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한 뼘 성장드라마
텅 빈 우사(牛舍) 본문
“오빠… 나야.”
“재형이니?”
“응. 얘기 들었어.”
“지금 일하던 중이라 좀 바쁜데 조금 있다가 내가 전화할게.”
제대로 말도 꺼내보지도 못하고 끊었다. 근데 차라리 다행이다. 사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나도 모르겠는 중이었으니까. 내가 왜 전화했는지 알았으면 됐다. 다시 걸려올 전화는 기대하지 않았다. 역시 오빠도 전화하지 않았다.
가축전염병 구제역 광풍으로 엊그제 우리 작은 오빠는 자식 같은 젖소 150마리를 땅에 묻었다. 오빠네 소는 한 마리도 구제역에 걸리지 않았지만, 인근 소목장에서 구제역이 발생하면서 결국 예방차원에서 살처분 결정이 내려졌다.
나는 전화로만 이 소식들을 전해 들으며 집에서 하염없이 울었다. 무슨 독극물을 주사하길래 맞으면 단 3초 만에 그 덩치 큰 소들이 퍽퍽 쓰러질 수 있을까. 주사기 들고 다가가면 뭐 먹을 거라도 주는지 알고 사람 손가락을 핥는다는 어린 송아지들 이야기를 듣고 나니, 그 맑은 눈망울이 3초 만에 빛을 잃고 쓰러지는 게 상상이 되어 종일 견딜 수가 없다.
소들이 운다고 한다. 과잉대응 같아서 분노하다가 이 불쌍하고 죄 없는 생명들을 한꺼번에 그렇게 무참히 죽여야만 하는 사람들의 심정은 또 얼마나 참담할까 싶다. 옆에서 동료들이 하나 둘 쓰러지자 나머지 소들이 심하게 동요하는데, 그거 잡아다가 주사기 든 손앞에 데려다놓는 오빠의 피맺히는 심정이 가슴 쓰리게 다가온다. 가까이 사는 큰언니 말에 따르면 작은 오빠가 그날 무슨 말을 하긴 하는데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고 한다. 겉으로는 냉정해지려고 애썼지만 거의 공황상태였던 모양이다. 왜 안 그럴까. 제 정신이었다면 그게 제 정신이 아니다. 내가 종일 눈물 나서 일을 못하고 서성였는데…….
20대부터 송아지 몇 마리로 시작한 오빠의 30년 젖소목장은 그렇게 하루 만에 폐업상태가 되어버렸다. 죽은 젖소에 대한 손실은 나라에서 보상을 한다지만, 오빠가 청춘을 바쳐 일군 목장은 사라졌다. 살아있는 동물을 먹여 기르는 이 직업은 365일 휴일이 없다. 아내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소젖을 짜야 하기 때문에 새벽 5시에 하루일과가 시작되는데 송아지를 포함하여 150두라면 새언니가 거들어도 힘이 부치는 일이다. 그래서 오빠네 부부가 함께 외출할 수 있는 시간도 거의 없었다. 오빠의 아들 둘은 어릴 때부터 목장 일을 거들었지만 이제는 도시에서 제각각 다른 일을 하고 있다. 상아탑이 아니라 정말 우리 조카들의 대학생활이야말로 우골탑이다.
그래도 참 남다르게 즐겁고 유쾌하게 목장을 일군 사람이 작은 오빠다. 돌아가신 큰오빠도 가까이 사는 형부와 큰언니도 소목장을 하셨지만, 그렇게 힘든 일을 가장 힘이 안 드는 것처럼 일한 사람이 내가 보기엔 작은 오빠였다. 우사 곳곳에 스피커를 설치하고 소한테 클래식 음악 틀어주는 일도 오래 되었다. 내가 호주로 신혼여행 갔다가 사다준 손때 반들반들 묻은 카우보이 스타일의 가죽모자를 지금도 트랙터 몰고 이리저리 일하러 다닐 때 멋을 내며 쓴다.
