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한 뼘 성장드라마
용돈의 법칙 본문
나는 아버지 혼자 일해서 받으시는 월급으로 사는 형제 많은 집안의 막내로 자랐다. 우리 큰언니는 내가 태어나던 해 시집을 갔으니, 육남매 중 한 입은 덜었다 해도 모두 일곱 식구가 아버지 벌이로 산 것이다. 학교에 가려고 서있는 언니나 나를 세워놓고 엄마가 아침에 돈을 꾸러 가실 정도로 부족하거나 빡빡한 생활이었으나, 나는 그래도 막내라 어려움 속에서도 형제들 중 돈 고충 크게 안 받고 자란 편이라고 한다.
술 좋아하시고 사람 좋아하시는 아버지와 눈만 뜨면 학교 가기 전에 맨날 손 벌리는 자식들을 사이에 두고, 어떻게 큰 빚 안 지고 오글오글한 자식 다 키우면서 그렇게 살 수 있었을까 지금 생각해도 엄마에 대한 불가사의함은 여전히 남는다. 그 시대에 부업이나 파트타임 아르바이트라는 것이 있을 리도 없고, 우리 집은 농촌에 살아도 농사를 안 지었기 때문에 엄마는 품앗이 일도 하실 줄 몰랐다.
엄마의 불가사의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 빡빡한 살림 안에서도 우리 아버지와 엄마는 생활 속에서 아주 멋을 많이 내신 분들이다. 나는 늦둥이여서(마흔 셋에 엄마가 날 나으셨다^^) 젊은 시절 부모님을 잘 기억하지 못하지만 언니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탄성이 절로 나올 때가 많다. 내가 초등학교 입학했을 때 엄마는 이미 쉰을 넘기셨으니, 막내여서 좋은 점도 많았지만 젊은 부모님의 활력과 열정, 취향과 멋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나는 그런 소리 들을 때면 은근히 억울한 기분이 든다.
그래서 그런지 모르지만 나는 어린시절 ‘가난’에 대한 기억으로 마냥 짠하고 불편하기보다 가난 속에서도 자주 불어왔던 풍요로운 바람을 더 많이 기억한다. 아버지, 큰오빠로 이어지는 ‘술에 대한 안 좋은 추억’을 빼고 나면, (지금도 넉넉하게 사는 형제는 없지만) 우리 식구는 돈이나 가난 때문에 다투고 갈등을 빚었던 경우는 지금까지 거의 없다. 아니, 어떤 날 하루는 언니랑 일부러 더듬어보기도 했는데 적어도 우리 기억엔 한번도 없다고 결론지었다.
내가 오늘 왜 이렇게 서설이 긴지 모르겠다. 나의 돈 관리 이야기부터 시작하려고 했는데, 삼천포로 빠진 이야기가 너무 길었다. 암튼 나는 그런 가정환경에서 자랐고 지금은 내가 집안의 안주인으로 살림을 한다.
그런데 내 경제관념은 그다지 신통하지 않다. 크게 사고치는 일은 없지만 별로 규모 있게 돈을 쓸 줄도 모르고 치밀하게 관리도 못한다. 가계부는 한번도 써본 적이 없고 카드 값도 계산 잘 안 하고 쓴다. 수입 대비 저축 뚝 떼어놓고 나머지 가지고 그 안에서 알뜰살뜰 사는 집도 많은데 나는 그럴 줄을 모른다. 꼼꼼하고 치밀한 남편이 가정경제의 큰 틀을 잡고(뭐 대단한 경제규모도 아니지만) 있으니 믿거라 하고 나는 부처님 손바닥만 안 벗어나고 탱자탱자 살면 된다 하는 것도 있다. 사실 이게 편하다. 그런데 남편은 내게 늘 그게 불만이다. 원래 나 같은 사람이 이상형이 아니라 드라마 <장밋빛 인생>의 맹순이가 자기 이상형이라고 낄낄대면서 불만을 우회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문제는 내가 아니라 이런 내가 키우는 우리 딸들이다. 딸들이 나처럼 돈을 쓰고 대강 산다 생각하면 슬슬 두려워지는데 사실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딸들 앞에서 괜시리 짠순이 엄마처럼 구는 것, 그게 현재 내가 하고 있는 경제교육의 전부다. 요즘은 펀드니 주식이니 아이들에게 어려서부터 이런 데 투자하는 법도 가르치는 사람도 있다지만 좀 징그럽다. 살아갈수록 점점 돈을 무시할 수 없고 돈을 좋아하게 되지만, 어린시절 아이들이 배우고 체화해야 할 여러 가치들 중 내 경우는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경제교육은 중요도에서 좀 밀린다. 무엇보다 내가 그런 것에 관심이 없고 무식한데 어찌 가르치겠나. 다만 생활속에서 용돈 관리 하는 법, 저축하는 습관 정도는 길러주려고 한다.
