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한 뼘 성장드라마
정말 힘든 하루 본문
오후 2시 20분.
남편과 채 전화통화가 끝나기 전, 현관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잠깐만…, 소은이가 왔나보네.”
그런데 문이 열리고 ‘엄마!’ 소리가 기어들듯 나는가 싶더니 소은이가 집안으로 한 발을 들여놓자마자 ‘으아아앙~~’하면서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서 이유를 물을 새 없이 한 손에는 전화기를 한 팔로는 아이를 품에 안았다. 등에는 가방을 메고 손에는 실내화 가방을 그대로 든 채 신발도 벗지 않고 고스란히 내 품에 안겨서 크게 울었다. 무슨 일이냐 물으니 소은이는 불분명한 발음으로 “오늘 반장선거 했는데 떨어졌어” 이러면서 더 크게 울었다.
나는 사건의 진상을 알아차리고 남편에게 “소은이가 반장선거에서 떨어졌다고 오자마자 울어. 위로가 필요해. 이따가 전화할게”하고 말했다. 남편은 분위기 파악 못하고 “그래?”그러면서 낄낄거리더니 끊었다.
근데 사실 나도 속으로 너무 웃겼다. 1학년 2학기 때 반장 투표에도 참여하고 반장이 어떤 일을 하는지 봤으면서 반장은 뭐하는 사람이냐, 반장 별로 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반장 말 잘 안 듣는 애들 많다, 속만 상한다, 뭐 이러면서 은근히 반장이라는 자리와 거리두기를 하는가 싶었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던 거다. 속으로는 엄청 한번 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깜찍한 것! ㅎㅎ
나는 한참을 꼭 안아주고 등을 토닥이며 맘껏 울기를 기다렸다가 가방만 모두 내려주고 그대로 들어 안아서(아이구야~ 27킬로다) 방으로 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소은이가 2학년이 되어서는 반장 한번 해보고 싶었구나.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구나. 그런데 친구들이 아직 우리 소은이의 진가를 모르는 것 같다. 아직 낯선 친구들이 더 많아서. 우리 소은이는 그 진면목이 서서히 나타나는 아인데. 안타깝게 아직 친구들이 모르는구나. 에구구~”
나는 계속 안고 등을 토닥여주고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그러자 소은이는 서럽고 속이 상해서 더 펑펑 울었다. 학교에서부터 참았던 울음이 틀림없었다.
“엉엉엉~ 언니는 세 번이나 반장을 해봤는데, 엉엉~ 나는 왜 이렇게 안 되는 거야. 엉엉~”
언니가 반장을 했던 것이 못내 부러웠던 거다.
“1학년 때는 안 해도 괜찮았지만, 난 어제도 친구한테 연필도 두 번이나 빌려주고 친절하게 했는데…으아~앙~”
울면서도 할 말은 다하는 게 우리 소은이 특기. 그래도 나름대로 친구들과 좋은 관계를 가지려고 노력했다는 말인데, 나는 하는 말마다 웃겨서 죽는 줄 알았다. 상황이야 어찌 되었든 난 귀엽기만 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아픈 난관을 극복하는 딸을 위해 위로의 말을 건네지는 못할망정, 채신머리없게 툭 웃음이 터져 나오면 어쩌나 싶어 간신히 참아가며 들었다.
“그랬구나. 1학년 때 선생님도 지난 가을에 소은이가 2학기 들어서서부터는 친구들과 한결 사이좋게 지내고 양보도 잘하고 친구도 잘 돕는다고 그러셨는데. 우리 소은이 정말 그동안 노력 많이 한 게 분명한데 참 아쉽다.”
울음이 조금 진정 국면으로 접어들면서 소은이는 선거과정과 득표상황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후보는 모두 6명이라고 했다. 소은이, 혜경이, 태욱이, 수빈이, 정환이, 또 한 명. 후보 추천을 받은 사람은 다른 두 사람의 재청만 받으면 후보자가 되었는데, 소은이는 혜경이(1학년 때도 같은 반 친구로 2학기 말에 급속도로 친해졌다)의 추천과 다른 두 친구의 재청으로 후보가 되었단다. 그래서 내가 물었다.
“그럼 혜경이는 소은이가 추천하고?”
“네.”
(흐흐, 여기서 한번 속으로 웃어주고)
그래서 여섯 명의 아이가 경합을 벌여 그 중에서 태욱이가 10표, 수빈이가 9표, 소은이와 혜경이가 각각 5표…… 뭐 이렇게 된 모양이다. 그래서 태욱이가 반장이 되고 수빈이가 부반장이 되었단다. 그런데 이야기 끝에 또 “반장이 아니라면… 부반장이라도 좋았는데… 으아앙~~” 이러면서 아쉬운 마음을 어쩔 줄 몰라 하며 또 울었다.
