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한 뼘 성장드라마
자유부인 선언 본문
소은이가 오늘 처음 유치원에 갔다. 소미가 다니는 이화유치원에 그냥 묶어서(?) 보냈다. 이제 지난 7월 세 번째 생일을 지냈고 월령으론 만 38개월 막 지났다. 정식 유치원을 다니기엔 좀 이른 나이지만, 네 살 아이들은 연중 하반기엔 입학을 허락하며 5세반 아이들과 함께 한단다. 난 유치원이 안 되면 그만 두려고 했었다. 왠지 오래 전부터 놀이방이나 어린이집, 학원은 내키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유치원이 아주 마음에 든다.
소미와 소은이는 2주전부터 나를 졸랐다. 먼저 소미의 간청으로 시작되었다. 소은이와 같이 유치원 다니게 해달라고. 네 살짜리 동생들도 조금 많다고. 그리고 소미의 지원에 힘입은 소은이가 "유치원 다니고 싶다, 성생님 말도 잘 들을 텐데, 견학도 가고 싶은데, 야외학습 갈 때 간식도 가지고 가고 싶은데…… "하면서 제 언니에게 주워들은 유치원 생활을 꿰었다.
이제 더 이상 다섯 살이 되어야 유치원에 갈 수 있다는 말이 소은이에게 먹혀들지 않는 게, 옆집에 사는 동갑내기 친구 지훈이가 일주일 전부터 소미와 아침에 함께 유치원 차를 타고 있기 때문이다. 엄마 떨어지기 싫어서 첫날 엄청 울면서 차를 타던 녀석이 딱 하루 그렇게 울고는 요 며칠 이어 헤헤거리며 재미있게 잘 다닌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소미도 딱 이 시기에 미술학원을 갔다. 두 아이 모두 7월 생이니 계산도 빨리 되는데, 소미는 미술학원 여름방학이 끝나자마자 8월초부터 다니기 시작했다. 그때는 소은이 돌보기로 지쳐있던 내가 좀 살아보자고 보낸 경우였지만, 이번엔 또 다르다. 소은이는 그 때의 소미보다 훨씬 야무지고 드세다.
날마다 아침에 눈만 뜨면 남의 집에 가서 놀 궁리만 한다. 종화, 지훈이, 서진이 이 세 아이가 우리 이웃에 사는 소은이 또래인데, 이 세 녀석 누구도 제 엄마가 같이 오지 않는 이상 혼자 우리 집에 놀러오는 법이 없다. 집이 머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우리 앞집이고 우리 옆 통로고, 우리 아래층 집이다. 그런데 우리 딸만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혼자 남의 집에 문 두드리고 들어가, 내가 부르러 가지 않으면 함흥차사다. 내가 아주 그 엄마들한테 미안해서 "얘들아, 내가 잘 해줄 터이니 제발 우리 집에 와서 하루 종일 놀아라" 해도 안 듣는다.
그런데도 이번 역시 마음은 짠하다. 둘째 아이니까 내 마음이 좀 여물었나 싶었는데, 보내겠다고 유치원에 통보하고 모든 걸 결정하고 나니 다시 안쓰럽고 갑자기 소은이가 더 쬐끄매 보였다. 참 다섯 살이 딱 좋은데 이거 나 편하자고 보내는 거 아닌가 싶었다. 남편은 걱정 말고 보내라고 했다. 소은이는 소미보다 더 잘 적응할 거라 믿는다며 자기는 소미 때하고는 아주 다른 마음이라고 했다. 전혀 짠하거나 안쓰러운 마음이 들지 않는다고 하며 내가 그런 감정이 드는 게 의외라는 눈치다.
어제, 일요일 내내 소은이와 눈만 마주치면 "우리 소은이 유치원 잘 다닐 수 있을까?"했더니만 오후엔 내게 톡 쏘아 부쳤다.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단어 하나 문장 하나 이렇게 또박또박 말하면서 나를 기죽였다. 하긴 지금 이 시간 처음 간 유치원에서 전혀 주눅들지 않고 잘난 척하는 소은이가 눈에 보인다. 선생님한테 무슨무슨 말을 하겠다고 아침부터 야단이었으니까. 혹시 선생님 말씀하시는데 톡 튀어나와 제 말만 말이라고 그 꼬챙이 같은 목소리로 떠들고나 있지 않는지 모르겠다. 사실 그런 게 걱정이다.
