 준비한다. 약호박이라고 하던가? 겉이 짙은 녹색이고 속이 노란 작은 호박. 소미는 그 찐호박을 가끔 찾는다.

 

 언젠가 한번은 앞집의 태곤이 엄마가 소미소은이 떡 먹는 것을 보며 유난히 감탄을 했다.

 “아니, 세상에! 생기기는 둘 다 예쁜 생크림 케이크 같은 것만 먹을 것 같은데 저렇게 인절미를 잘 먹다니… 내가 이상한 건가? 도저히 떡을 잘 먹게 생기지 않았는데… 완전히 편견을 깨는군.”

 사실 인절미뿐이 아니라, 송편, 백설기, 약식, 가래떡, 어머님이 쓱쓱 모양 따지지 않고 그다지 달지도 않게 만든 쑥개떡 같은 것도 아주 잘 먹는다. 케이크나 피자 같은 것보다는 떡이 두 아이에게 확실히 인기가 있다.

 

 자식이 잘 먹는 것을 보는 것처럼 배부른 일이 또 있을까. 내가 소미의 생활습관 중에 가장 이쁘게 최고로 쳐주는 부분이 무엇이든 골고루 먹는 식습관이다. 어릴 적 아이가 잘 안 먹어서 애를 태워본 엄마라면 오늘날 내 마음이 어떤지 잘 아시리라. 부엌일을 참 싫어하는 이 엄마의 음식솜씨가 세상에서 최고인 줄 아는 가엾은(?) 소미. 엄마가 공들여 만든 이유식을 제대로 먹어보지 못하고 자란 소미. 머지않아 그 환상이 깨지는 날이 올 것이 분명한데, 그래도 엄마 음식이 최고라며 맛있게 먹는 아이가 나를 분발하게 하고 행복하게 한다. 할머니들이 왜 돌이켜보면 그래도 어린 자식 기르던 그 시절(지금 내 시절)이 가장 좋았다고 회상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소미, 꽃병, 흑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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