한참을 또 울더니 소은이는 그때부터 이상한 내용을 우기기 시작했다. 자꾸 자기는 반장선거에서 ‘아깝게 떨어졌다’는 것이다. 반장과 무려 다섯 표차다. 흐아~ 저 결과가 어째서 아까운 것이란 말인가. 우리나라 사천만 국민이 소은이네 반장선거에서 투표를 한 것도 아니고, 고작 35명 안팎의 또래 유권자가 있을 뿐인데.
나는 잠자코 듣고는 있었지만 참말로 이건 아니지 싶었다. 그러나 저 속상한 가슴에 엄마가 돼 가지고 청양고춧가루를 뿌릴 수야 없지 않겠나. "그래, 참 아깝다 그치?" 이러면서 눈물도 닦아주고 맞장구도 쳐줄 수밖에.^^
“소은아, 소은이는 이제 2학년이야. 두 번 선거 해봤지? 아직도 기회는 많아. 1학기 때 열심히 즐겁게 사이좋게 학교생활 잘하면 돌아오는 2학기 때라도 기회가 올 거야. 우리 소은이는 책임감이 강해서 뽑아주면 참 잘할 텐데 말야. 엄만 그게 참 아깝다.”
“아빠가 나 반장에서 떨어졌다고 해도 실망 안할까?”
“왜 실망을 해? 엄마는 소은이가 반장 후보가 되었다는 사실도 기쁘고 놀라운데. 아빠도 그러실 거야.”
“엄만 정말 속 안 상해요?”
“안상해. 소은이가 속상해 하니까 그게 속상한 거지, 반장 떨어져서 속상한 마음은 손톱만큼도 없어. 진짜야.”
“손톱에 때 만큼두?”
(큭, 표현하고는…)
“그럼! 손톱의 때만큼도. 잡곡밥의 좁쌀만큼도. 바닷가의 모래알만큼도.”
그제야 표정이 조금 풀린다.
“근데 소은이 반장 후보 되었을 때 그것도 했어? ‘내가 반장이 되면 이렇게 하겠습니다’하는 후보자 연설 비슷한 거.”
“했어요.”
“뭐라 그랬어?”
“예절바른 우리 반 친구들이 되게 돕는 반장이 되겠다구….”
“우와~ 정말? 멋진데. 진짜 멋지다.”
소은이는 그때쯤 눈가는 여전히 젖어 있었지만 마음은 좀 진정이 된 듯했다. 나는 무릎을 털고 일어나며 말했다.
“에구, 우리 소은이 간식 줘야지. 많이 울어서 배고프겠다.”
“배고파요. 점심도 잘 못 먹었어.”
“왜?”
“속상해서.”
“그으래? 반장 선거를 언제 했는데?”
“둘째 시간에.”
“그럼, 그때부터 속상한 거 참으면서 두 시간 공부 더하고, 점심 먹고, 추운데 걸어서 집에까지 오도록 눈물을 참은 거야?”
“네. 세 번씩이나 울고 싶었지만 꾹 참았어요. 학교에선 울고 싶지 않고 집에 가서 울어야지 하니까 집에 빨리 오고 싶었어.”
“아이고 세상에. 우리 딸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러니 급식시간에 입맛이 당연히 없었겠지. 대단하다. 나 같으면 그만큼 속상하면 아마 펑펑 학교에서 울었을 거야.”
“정환이는 다 끝나고 막 울었어요.”
(흐흐, 패배의 쓴잔으로 눈물을 흘린 친구가 또 있었군.)
나는 어제 먹다 남아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차가운 김밥을 꺼내 달걀물을 씌워 팬에 살짝 지졌다. 그리고 접시에 담은 후 김밥 하나하나 위에 ‘뽀나스’로 케찹을 조금씩 똑, 똑, 짜 올렸다.
“소은아, 손 씻고 있는 거지? 빨리 나와서 이 특별한 김밥 좀 먹어봐. 기분이 당장 좋아질 걸.”
욕실에 들어간 아이가 소식이 없어 부르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똘똘한 목소리로 한다는 말. 나는 급기야 폭소했다.
“엄마, 나 오늘 정말 힘들었어요. 반장 떨어져서 힘들었죠, 추운데 걸어오느라 힘들었죠, 또 오줌은 얼마나 마려웠는데요. 아우~ 나 정말 힘들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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