3월 어느 날, 하루는 장을 보고 돌아왔는데 집안이 다 훤하다. 반들반들 윤이 나고 빛이 났다. 웬일인가 싶어서 물으니 내가 장보러 나갔을 때부터 돌아올 때까지 솜손은 내내 집안 청소를 했고 조금 전에 다 마쳤다는 것이다. 그런데 청소가 평소와 차원이 완전히 달랐다. 대강 자기들이 쓴 물건 정리하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집안 전체 구석구석 청소기를 다 돌리고, 방바닥부터 텔레비전이며 오디오와 컴퓨터 주변, 책꽂이 주변 등의 먼지를 다 닦았다. 부엌에 갔더니 물 속에 있던 몇 개의 그릇 설거지를 하고 싱크대 주변 물기 말끔히 닦고 행주를 짜서 펼쳐놓기도 했다.
난 완전히 감동이었다. 딸을 기르면 이런 재미가 쏠쏠한데 그날은 그런 즐거움의 최대치를 보여주었다. 느즈막하게 장보러 가서 집에 돌아와 장본 것 정리하고 집안 치우고 설거지하고 저녁 준비 할 생각에 좀 아마득했는데, 솜손의 이런 뜻밖의 선물에 나는 기절할 듯 좋았고 너무 기특하고 고맙고 예뻤다. 마침 남편이 전화를 해 와서 다시 한번 전화에다가 크게 칭찬했는데 그는 뜻밖의 부탁을 했다.
“돈 좀 줘.”
“응?”
“애들 돈 좀 주라고. 아빠가 주는 거라고 하면서 수고했다고 돈 만 원씩 줘.”
“돈을…?!”
“응. 애들한테 동기부여하기 좋은 때야. 그런 거 필요해. 이 돈은 저금통에 넣지 말고 사먹고 싶거나 사고 싶은 것 사는데 맘껏 쓰라고 줘. 아빠가 주는 거라고.”
“알았어. 근데 그건 너무 큰 돈이다. 애들이 쓰라고 해도 잘 못 쓸 거야. 내가 알아서 줄게.”
히히, 그리고 나는 천 원씩 줬다. 남편이 나중에 알고 고게 뭐냐고 핀잔을 주었지만, 나는 처음부터 너무 큰돈에 맞들이면 곤란하다고 아직 그만큼이 적당하다고 강변했다. (난 아직도 짠순이인 척은 해야 한다. 그것밖에 할 게 없다니깐~) 그런데도 아이들은 완전히 로또복권 맞은 얼굴이었다. 집안 어른이나 손님들이 돈을 가끔씩 쥐어주셔도 맨날 저금통이나 아프리카 어린이 돕기 저금통에 넣기만 했는데, 비록 천 원 한도이긴 하지만 처음으로 돈이란 걸 맘대로 쓰라고 했으니 그 기쁨과 설렘에 들떠 겅중겅중 뛰었다. 그렇다니까… 우리 애들은 아직 10%만 써도 효과는 200%다. 귀여운 것들!
그렇게 해서 우리 솜손의 용돈시대가 활짝 열렸다. 일단 정기적인 용돈지급은 아직 무리라(소은이가 아직 어리지만 소미만 주면 또 난리일 것이다) 일단 내가 판단했을 때 잘한 일에 상으로 주는 돈은 용돈으로 쓴다고 정했다. 쓰는 내역엔 간섭을 안 하겠지만 용돈기입장만큼은 꼭 쓰라고 했다. 그래야 돈 없어지는 일이 허무하지 않고 반성하고 관리가 된다고 했다. 그리고 용돈기입장 쓰기가 잘 되면 내년부터는 다달이 정기적인 용돈을 주겠다고 했다. 아이들은 흔쾌히 받아들였고 소은이는 쓰기 어려우면 엄마한테 쓴 내역만 말해주면 내가 대신 써주겠다고 했다.