소은이는 날마다 나랑 말싸움을 한 전력이 무수하다. 내가 무슨 일을 찬찬히 설명하려 들면 도무지 내 말은 듣지 않고, 내 입을 고 조그만 손으로 틀어막으며 "엄마, 조용히 해보세요. 그런데요, 엄마. 있잖아요…" 이러는 딸이다. 친구들과 선생님을 방해하지 않을까, 온갖 것 주워들은 얘기 기억도 잘하는데 이 '잘난척쟁이'가 혹시 따돌림을 받지 않을까 그게 걱정이다.
암튼 그래서 난 생각보다 조금 일찍 자유부인 선언을 한다. 소은이까지 하루에 몇 시간 동안 내 손에서 떠남으로서 나는 이제 혼자만의 시간을 공식적으로 갖게 되었다. 사실 마음이 아주 홀가분하고 설레기도 한다. 이 오전 이렇게 평화로운 시간이 낯설어 간간이 집안을 두리번거리기도 하지만 싫지는 않다.
"엄마, 언니랑 나 유치원 가면 엄마 좋겠다."
이건 무슨 중학생쯤 되는 딸들하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우리 없어서 엄마 심심하겠다' 정도가 보통 이만한 아이들이 할 수 있는 말일 텐데. 암튼 고맙다 내 딸들. 속이 가을 배추처럼 꽉 찼군.
결혼하면서 친구가 물어다 주어 집에서 하는 일이 조금 있다. 가벼운 사보기사를 쓰거나 정리하는 일인데 아이들은 그게 늘 엄마의 중요한 일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두 애들 낳고 기르면서 어렵사리 근근히 해내는 일을, 그래도 묵묵히 잘 받아서 처리해주고 다시 일거리를 가져다주었던 친구 덕에 꽤 오래 해왔다. 이제 육아에서 이만큼 숨통을 튼 터이니 조금씩 일을 정말 일답게 잡아가야 한다.
주로 아이들이 잠든 밤에 이 일을 하느라 늘 잠이 부족해서 괴롭고, 졸음을 이기지 못해 마감을 지나 원고를 줘서 자주 미안했는데, 이제 그러지 않아도 되는 일이 가장 기쁘다. 잠은 자야 할 시간에 자고, 일은 아이들이 유치원 간 사이에 하고, 아이들이 올 때쯤 컴퓨터를 완전히 끈다. 이제까지 밤에 못한 일을 낮에 질질 끄느라(집중도 안 되면서) 이게 잘 되지 않았는데, 이제 등을 보이고 컴퓨터 앞에 자주 앉아있는 엄마를 보여주지 않게 되어 기쁘다.
또 하나, 끝으로 이제 오전에 운동도 할 수 있어서 기쁘다. 우리 집 앞 하천을 끼고 둑방길이 왕복 2킬로다. 뛰든 걷든 딱 운동하기 좋은 코스인데(많은 분들이 하신다) 이제까지 엄두도 못 냈다. 빨리 많이 걷지도 못하면서 따라 붙으려는 소은이 때문이기도 했고 그렇다고 새벽에 일어나는 일은 잠이 부족한 나로서는 너무 힘든 일이었다. 다이어트도 다이어트지만 근력을 기르고 체력을 길러야겠다는 생각이 자꾸 드는 게, 집에만 있다보니 몸이 자주 무력해지고 늘어져서 꼼짝하기 싫어지는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럴 때 내 모습은 정말 보기 싫다. 운동으로 떨치는 수밖에 도리가 없어 보인다.
이제 뭔가 내 시간이 나와 가족을 위해 따로따로 제대로 나누어지는 기분이다. 이제 좀 더 식구들한테도 짜증 없이 마음을 다해 따뜻하고 부드럽게 잘하는 일이 수월하게 될 듯 싶다. 아무리 20대 청춘이 좋아도 난 지금 내 시기가 좋다.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낳지 않아서 결혼, 출산과 육아 그런 시간을 앞둔 젊음이 그다지 부럽지 않다. 더 한참 늙어야 부러워질까. 다만 이제부터는 시간이 조금씩 더디게 갔으면 할 뿐이다.
앗! 그런데 소은이가 딱 일 주일만 가고 안 가겠다고 버티면 어쩐다? 아이들은 자기가 원해서 하는 일도 곧잘 그렇게 변덕을 부리는 게 보통이니까. 유치원 선생님과도 일 주일을 두고 보자 했긴 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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