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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학교

피아노 선율에 빠지다

M.미카엘라 2009. 10. 26. 20:50

 

 

가을은 깊고 공짜음악회는 많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의 2009년 솜손네 버전이다. 공짜 좋아하면 어디가 벗겨진다는데 사실 세상에 공짜가 어딨나, 일단 두드려야 문도 열리는 법.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장착하고 최소한 귀차니즘을 버리는 수고는 반드시 필요하니, 그냥 가만있어도 저절로 집안으로 티켓이 날아드는 순도 100%의 좋은 공짜는 흔치 않다.

 

 

        

 

 

먼저 백건우 피아노 리사이틀.

요건 아침 7시부터 늘 듣는 FM의 한 클래식 프로그램에서 낸 퀴즈를 언니가 맞춰서 받은 상품이다. 문자로 정답을 보내면 수많은 정답자 중에 몇 명을 뽑아 공연 티켓이나 음악CD를 주는데, 나도 열심히 듣고 보내지만 아직 당첨된 적은 없다.(어머어머..오늘 아침(10.27)에 나도 당첨됐넹~ 유키 구라모토 내한공연 티켓~ 이야호!~ PD님 어제 이 글을 보셨쎄여? ㅋㅋ) 언니랑 만나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언니 핸드폰으로 당첨문자가 와서 우린 함성을 질렀다. 언니야 티켓 두 장 받아도 당근 나랑 갈 것이기에 함께 기뻐하는 일은 마땅하다. ㅎㅎ

 

솜손에게 반찬을 해서 둘이 차려 먹을 수 있게 준비해주고 성남아트센터로 달렸다. 미리 그날 연주할 베토벤과 브람스 음악을 열심히 예습한 나는 대가의 연주를 가슴 설레며 감상 잘 하고, ‘공연 다 보고 커피 빈 같은데 가서 이모와 수다 떨지 말고 빨리 오시라’는 솜손의 엄명을 받잡고 집으로 쏜살같이 돌아왔다. (쳇, 그 시간에 거기서 커피점 갈 데가 어딨다공....) 이제 많이 늙었지만 그 나이에도 고운 자태가 아직 그대로인 부인 윤정희 씨도 멀찍이서 볼 수 있었다. 난 피아노 한 대가 그렇게도 크고 장중하게 다가오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이건음악회.

요건 이건창호로 알려진 기업에서 20년째 주관하는 무료음악회로, 사연과 함께 티켓을 신청해서 당첨된 경우다. 신문을 보다가 유수한 국제 콩쿠르에서 잇따라 우승하며 천재 피아니스트라고 찬사를 받은 김선욱 군이 베토벤의 <황제>를 수원시향과 협연한다는 말에 눈에 멀어 바로 홈페이지에 사연을 올려 신청했다. 남편 직업을 팔았다 ㅋㅋ... 12월에 군인남편 따라 서울을 떠나 전방이든 지방이든 어디 멀찍이 이사해야 할지 모르는데, 초등학생 두 딸에게 이사 가기 전에 좋은 선물을 해주고 싶다고 보냈더니 덜커덕! ㅎㅎ

 

근데 너무 재밌는 건 삐수니 언니랑 수녀언니에게도 이 음악회에 대해 이야기했더니 두 사람도 신청해서 모두 당첨되었다는 사실이다. 삐수니 언닌 애들만 보낼 수 있냐, 내 동생 부부를 위해 신청한다, 네 식구가 함께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했단다. 수녀언닌 아프리카 잠비아에서 와서 10년 동안 신학공부를 하고 12월에 고국으로 돌아가 사제서품을 받는 수사님에게 선물하고 싶다고 보냈다(근데 애석하게 수녀언니는 언니도 수사님도 모두 그날 사정이 있어서 언니네 수도회 후원자님께 티켓을 드렸다). 어릴 때 방송국에 엽서 보내서 무수한 상품을 탔던 기억을 떠올리며 우리는 ‘우리가 찍으면 안 되는 게 없다’며 낄낄댔다. 옛 생각이 새록새록 난다.

 

 

 

 

그런데 하이라이트는 딴 데 있다. 작곡을 전공한 조카가 김선욱 군과 친분이 깊다. 고모들 준다고 선욱 군 어머니께 두 장 더 받은 티켓 때문에 좋은 자리에 앉아볼 수 있었고, 솜손은 사인회에서 사인을 받고 다시 출연자대기실에서 뒤뜰로 조카를 만나러 나온 선욱 군과 사진도 찍는 영광을 얻었다. 

