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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학교

운동화

M.미카엘라 2007. 10. 10. 17:40

 

 

 

 

이 운동화는 작은 딸 소은이의 운동화입니다.

지난 해 가을, 초등학교 입학 후 설레는 첫 운동회를 하루 앞두고

학교에서 신발주머니를 통째로 잃어버려서 부랴부랴 산 운동화입니다.

 

그리고 지난 10월 1일.

아빠의 휴무일인 국군의 날에 열린 두 번째 운동회에서도

이 운동화를 신고 달리기를 했습니다.

딱 1년 신은 운동화입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1년 365일 내내 신은 것은 아닙니다.

작년에 그 잃어버렸던 초록색 운동화는 다행히 운동회 끝나고 곧 찾았습니다.

그러니까 두 운동화를 번갈아 신은 셈이고

여름엔 샌들도 신고 슬리퍼도 신고

겨울엔 부츠도 신고 했으니 이 운동화만 작심하고 혹사한 건 아닙니다.

그런데 글쎄 1년만에 운동화가 이 모양입니다.

 

이 쬐끄만 2학년짜리 여자아이는 1년 동안 얼마나 분주했던 것일까요.

아무리 밑창이 얇은 디자인이라지만

운동화를 한 켤레 가지고 신었던 큰 아이 소미는 이런 적이 없습니다.

저도 저런 디자인의 운동화를 만 3년째 신고 있지만 저렇지 않습니다.

 

엊그제는 제 친구와 저희 네 식구가 만나 저녁을 먹었습니다.

우리 소은이를 익히 잘 아는 그 친구가 하는 말.

“소미는 커서 어떤 어른이 될 지 예측 가능한데 소은이는 영 모르겠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헐렁한 힙합 바지나 통바지만 죽어라 고집하고 일주일 동안 그 바지만 입습니다.

둘이 같이 입으라고 티셔츠 사주었더니 내내 학교 갈 때 자기 혼자만 입어놓고

막상 제 언니가 처음으로 일찍 일어나 먼저 입었더니,

“자기는 딱 한번밖에 못 입었다”고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며

월요일 아침부터 집이 떠나갈 듯 울어서 제가 ‘한 딱까리’ 했습니다. ㅎㅎ 

 

저는 모르겠습니다.

어떤 어른으로 자랄지 모르겠습니다.

 

준비성이 너무 철저해서 월요일 준비물을 금요일 저녁부터 챙기고

일주일 전부터 운동회 날 어디서 자리 잡고 밥 먹을 것인지 미리 정하라고 닦달을 하고,

운동회 3일 전부터 생수병에 얼음물 얼리라고 성화를 부려

급기야 소미가 꽥 싫은 소리를 했습니다.

“박소은, 넌 그렇게 엄마를 괴롭히고 싶냐? 어련히 알아서 해주실까봐… 밥 못 먹을까봐 그래? 넌 암튼…”

그런데 곧 비가 올 듯 꾸물거리고 너무나 선선한 날씨에,

결국 그 얼음물 슬그머니 다시 냉장고에 넣어두고 학교에 갔다…는 전설이 저희 집에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그녀가 의외로 소심하고 내성적인 것이 아이러니입니다.

운동회하는 날은 아침마다 헛구역질을 합니다.

흥분하고 설레고 긴장되면 그녀는 종종 잘 그럽니다.

소미와 제가 그랬죠.

“어디 올림픽 나가냐?”

 

극장에서 영화를 못 봅니다.

주인공이 시련에 직면하고 갈등하고 괴로워하다가

결국 문제를 극복하고 감동적인 대미를 장식하는

일련의 과정을 제대로 눈 뜨고 못 봅니다.

 

특히 영화 <마음이>를 볼 땐 더 심했습니다.

감정이입이 너무 잘 되는 탓인지

주인공이 심각한 상황을 겪는 걸 울면서 괴로워하며 보다가

급기야 들어왔던 극장문으로 다시 나와 혼자 놀기도 하고

가끔 흘끔흘끔 문틈 사이로 훔쳐보기만 하다가 나온 때도 있습니다.

 

저는 모르겠습니다.

한 가지로 정리가 안 되는 딸이 이 작은 딸입니다.

 

씩씩하고 강한 것 같아도 어느 때는 너무 약하고 겁 많고

무척 고집 세게 구는데도 어느 순간 포기가 빠르기도 합니다.

집요하기가 더할 수 없어 온 식구의 진을 빼다가도

선선하게 말을 잘 들어 어리둥절하게도 만듭니다.

악을 쓰고 눈이 퉁퉁 붓도록 울다가도

돌아서서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속없이 헤헤거리고

야단을 맞고 울면서도 제 할 말은 다 하는데

나중에 보면 자기는 혼자 침대에서 울었다는 둥 하면서

다 풀지 못한 속상한 심정을 일기에 담기도 합니다.

 

운동화가 헐었습니다.

종종거리며 어딜 그렇게 다니며 노는지

도무지 집에 붙어있질 않습니다.

학교에 갔다 와선 가방 내던지고 나갔다가

해질녘에 들어오기도 합니다.

 

‘빡센’ 주인을 만난 운동화가 참으로 고되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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