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한 뼘 성장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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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울타리

계약서

M.미카엘라 2009. 9. 3. 02:13

 

 

결국 엎드려서 코찔찔 짜며 흐느낀다. 에이... 뭐 나라고 안 해주고 싶은 건 아니다. 얼마나 하고 싶어 했는데. 지난 학기에도 시간이 영 마뜩치 않아 몇날 며칠을 졸라대는 걸 끝내 못하게 했는데 이번에도 또 그러려니 안내문을 받아든 마음이 무거웠다. 근데 솔직히 집요하게 졸라댈 게 분명한 소은이를 방어하는데 일찌감치 겁부터 났다는 말이 옳다.

 

토요 ‘방과후학교’ 얘기다. 한 학기마다 여러 프로그램을 가지고 수강생을 모집하는데 올해 요리강좌가 생겼다. 이름 하여 ‘리틀쉐프 창의요리’반. 방과 후 과외활동 하는 걸 싫어하는 우리 집 ‘손금이’라도 눈이 번쩍 뜨일 만한 강좌였지만, 토요일 하루 중 어중간한 시간에 배정된 것이 문제였다. 아무래도 토요일은 이런저런 일로 평일에 하지 못했던 것을 하기 마련인데 떡하니 2시 이러니까 허락하기 쉽지 않았다. 일주일 중 고작 토요일 하루 하는데 그래봐야 한 학기에 8회 정도로 잡혔다. 피치 못한 일로 이래저래 빠져버리면 과연 몇 번이나 할 수 있을까 싶은 거다.

 

“넌 요리학원 다녔잖아. 이건 요리학원 정식으로 다닌 사람이 하기엔 좀 약하다. 그치? 방학 때 엄마가 요리할 기회 많이 줄게.”

그래도 하고 싶다고 기어이 눈물바람 했던 걸 1학기 땐 안 해줬다.

 

그런데 이번엔 시간배정이 더 난감하다. 학교 가는 토요일은 오후 3시, 놀토는 12시로 잡혔다. 3시가 문제였다. 성당 주일학교 어린이미사 시간과 딱 겹친다. 미사와 교리공부는 어쩌고. 빼도 박도 못할 시간이라는 걸 알면서도 결국 찔찔 울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전화를 한 제 아빠에게 울먹이며 읍소한다. 엄마 좀 설득해달란 얘기.

“아빠, 토요일에 아빠 만나러 가야 할 땐 요리강좌 못 들어도 좋아요. 아무소리 하지 않고 따라갈게요. 요리 때문에 안 간다고 하지 않을게요. 그리고 학교 가는 토요일에 못한 어린이미사는 일요일 날 엄마랑 어른미사 같이 할게요. 네? 허락해주세요.”

 

남편은 내 생각에 바로 브레이크를 걸지 않고 소은이한텐 생각해보겠다고 한 뒤 잠시 뒤 내게 전화를 다시 했다. 허락하라는 것이다. 단 한 번밖에 못하고 수강비를 버리는 한이 있어도 그렇게 하고 싶어 하는데 하게 해줘라, 지난 학기도 몇날 며칠 잊지도 않고 눈만 뜨면 졸라대고 울었는데 이번 학기도 못하게 하는 건 너무하다, 요리사 되고 싶어 하는 애가 요리강좌를 놓치고 싶겠냐, 두 번이나 좌절하게 하지 마라, 아니면 다시 요리학원 등록해서 평일에 다니게 해주든가.... 하는 것이 남편 말이다.

 

이렇게 된 이상 내 생각을 밀고 나갈 수 없었다.

“좋아! 해! 엄마도 요리강좌 듣게 해주고 싶지만 시간이 안 맞아서 반대한 건데, 아빠가 공부로 바쁜 와중에도 전화해서 엄마한테 허락하라고 말씀하시니 더 이상 반대할 수가 없다. 근데 정말이지 소은이 너 꼭 요리사 돼라. 알았지? 이런 끈기와 근성 잃지 말고 하여간 뭔 일이든 끝까지 당차게 해내라고. 뭘 잘 포기하지 않는 소은이 너 고집, 좋은데

잘 쓰길 바래. 그럼 성공할 거야 진짜로. 알갔지?”

