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한 뼘 성장드라마
꿈 안 꿀래요! 본문
"엄마 나 꿈 안 꿀래요!"
밤마다 방에서 잠옷을 갈아입고 내 앞에 오도카니 서서 하는 소미의 말이다.
요즘은 거의 이 말을 빠뜨리지 않고 한다. 거기에 내 반응도 늘 같았다. 처음엔
"왜?"하고 물었더니 무서운 꿈을 꾼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턴 그냥
'그게 어디 네 맘대로 되는 것이냐'하는 양으로 씩 웃으며 "그래, 꿈꾸지 말고
잘 자" 하고 말았다.
그런데 일요일 낮에 제 아빠랑 낮잠을 자려고 하면서 또 "아빠, 저 꿈 안 꿀
거예요" 이러는 것이었다. 제 아빠는 '왜?'부터 시작해서 어떤 꿈들을 꾸는데
그렇게 무서운 것이냐고 물었다. 다음은 제 아빠한테 쏟아놓은 소미의 꿈 이야기다.
"엄마를 잃어버렸어요. 막 울었어요. 그리고 박쥐를 봤어요. 또 괴물도 봤는데
괴물이 제 얼굴을 뜯어먹었어요. 한번은 불이 나서 얼굴이 다 탔어요. 바람에
날라 가서 몸이 하늘에서 막 떠다녔어요. 머리가 흙투성이가 됐어요. 사냥꾼이
총으로 쏴서 죽었어요."
아이가 자라면서 꿀 법한 꿈에서부터 엽기적인 내용까지 총망라한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남편은 폭소를 터뜨리고, 급기야 나더러 잊기 전에 받아 적으라고
성화였다. 소미가 제 아빠 앞에서 눈을 동그랗고 뜨고 손짓발짓하며 실감나는
표정 연기까지 하는 바람에 나도 낄낄대며 메모했다.
그런 끔찍한 꿈들을 자주 꾸어대니 잠드는 일이 무섭겠구나, 그러니 날마다
꿈을 안 꾸겠다고 맹세까지 하고 자는구나 하는 생각에 소미를 많이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들도 좀 그런 꿈을 많이 꾸었는가. 그러나 그렇다고 내게 꿈을
안 꿀 수 있는 뾰족한 묘안이 있는 것도 아닌 터라 그냥 무난한 대답으로
일관한다.
"옛날부터 어른들이 그러시는데 어린이들이 그런 무서운 꿈을 꾸는 건 몸과
마음이 쑥쑥 자라느라 그러는 거래. 엄마도 어릴 때 이런 꿈 많이 꾸었거든.
그래서 이렇게 어른이 된 건가봐."
왜 무서운 꿈만 꾸는 거냐고 물어왔지만 내 대답은 성의 없고 옹색할 뿐
창의성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건 엄마도 잘 모르겠어. 잠든 동안에라도 깜짝 놀라면 몸이 펄쩍 놀라서
좀 늘어나는 건가?"
프로이드는 꿈이 무의식으로 통하는 길이라고 했다던가. 5세∼7세쯤 이 되어서
부터 꿈의 재료가 꿈속에서 왜곡이 일어난다더니 프로이드가 말한 시기가
도래한 것일까. 흠, 정신분석학자도 아니고 어린 딸의 잡다한 꿈을 해석할
능력은 없지만, 꿈이 현실이 아닌 꿈인 줄 알고 생생하게 기억해서 이야기할
줄 알 정도로 큰 것이 흥미롭다.
소미는 아직도 올해가 다 가려면 멀었는데 여섯 살이 되길 손꼽아 기다린다.
사계절을 뚜렷하게 구별하고 요일에 대한 인식도 제법 섰고 분 단위까지는
아니지만 시간 단위로 얼추 시계를 볼 줄 안다. 혀가 입천장에 닿으면 'ㄹ'발음이,
혀를 아래 윗니가 물고 다물어지면 'ㄴ'발음이 나는 것도 알면서 서툴게 어찌어찌
글자와 소리의 원리를 알아 가는 듯하다.
요즘은 정말 소은이보다도 소미가 하루하루 커 가는 게 눈에 보인다. 특별히
가리는 반찬 없이 골고루 밥도 잘 먹어서 그게 제일 이쁘다. 어젠 호박 볶음이
너무 맛있다고 밥 위에 척척 걸쳐서 뚝딱 두 그릇을 비웠다. 간식으로 국수나
자장면을 먹으면 김치부터 찾는다.
이제 소미가 돌아올 시간이 다 되었다. 누가 새로 들어왔고 누가 무슨 말을
하고 밥은 누가 빨리 먹었고 선생님은 무슨 말을 하셨고 등등 또 미술학원에서
지낸 이야기로 조잘조잘 몇 분은 정신없을 터라 이만 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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