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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울타리

유치원 입학식에서 퍼 올린 생각들

M.미카엘라 2002. 3. 8. 08:35

3. 6. 수요일

 

소미가 유치원에 입학했다. 대부분의 유치원이 오늘 입학식을 한 것 같은데 날씨가 봄을 시샘하느라 쌀쌀하다 못해 여긴 눈이 왔다. 겨울잠 자는 아기 곰들 마냥 이사온 이후 밤늦게 잠들어 다음날 오전을 온통 푹푹 잠으로 메운 두 딸들을 채비하여 움직이는 일이 어젯밤부터 스트레스가 되었다.

그런데 의외로 소미는 깨우지도 않았는데도 의젓하게 일어나서 "엄마, 벌써 여덟 시가 넘었어요"한다. 아직 분침까지는 아니지만 시침만으로도 대강 시간을 감 잡는데 일어나서 시계부터 본 모양이었다. 문제는 소은인데 여러 차례 엉덩이를 팡팡 두드려 깨워 겨우 쉬만 뉘어서 차에 태우고 구불구불한 재를 하나 넘어 늦지 않게 도착했다.

소미에겐 새 유치원에 지원군이 하나 있다. 지난번에 살던 아파트에서 미술학원을 같이 다닌 친구 연찬이다. 아빠의 근무지 따라 여기로 이사를 오면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연찬이 엄마와는 안면이 거의 없지만 아이들을 통하다보니 그냥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처럼 서로 반가운 마음만 들었다.

두 아이가 같은 유치원엘 입학하게 되니 앞으로 시간이 좀 지나면 비록 같은 문으로 들어가 따로따로 놀게 될지언정, 처음엔 서로 꽤 의지가 되겠다싶어 마음이 한결 푸근해졌다. 아무 데나 앉아도 되는 걸 기어코 소미 옆을 찾아 앉는 연찬이를 보고 정말 그렇구나 했다.

소미와 연찬이는 여섯 살 아이들이 모인 레몬반이 되었다. 노란색 레몬 모양에 이름을 써넣어 목에 걸어준 명찰이 아이들 얼굴을 환하게 만드는데 상큼한 봄기운이 성큼 다가온 기분이 들었다. 입학식이라고 준비가 분주한 선생님들의 수많은 일 중에 요 자그만 명찰 만들기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니 나는 왠지 마음에 뻐근한 감동이 전해져왔다.

난 존경하는 직업 중 하나가 유치원 교사다. 초등학교 이상의 학교 선생님들보다 두 배는 더 존경한다. "엄마는 최초의 교사"란 말이 있다. 그것은 가장 작은 사회단위인 가족공동체에서 가정교육의 중요성 때문에 나온 말이겠지만, 그래도 엄마는 자기 아이에게 다분히 주관적이기 쉬운 교사다.

하지만 유치원 교사는 내 아이에게 객관적인 최초의 선생님이다. 코 찔찔 흘리고, 도와주지 않으면 볼 일도 못 보고, 조금만 급해도 싸버리기 일쑤고, 뚝딱 밥 한 그릇도 제 손으로 잘 못 먹는 아이도 수두룩하고, 퍽 하면 시비 붙고 싸우는 놈에, 울고 쪼르르 와서 일러대고, 제 마음대로 안 되면 집에 간다는 아이도 심심찮고, 처음이라 적응이 안 되어 엄마 찾으며 우는 아이에, 어디 손 안 가는 아이가 한 명 있나? 이런 아이들에게 규칙을 알려주고 좋은 버릇을 들이고 질서를 잡아주는 일이 어디 하루라도 수월하겠는가 말이다.

이런 과정을 6개월 정도 거쳐야 비로소 선생님 말이 없어도 알아서 스스로 잘하게 된다니 솔직히 참 피와 땀으로 아이들을 길러낸다고 본다 나는. 내 아이 하나 가지고도 어쩌지 못해 하루종일 지지고 볶는 일이 날마다 되풀이되는 마당에 유치원 교사들의 '조무래기들 사람 만들기' 프로젝트는 가히 존경하고도 남음이 있다.

자기는 신병교육대 교관이 참 대단하다고 생각한다던 남편의 말이 생각났다. 지금 내 생각과 맥을 같이 하는 말로, 오합지졸 제 잘난 맛에 살아온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을 전투력과 군인정신으로 무장한 똘똘한 군인으로 만드는 일이 좀체 쉽지 않을 거란 이야기다.

그런데 군인들은 부모님과 떨어져 지내기라도 하지, 유치원 교사들은 거기다 잘난 요즘 젊은 엄마들의 오만 가지 요구사항에 불편, 불만사항까지 다 소화하려면 그 속에 어디 속이겠나 싶다. 오죽하면 "훈장 똥은 개도 안 먹는다"라는 말이 있을까.

내게도 유치원 교사를 오랜 한 친구가 있었는데, 그녀는 하도 우리(나를 포함한 몇몇 친구들)를 소홀하게 대하고 서운하게 만들다가 미국으로 시집을 가버린 터라 사실 난 그녀를 가볍게 잊고 산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래도 내가 그녀를 지금까지 높이 사는 건 그녀의 투철한 직업정신 때문이다. 유치원 교사로서 모범적이었고 지금 옆에 있다면 무엇이든 상의하고 조언을 구하고 싶을 정도로 교사로서 믿음직스러운 부분이 많았다. 미국에서도 교포 아이들에게 유치원 교사노릇을 하고 있다고 1월 중순께 전화가 한번 왔었는데, 오늘은 생각지도 않게 갑자기 그녀가 참 보고 싶은 그런 날이기도 했다.

