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한 뼘 성장드라마
12주 된 태아에게 본문
아가야! 여기 드나드시는 손님들께서 깜짝 놀라시겠다. '소미 엄마가 더 이상 아이를 갖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하더니만 드디어 일을 낸 게로군'하고 말이야. 후후! 잠깐 동안의 오해라도 나는 즐겁구나. 네가 있다는 것이 마냥 즐겁구나. 너희 엄마가 어제 내게 전화를 했더구나.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아무 것도 묻지 말고 이천으로 나와 달라는 거야. 그것도 다 저녁에 찬바람 슬슬 부는데 나가는 일이 그리 즐겁진 않았지. 그러나 네 엄마의 목소리에 심상찮은 기운을 느껴 아줌마의 두 딸을(아직 너에게 언니가 될지 누나가 될지 우리들은 알 수 없지만) 이웃집에 맡겨두고 나갔던 거지. 그래, 거기 한 산부인과 주차장에서 너의 존재를 알게 되었단다. 그러나 네 엄마는 말을 제대로 잇지도 못하고 펑펑 울기만 하더라. 네가 12주씩이나 자라 있었던 것을 알지 못한 미안함, 그 동안 엄마의 엄청난 스트레스와 적지 않은 음주에 대한 죄책감과 불안감, 계속된 감기 몸살을 앓으면서도 이상하게 약은 먹고 싶지 않았던 일, 내내 임신 자가테스트를 하며 살다가 잠깐 방심한 일, 자기 신체의 변화를 예민하게 눈치채지 못했던 한심스러움, 그러다가 어제 아침 몸살 감기 때문에 맞은 한 대의 주사까지. 너희 엄마는 아주 딱 죽고 싶은 심정인 것처럼 가슴이 아프고 미어지는 심정을 주체하지 못하더구나. 초음파에서 쑥 커서 모습을 드러낸 너를 보고 어지럼증이 났다고 말하며 "어떡해! 어떡해!"만 연발하면서 우는데, 내가 가슴이 다 아프고 눈시울이 뜨거워져 말을 못했었지.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못하는 그 심정을 이 아줌마는 잘 안단다. 왜냐면 아줌마도 큰딸 소미를 가진 줄 모르고 세 군데서 처방한 약을 닷새씩이나 먹었었거든. 임신의 기쁨도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크나큰 불안과 막심한 후회가 밀려오는데 거의 미치는 심정이 되더구나. 그러나 아가야. 난 감사한단다. 차안에서 "난 아기 낳고 싶다"라고 말했던 네 엄마의 선택이 감동적이었어. 왜냐면 내가 보기에 네 엄마는 자기 일에 대해서 한참 커리어를 쌓는 중이었고, 아기를 갖게 되면 여러 가지 힘든 일이 불을 보듯 뻔한 일이라 아직 가질 시기가 아닌데 아기가 생겼다고 동동거릴 줄 알았거든. 우리 나라는 아직 일을 가진 여성이 마음놓고 아기 낳고 마음놓고 어딘가에 맡기는 일에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거든. 그리고 꼬맹이 너희들 키우는 일에 돈도 많이 들고…키키! 너도 크면 알 거야. 네 엄마는 널 기다리고 있었지만 네 존재를 늦게 알게 된 것에 대해 너무 미안해하고 있단다. 3개월 동안 태교도 못하고, 싸움만 하고, 스트레스 받고 살았다고. 사실 너에게만 이야기하는데 근래에 네 아빠와 엄마가 사이가 안 좋은 날이 많았단다. 난 사정을 좀 알거든. 하지만 아가야, 남자와 여자는 아무리 사랑해서 결혼했어도 다른 환경에서 오래 자라온 이상, 서로의 관계나 처지를 조율하는데는 적지 않은 시간과 어려움이 따른단다. 그래서 싸우고 큰소리 내고 그러는 거야. 네가 혹시 배 안에서 네 존재도 알아주지 못하고 아빠, 엄마가 큰소리로 싸우는 소리를 들었으면 어른들 세계에 그런 통과의례가 있음을 너그럽게 이해하렴. 