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한 뼘 성장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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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울타리

오렌지색 배낭 메고

M.미카엘라 2002. 9. 17. 12:43

"지난 주에 다섯 번이나 차 타는 데 데려다 주었으니까 오늘부터는 엄마 안 나가고 둘이 손잡고 갈 수 있지?"
쉽게 시원한 대답이 나왔다. 둘이 손을 꼭 잡고 계단을 내려가는 걸 보고 문을 닫았다.

 

나는 부엌을 통해 세탁기가 있는 뒤 베란다로 갔다. 문을 열고 살며시 두 아이의 모습을 엿보았다. 여전히 서로 손을 놓지 않고 꼭 잡고 걸었다. 잠시 후 소미는 옆집 우준이를 따라 찻길로 뛰어다니려는 소은이 손을 놓지 않고 "위험해! 안 돼! 우준이도 이리 들어와!"하고 소리를 질렀다.

아직 유치원 가방을 받지 못해서 그냥 집에 있는 오렌지색 헝겊 배낭을 맨 소은이의 뒷모습이 앙증맞다. 거기엔 무엇이 있느냐구?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손바닥만한 출석카드와 거기에 달린 일일저금을 위한 지갑.

잘 다닌다. 이제 어수선했던 마음이 비로소 평화로워졌다. 내내 쓰리고 아픈 속이 이제 좀 가라앉았다. 소은이나 나나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나보다 소은이는 아직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한 듯 보인다.

일 주일 내내 오후에 아이들 마중을 나가보면 소은이는 뒷좌석에서 곤하게 자다가 벌떡 일어나서 내 품에 안겼다. 본래 아무리 쥐똥만큼 자다가 깨워도 생전 선잠 깬 투정을 잘 하지 않는데, 그 최고 이쁜 버릇 그대로 잠이 덜 깬 얼굴로도 언제나 날 보고 웃으며 버스에서 내렸다. 그게 또 안쓰러워 "유치원 가기 싫으면 다니지 말까?"하고 묻길 여러 번했다.
"엄마, 이제 그 말 좀 고만 하세요."

어느덧 팍 쉬어버린 목소리로 나를 기운 나게 하기도 했다. 유치원에서 뭘 어떻게 하고 지내길래 목소리가 그렇게 잠겼는지 그 짹짹거리는 목소리가 한결 탁하다.

어제는 집에 돌아와 간식을 먹고 어린이 프로그램을 보다가는 블록 담는 통 위에 앉아서 그대로 잠들었다. 소미처럼 유치원에서 돌아와 밤 아홉 시까지 쌩쌩하려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한 것 같다. 그러나 안 다니겠다고 변덕을 부린 적은 없었다.

"엄마, 나는 좀 쉬어야겠어요. 언니랑 PX 갔다오세요."
"힘들긴 힘들어요."
이런 말은 할지언정 안 다니겠다는 말은 손톱만큼도 안 했다.

사실 이제 와서 고백하지만 집에서 유치원은 꽤 멀다. 약 8킬로 정도 된다. 차로 20분 정도 걸린다. (더 걸릴까?) 학교도 아니고 유치원 거리론 아주 멀다. 어린이집이나 학원은 비교적 가깝게도 많이 있지만 이 관내에서 관인 유치원은 여기 하나다. 그나마 지난해에 꼬불꼬불한 산길이 포장되어 올 봄 처음으로 우리 동네 원아를 모집했다. 사실 소미와 소은이는 유치원에서 지내는 시간이 힘들다기보다 날마다 일찍 일어나 8시25분 차를 타고 먼 거리를 다녀야하는 어려움이 있다.

나는 남편에게 위안 삼아 이렇게 말했었다.
"난 이제 어딜 가서 살아도 우리 딸들 걱정 안 해. 어딜 가든 여기보다 거기가 먼 유치원이나 학교를 만날 일은 거의 없을 거야. 정말 그럴 거야. 우리 딸들은 처음부터 세게 단련되어 웬만한 거리는 끄덕 없을 걸."

소미 말에 따르면 처음 유치원엔 간 날은 원감 격인 '작은 선생님'하고 점심을 같이 먹고 하루를 지내게 된다고 했다. 문을 열어둔 제 나이 반에 들어가는 것은 안 말리지만, 처음 온 아이들은 대부분 스스럼없이 들어가는 걸 어려워한단다. 당연한 일이다. 선생님 말로는 제 나이 반에 들어가기까지 두 달이 걸린 아이도 있다고 들었다.

소은이는 유치원에 간 첫날은 선생님하고 밥을 먹었다. 그리고 이튿날, 소은이는 작은 선생님한테 자기는 체리반(4,5세 반)에 가서 친구들하고 밥을 먹고 싶다고 하더란다.
"소은이가 그렇게 하겠다고 하면 선생님은 더 좋지."

그리고는 하루가 지날 때마다 노래도 배워오고(집에 와선 다 잊어버려 못 부르겠다고 안타까워했지만), 소미 언니 괴롭히는 오빠한테 우리 언니 괴롭히지 말라고 소리를 질렀다는 이야기며, 선생님께 칭찬들은 이야기를 무용담처럼 자랑스럽게 들려준다. 그리고 어떤 문제를 가지고 "그때 내가 고민했었는데"라는 표현까지 쓰면서 해결한 이야기를 깔깔대며 풀어놓았다. (니들이 고민을 알아?)

갈수록 안심이다. 나는 그저 섭생과 체력 안배에만 조금 더 신경을 써주면 되겠다. 그 터질 듯 빵빵했던 두 볼 살이 훨씬 빠졌다. 역시 그래도 씩씩한 우리 소은이답다. 쌈닭이네, 무수리네(소미는 공주라고 하면서), 냄새의 여왕이네, 똥고집쟁이네 하는 식구들의 온갖 험담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자기를 지킨 값을 하는구나.

아직까지 유치원에서는 집에서 보여주는 고집과 욕심을 드러내지 않은 것 같은데, 하긴 거기가 어디라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겠는가. 내가 일부러 붙들어 앉혀놓고 교육하고 감화(?)하지 않더라도, 이런 경우 아이들은 눈치로 감을 잡고 집에서보다 더 잘 한다. 꼭 내 아이가 아니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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