대도시에 좋다 하는 사립유치원의 사정은 내 알 바 없지만, 유치원 교사들의 월급이란 것도 그 노동력에 견주어 참 더할 수 없이 박봉이라고 알고 있다. 아이들 챙기는 일 뿐 아니라, 늘 남아서 아이들을 위한 교재교구, 놀이감을 직접 만드느라 오리고 찢고 붙이고 하는 일은 일상사고 백원 이백원씩 하는 아이들의 코 묻은 돈 저축이라고 통장에 챙겨주랴, 유치원 안에서 아이들 소지품 챙겨주랴, 다 알진 못해도 오늘 오리엔테이션을 통해 선생님들의 잡무를 어림짐작으로 알 수 있었다.

유치원 교육도 나라에서는 하나의 공교육 범주에 넣고 있지만, 실제 교사들의 대우는 그야말로 원장의 재량이고 유치원 운영하고 남은 돈에서 어찌어찌 갈무리되는 실정이라고 봐도 지나치지 않을지 모른다. 유치원은 공교육이지만 교사는 병설 유치원 아니면 공무원이 아닌 것이다.

사실 내가 한 달에 소미를 위해서 내는 교육비를 생각하면 적은 돈이 아니다. 그런데도 "저거 남는 거나 있을까" 싶은 생각이 한두 번 드는 게 아닐 정도니 교사들의 월급 동결은 당연한 것이고 처우개선이나 복지는 가당치도 않는 문제인지 모른다.

그런데도 유치원 교사만 몇 년 차씩, 유치원 운영만 모범적으로 십 년 이상씩 해온 경우를 어찌 존경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내 성질머리로는 평생 가야 꿈도 못 꿀 엄청난 일이다. 오늘 원장 선생님도 말했지만 "돈을 벌자고 하면서 유치원을 시작하진 않는다"했다. 아이들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하고, 자기가 배운 것을 연고가 있는 자신의 지역사회에 다시 되돌려준다는 생각으로 이 철원 땅에 유치원을 문열었다고 했다.

난 그냥 선생님께 넙죽 엎드린 엄마가 되려고 한다. 무슨 말이냐면 그냥 모든 걸 믿고 따르고 감사하게 생각하고 존경하겠단 뜻이다. 크게 문제 삼을 일도 아닌데 이러저러한 불편과 불만을 시시콜콜 토로하고 성가시게 하지 않겠단 뜻이다. 유치원 버스 배차시간을 선생님들 나름대로 최선의 방법으로 정한 것을 이래서 너무 빠르다, 저래서 너무 늦다, 추울 때는 집에 전화를 넣어달라, 아침에 일찍 가니 돌아올 땐 빨리 오게 해달라, 집에만 있을 것 같은 엄마들인데도 웬 주문이 그리도 많은지……. 소미는 8시 20분 차를 타야하는데 지난 겨울의 생활습관으로 봐선 참 황당하게 빠른 시간이라 9시 넘게 가는 아이들이 부러웠지만 어찌 하랴. 도리 없이 적응시켜야지. 늦게 가는 아이가 있으면 빨리 가는 아이도 있고 뭐 그런 게지 한다.

소미는 그래도 미술학원 다닌 '경력'이 있다고 지나치게 쭈뼛거리거나 어색해하지는 않았다. 소은이는 제 언니보다 더 신이 나서 내 옆에 붙어 있질 않았다. 막대사탕에 과자까지 주니 그냥 '뿅'가서 희희낙락 볼풀장으로 미끄럼틀로 내달았다. 소미 따라서 다람쥐처럼 선생님한테 깍듯하게 인사도 잘했다. 내일부터 언니 없이 놀아야하는 심심하고 가엾기 짝이 없는 제 신세를 아직 모르는 게 분명했다.

저녁에는 밥을 지으며 내가 소미에게 이렇게 물었다.
"소미야, 너 연찬이 좋아하니?"
"네, 왜요?"
"아니, 소미가 연찬이 안 좋아하는 거 같아서. 아까 우리 집에 연찬이 왔을 때 별로 재미있게 같이 놀지도 않고 말야. 그래서 연찬이가 자꾸 집에 가겠다고 한 것 아닐까?"
"아니예요. 내가 왜 연찬이를 안 좋아할 수가 있겠어요 엄마."
"그래? 그런데 그게 무슨 말이야?"
"연찬이는 미술학원 때부터 친구한 오랜 친구잖아요."
"와! 우리 소미 의리 있네."
"의리가 뭐예요?"
"처음 믿는 마음이 변치 않는 것. 친구가 잘못하거나 여러 친구들에게 놀림 당해도 그 친구를 좋아하는 처음 마음이 변치 않아서 미워하지 않고 위로해주는 것. 그런 게 의리야."
"난 또, '으리으리' 그런 것처럼 크고 엄청 무서운 건지 알았지 뭐예요."
소미도 연찬이 때문에 새로운 유치원 다니는 게 아주 낯선 일만은 아닌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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