그 이후 나는 용돈을 벌 수 있는 집안일을 지정하기 시작했는데, 너무나 잘 된 게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평소 내가 귀찮아서 하기 싫은 일을 아이들에게 맡기게 됨으로써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 벌어졌다.
* 집안 청소 1,000원
* 재활용 쓰레기 분리하여 버리기 500원
* 음식물 쓰레기 버리기 1,000원 (이건 더럽고 냄새나니까 따블!)
* 세탁기에서 깨끗하게 안 빨리는 꼬질한 자기 양말 손으로 빨기 (한 켤레당) 500원
(나 이거 너무 하기 싫은데 진짜 잘 되었다. 일주일만 빨아봐. 3500원이야.)
그밖에 그때그때 나를 만족시키는 일이 있으면 선심 쓰듯 보너스로 200원 내지 300원을 준다. 이거 참 쏠쏠하게 벌이가 된다. 등을 시원하게 아주 만족스럽게 잘 긁어주었을 때 200원, 쇼핑할 때 끝까지 카트 잘 밀어주면 300원 뭐 이런 식이다. 아무래도 정기적인 용돈지급 이야기는 괜히 한 것 같다. 계속 벌어 쓰라고 할 걸. ㅎㅎㅎ 아, 그리고 또 몇 가지 기준이 남았다.
* 집안 어른이나 손님들이 주시는 돈이 5,000원을 넘을 때는 저금통에 넣는다.
* 누가 주시는 돈이든 천원이 넘을 때는 10%를 아프리카 어린이에게 기부한다.
* 1,000원 이하의 학교준비물은 용돈으로 한다.
그리고 우리 셋은 즐겁고 편안해졌다. 나는 귀찮은 일 안 해서 좋았다. 양말 빨기 뿐만 아니라 맨날 아바타 사고 싶다, 쫀디기 사 달라 졸라댈 때마다 지갑 열기 귀찮았는데 그런 일이 없어지니 갈등도 없고 너무 좋다. 전에 다니던 작은 학교 앞과 달리 여긴 문방구도 많고 유혹하는 물건도 많다. 특히 여자아이들이 좋아하는 자잘한 물건이 어찌 그렇게 많은지 모른다. 돈을 다 써서라도 확 사든지 아니면 요모조모 따져 욕망을 잠재우든지 이제부터 알아서 할 일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현상이 생겼다. 두 아이 모두 돈이 줄어드는 일에 불안감을 느꼈다. 또 돈이 좀 있다 싶으면 좀 느슨해지는 품이 역력했다. 요즘 한 며칠 양말 안 빤다. 한편 돈이 6천원이 넘어가니까 좋아할 줄 알았는데 소은이는 그게 너무 많아서 부담된다고 뚝 떼서 2천원을 기부했다. 그런데 며칠 후 갑자기 사고 싶은 물건이 생겼는데 그게 또 좀 비싸다. 그래서 어제 다시 양말을 두 켤레나 빨았다. 그런데 내가 잔돈이 부족했다. 나는 코맹맹이 소리로 애들한테 애교를 부렸다.
“얘들아, 오늘 양말 빤 거 100원씩만 깎아주라. 만 원짜리하고 1,600밖에 없넹~ 800원씩만 받으면 안 되까?~”
“그래요 엄마. 우리도 나중에 계산하는 거 복잡해. 그냥 용돈기입장에 800원 써야지 나중엔 또 잊어버려요. 더 골치 아파.”
흐흐. 귀여운 것들. 부자까지는 아니라도 아빠 엄마보다는 넉넉하게 살기 바란다. ***
* 1학년 손손의 용돈기입장. 솜솜은 큼직한 어른용 장지갑에 용돈 조금과
용돈기입장을 함께 가지고 다녀서 낮에 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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