 

방년 21세. 이 젊은 청년은 키는 그다지 크지 않았지만 배우 이서진과 아주 닮은 준수한 용모를 가지고 있었다. 영국의 세계적인 매니지먼트사와 계약을 하고 전 세계로 연주여행을 다니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는 대단히 유망한 피아니스트인데, 조카를 자기 형처럼 따르며 굉장히 신뢰하는 모양이다. 조카는 우리와 2시 30분 공연을 봤지만 다시 저녁 8시 공연을 또 봐야 한다고 했다.

 

 

 

 

베토벤의 <황제>는 솜손과 내가 유난히 좋아하는 레파토리인데, 나는 세세하게 연주자마다 기량의 차이를 다 알아낼 정도의 귀는 없지만 가슴 뻐근한 기분을 느끼며 즐겁게 감상했다. 소은이는 공연이 끝나고 난 뒤 ‘베토벤은 어떻게 저렇게 음악을 잘 만들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2주 후면 피아노 학원에서 마련한 발표회에서 슈베르트 즉흥곡을 연주하려고 맹연습 중인 소미에겐 김선욱의 연주나 사진촬영이 큰 자극이 되었을 것 같다. 한 곡만 3개월을 계속 연습하려니 어지간히 진력도 나는지 가끔 짜증을 부려서, 나는 살살 달래며 이리저리 흥미를 잃지 않게 하려다 보니 이런 공연장까지 오게 되었다.

 

소미는 나와 소은이가 따로 떨어진 좌석에서 보고, 소미는 이모와 오빠 사이에서 보아서 너무 행복했다고 한다. 소은이는 그런 공연을 보러 가서도 자주 바스락바스락 대고 옆 사람 귀에 대고 궁금한 걸 그때그때 소근대길 잘하는데, 소미는 아주 거기에 학을 뗀다. 나도 어제 그 고초를 겪었는데 다행히 우리 주변에 빈자리가 좀 있었다. 이따 말하라 해도 음악이 커지거나 강해지는 틈을 타 여지없이 질문하고 속닥댄다. 아우 증말.... 자긴 좋은 가운데 자리가 싫고 구석에서 편하게 보는 게 좋다나? 저렇게 속닥대고 바스락대고 싶어서 그러는 걸 내가 모를까봐...

 

“<황제>는 3악장이 진짜 황제 같애. 2악장은 황제가 주무시는 것 같아.”

“저렇게 악보도 하나도 안 보고 어떻게 치냐. 저렇게 긴 거 얼마 만에 다 외웠을까.”

“모차르트는 경쾌하고 밝은데, 좀 무겁고 그래도 난 베토벤이 더 좋아. 교향곡 7번 그거 제일 좋아. 어디서 그거 연주하면 또 보러 와요 엄마.”

“김선욱 같이 저렇게 독주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 거예요?”

 

공연 끝나고도 질문은 끝나지 않았다. 나는 대부분 질문을 조카에게 패스했다. 아이구...

 

“오빠는 왜 피아노 치다가 작곡으로 바꿨어?”

“갈라가 뭐야? 피겨스케이트에도 갈라쇼가 있는데...”

“지휘자는 돈 누가 줘?”

“오케스트라는 아무 때나 사람 뽑을 수 있고 아무 때나 그만두게 할 수도 있어?”

“오빠가 대단해요? 오빠는 그냥 우리 오빤데 어디가 대단한지 아직 모르겠네. 그런데 김선욱도 알고 대단하다. 하긴 난 어디 가서 오빠 자랑 제일 많이 하긴 해.”

 

 

 

 

어젠 소은이가 정말 오빠 자랑도 하게 생겼었다. 공연 전에 레스토랑 예약해서 맛있는 점심 쏴, 공연 끝나고도 각각 두 아이 앞으로 초코케이크에 시원한 음료까지 풀서비스 했다. 나 같았으면 이런 덴 비싸니까 맛이나 봐라 하며 케이크 한 조각에 음료도 하나만 사서 빨대 두 개 꽂아주었을 것인데 ㅋㅋ… 커피까지 너한테 내게 해서 안 되겠다 하니 조카 녀석 하는 말.

 

“아니예요 고모. 걱정 마세요. 본래 누구한테 쏘려면 이렇게 끝까지 확실하게 쏴야 오래 기억하는 거거든요. 소미소은아, 기억해라. 오빠가 끝까지 쏜다.”

 

언니와 나는 그건 그렇다며 낄낄 함께 웃었다. 본래 우리 집안 식구들이 저마다 한 유머하는데 이 녀석도 피는 못 속인다. 커피를 마시며 조카는 고모들이랑 이런 시간 가지니 좋다며 정기적인 모임을 갖자는 둥, 고모들은 너만 시간 내면 우리는 언제나 시간 있다는 둥 하면서 엄청 재미있게 왕수다를 떨어댔다. 예술의 전당의 단풍은 점점 짙게 물들어가고 모처럼 한가한 오후를 준비한 조카와 우리들은 아주 좋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행복한 가을날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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