 

집안에 누가 뭐 어떻게 된 애처럼 엎어져서 눈물 콧물 쏟으며 서럽게 울던 소은이 벌떡 일어나 앉아 얼룩진 얼굴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내 생각 변할까 싶어선지 얼른 수강신청서를 들이민다. 그 순간, 머리에 반짝이는 전구 불처럼 한 가지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아, 난 머리가 너무 좋아~)

 

“근데 요리가 근성이나 끈기만 가지고 되는 게 아니라더라. 체력이 있어야 한대. 너도 들어서 알고 있지? 세계 요리계에 남자요리사가 주름잡는 이유. 실력도 감각도 아닌 체력이 받쳐주지 못해서 여자들이 살아남기 힘들다는 거.... 그니까 소은이도 지금부터 체력을 꾸준히 기르며 커야 돼. 요리사가 되는데 아주 필수적인 조건이니까.”

소은이가 눈을 반짝이며 내 말을 듣는다. (흐흐, 긴장해라, 그 다음 말이 진짜다 손금아~)

“그래서 말인데 엄마도 한 가지 조건이 있어. 소은이 리틀쉐프 하는 대신 올 가을 엄마가

등산 가자고 하면 즐겁게 군소리 없이 따라가기 약속할 수 있어?”

 

잠시 주춤하는 듯했지만 소은이는 망설이지 않고 그렇게 하겠다고 한다. 등산을 너무 좋아하는 소미와 달리 소은이는 등산하면 5부 능선까지 계속 툴툴 댄다. 그 다음부터는 오길 잘했다고 하면서도 일단 등산화 신겨 집밖으로 끌어내는데 힘들다. 그래서 지난 봄 몇 번의 등산기회를 버렸다. 슬슬 산에 오르기 좋은 계절인데 집 가까운 곳에 명산을 두고 이 가을을 그냥 보낼 순 없다는 생각이 순간 파박~ 뇌리를 스치는데, 살짝 치사하지만 나로선 이 달콤한 조건을 내걸지 않을 수 없었다. 명분도 분명하고. ㅎㅎ

 

“얼굴까지 즐겁게는 못해요. 그냥 잘 따라 갈게요.”

“뭐 그래. 얼굴까지 연기하란 말은 엄마도 안 해. 요리사체력 만드는 과정이다 생각하고 가는 거야. 알았지? 그럼 계약서 쓰자.”

“네~에? 계약서요? 엄만 절 못 믿으세요? 간다고 하면 가는 거지, 딸을 못 믿으세요? 아, 정말…”

“못 믿는다는 게 아니라 확실히 해두잔 거지. 나중에 딴 소리 안 하게.”

 

그때 방에서 소미 목소리가 튀어나온다.

“엄마, 잘하시는 거예요. 계약서 쓰세요. 소은이는 그래야 돼요. 기껏 약속해놓고 나중에 딴 소리 하는데 그동안 제가 얼마나 분통터진 줄 아세요? 아, 엄마도 내 마음 아시는구나.”

내가 쫌 안다. 소은이가 뭘 번갈아 하기로 해놓고 자기 차례가 되면 꼭 딴 소리하거나 룰을 바꿔서 화나게 한다는 걸. 나한테는 안 그러는데 유독 소미한테는 느긋하고 얄밉게 배 째라 식으로 해서 소미 속이 적잖이 터졌다.

 

 

** '웃으며 따라나갈 것'을 이라고 쓰라 했더니 '그냥 따라나갈 것'이라고 썼다

 

 

 그래서 썼다, 계약서. 그리고 여기엔 쓰지 않았지만 내가 한 가지 더 못 박아두었다.

“만약에 이번 주 일요일에 등산가자고 했는데 ‘엄마, 이번 주 요리는 뭐 안 배워도 괜찮아요. 별로 좋아하는 메뉴도 아니고...’ 뭐 이런 식으로 등산가기 싫어서 심지어 요리까지 포기하는 반칙하면 안 돼. 알았지? 그럼 나머지 강좌 다 못 듣게 할 거니깐.”

“에이 엄마, 설마 제가 그러겠어요?” 

그랬더니 다시 소미 목소리가 속사포처럼 튀어나왔다.

“그럼, 넌 충분히 그러고도 남아. 내가 한두 번 당했냐. 엄마, 엄만 어쩜 소은이를 그렇게 잘 아세요? 쟨 하기 싫으면 충분히 그래요. 아호~ 울 엄마 오늘 진짜 맘에 든당.”

 

나는 속으로 웃음이 터지는 걸 간신히 참고 이름 쓰고 도장 찍었다. 소은이도 제 이름 쓰고 도장 찍었다. 이로서 우리의 올 가을 등산은 시끄럽지 않고 가뿐하게 갈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되었다. 떡하니 요리강좌시간이 저러니 할 수 없이 일요일에나 가게 되겠지만.

 

손손, 인생이 그런 거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는 양보해야 하는 것. 그것이 오늘의 교훈이니라. 낄낄...

 

 

 

 ** <별난물건박물관>에서 재미난 요리도구를 들고 선 소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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