큰길 옆에서 목장을 하다 보니 오며가며 사람이 끊이지 않는데, 우사 한쪽에 전기주전자와 차를 준비해놓고 늘 대환영이다. 한때는 농촌봉사 활동하는 대학생들을 다 거둬주었다. 현재 사회인이 된 그 학생들은 농활이 끝나고 당시 초등학생이던 조카들을 데리고 자기들 학교를 구경시켜주었다고 한다. 조카가 커서 서울대학교에 입학했을 때 이 학생들이 축하 프랭카드를 만들어서 가져왔다고 해서 놀랐는데 이 중 한 둘은 조카와 지금도 연락한단다.
사람 오는 거 좋아하고 남 돕는 거 좋아해서 목장 일에 바쁘면서도 사이사이 동네일 보면서 웃음을 잃지 않은 사람이 작은 오빠다. 지금 이런 일을 당하고 깊은 저 속에는 피눈물이 맺혀있어도, 우리 동생들이 걱정 어린 얼굴로 가면 ‘괜찮아. 사람도 죽고 사는데 뭘…’ 이러면서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웃으며 맞이할 사람이 작은 오빠다. 그게 감성적이고 마음 여린 큰오빠와는 또 다르게 자기를 표현하는 작은 오빠 스타일이다.
그런데 내가 더 슬픈 건 오빠가 이제 다시 시작하기에도, 모든 걸 접기에도 참 어려운 나이라는 점이다. 사람 두고 했던 일이 아니고 자기가 모든 걸 해왔기 때문에 쉽지 않다. 이런 초유의 사태로 내려앉은 마음을 추스르기가 쉽지 않을 것 같고, 앞으로 이 힘든 일도 그렇게 오래 하지는 않을 계획이었던 것 같은데 무슨 동력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된다. 이제 친정에 가도 소미는 소에게서 갓 짜낸 진하고 고소한 원유 한 잔 먹을 일도 없겠다. 당분간 우유를 못 먹을지 아니면 아주 먹을 일이 없을지 단정하기 어렵지만, 마트에 가서 서울우유가 그득하게 쌓여있는 코너에 가면 이래저래 다시 눈물이 날 것 같다.
어릴 때부터 늘 있었던 얼룩소들. 나는 혹한의 겨울밤에 태어난 송아지랑 헌 옷가지 늘어놓은 방에서 같이 잠도 잔 어린 시절이 있다. 아침엔 털 마른 녀석이 미끄러운 장판을 딛고 일어서려다가 넘어져 방 구들장 다 깨뜨리며 나한테 다가오는 걸 겁내며 지켜보기도 했다. 난산을 하는 어미소를 돕느라 오빠 언니들과 비쭉 나온 송아지 발목을 밧줄로 묶어 힘껏 잡아당긴 경험도 수차례다.
비록 오래된 추억이지만 이런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면서 이제 우리 집 어디에도 얼룩소가 한 마리도 없다는 사실이 참 견디기 힘들다. 큰언니와 형부가 목장을 그만 두셨어도 큰오빠 목장이 있었다. 큰오빠가 돌아가셨어도 작은오빠 목장이 있었다. 순한 눈망울에 끊임없이 맛나게 되새김질하는 얼룩소가 얼굴을 내미는 소운동장을 지나야 오빠 집을 들어갈 수 있었는데 이제는 어쩌면 아주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어제 오늘 여기까지 생각이 미칠 때면 상처에 소금을 뿌린 것처럼 아프다.
어제는 갑자기 그 사진이 생각났다. 지금 우리 집에는 없지만 초등학교 4학년 때 내 사진, 긴 머리를 양 갈래로 땋고 분홍색 셔츠에 멜빵 청바지를 입은 내가 어미 젖소 등에 올라탄 사진이다. 딱 소은이 만할 때다. 잘 그러지 않는 큰오빠가 태워준 걸로 기억하는데 약간 흔들린 사진이지만 귀하게 남은 소잔등에 탄 단 한 장의 사진이다.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는 표정 사이로 살짝 겁먹은 걸 숨기지 못한 내 얼굴이 생각난다. 어디 있을 텐데… 찾아보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