그리고 네 엄마가 네 존재를 잘 눈치채지 못한 까닭에 대해서도 설명할게. 이거 너희 엄마가 부끄러울까봐 이야기 안 하려고 했다만 말 안 하면 네가 혹시 '우리 엄만 왜 이리 미련했을까? 왜 그리 둔할까?' 하고 생각할까봐 말하련다. 네 엄만 심한 생리불순 때문에 늘 걱정이 많았지. 그래서 늘 임신인지 아닌지 불안해했고, 늘 막대기 같이 생긴 임신진단시약을 사다가 놓았단다. 자주 체크했지. 그러던 중 여름을 보내면서 엄마의 일에 큰 변화가 생겨 정신없는 날을 보냈단다. 그건 내가 옆에서 봐서 잘 알아. 밤도 많이 새며 일하고, 한데서도 자기도 하고, 끼니도 제대로 못 챙기고, 많이 돌아다니고,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 일에 정신적 부담도 컸지. 그러니 몸살 감기가 네가 생기느라 그런 것인 줄 꿈에도 모르고 자기가 몸을 혹사해서 그런 것이려니 했던 거야. 알겠니? '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형편이었다' 아줌마는 이 말을 하려고 싶은 거란다. 드라마 같은데서 '욱!'하고 헛구역질이 나서 병원에 가면 "3개월입니다"라고 말하길 잘하거든. 그때마다 아줌마는 막 비웃었단다. "아휴! 저런 미련한 여자가 있냐? 3개월이 되도록 모를 수도 있나? 말도 안돼!" 이랬었는데 네 엄마가 딱 드라마 속 그 여자구나. 그러나 배가 아파서 내과에 진찰 받으러 갔다가 그 자리에서 출산한 '괴상한' 아줌마 이야기도 텔레비전에서 본 적이 있으니 네 엄마는 그 정도면 양호하지 않니? 네 아빠는 창졸간에 맞닥뜨린 일이라 얼떨떨한 것처럼 보이는데 아주 신기하고 즐거운 얼굴이야. 이제 할머니들께도 알리고 주변 사람에게도 알리고 있단다. 그런데 가장 놀란 사람이 누군지 아니? 너희 집 위층에 사는 전혜영이란 아줌마다. 이 아줌마는 친정집에 갔다가 우리들의 전화를 받고는 기절을 하려고 하더라. 도무지 믿지를 못하고 장난하는 것인 줄 아는 거야. 그도 그럴 것이 전혜영 아줌마는 지금 둘째 아이 임신 만 4개월을 넘어서고 있거든. 네 엄마와 자기의 출산예정일과 불과 한달 남짓 밖에 차이가 나지 않으니 어찌 놀라지 않겠니? 그런 것도 모르고 주변의 우리들은 전혜영 아줌마가 먹고 싶은 것만 챙겨주었지. 심지어 네 엄마는 며칠 전 전혜영 아줌마랑 같이 이천시내에 외출했다가 "혜영 언니가 허리 아프고 힘들어해서 선재(혜영 아줌마 아들인데 몸무게가 14kg이란다)를 안고 다녔다"고 했으니 얼마나 기가 막히겠니? 네 엄마는 이 이야기를 하면서 펑펑 울더라. 선재를 안고서 혜영 아줌마 임신복 사는데 이것저것 골라주고 이랬으니…. 아가야. 덕분에 오늘 우리 식구는 네 아빠가 사준 저녁을 잘 먹었단다. 그리고 네 엄마는 아빠와 다정하게 태교음반을 사고 임신과 육아에 대한 책을 고르는 걸 봤지. 내가 어찌나 보기 좋던지. 엄마가 빠르게 안정을 찾아가는 것 같아서 말야. 이제 너도 뭐 먹고 싶은 것 있으면 맘놓고 적극적으로 엄마를 통해 알려줘. 아줌마가 해줄 수 있는 건 다 해줄게. 빨리 말해야 해. 아쉽지만 우리 머지 않아 곧 이사가거든. 아가야. 그리고 끝으로 하나만 더! 난 네 엄마와 아빠를 참 좋아한단다. 너도 아주 좋아하게 될 거야. 이담에 태어나서 만나면 "아줌마, 안녕!"해야 한다, 알았지? 근데 이제 소미, 소은이가 네 엄마, 아빠에게 찬밥이 되겠구나. 참 예뻐했거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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