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한 뼘 성장드라마
한밤의 난리부루스 본문
“내가 보면 꼭 져. 내가 안 봐야 돼!” 중요한 축구경기 때 그런다. “내가 보면 꼭 실수해. 안 보는 게 도와주는 겨.” 그 예쁜 김연아가 피겨 경기할 때도 그런다. 우연치 않게 이기는 경기보다 지는 경기를 많이 보게 된 사람들이 믿는 징크스인 건데, 그게 좋은 징크스일 땐 더 믿고 싶어진다. 내겐 박지성의 경기가 그렇다.
소소하게 나름 하는 일이 있는데 밤에 하는 게 집중이 잘 되다보니 늦은 시간까지 깨어있는 경우가 많다. 졸지 않으려고 살짝 틀어놓은 TV 프로그램은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축구경기일 때가 많다. 프리미어리그 올 시즌 경기는 엊그제 모두 끝났다. 박지성의 소속팀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우승했다.
박지성은 올해 시즌 최다 공격 포인트를 세웠다. 8개의 골을 넣고 6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했다. 나는 그 중에서 5개의 골을 생중계로 지켜봤다. 생중계는 늘 한밤중에 하고, 대진표 보고 맨유 경기시간을 꼭꼭 챙기는 것도 아니면서, 한 팀에 11명의 선수가 뛰는 축구경기에서 내가 응원하는 단 한 명의 선수가 골 넣는 걸 지켜보는 건 정말 행운이다.
가장 전율이 일었던 때는 울버튼햄과의 경기에서 박지성이 혼자 두 골을 넣으며 팀을 승리로 이끌었을 때다. 처음에 한 골 넣었을 땐 혼자 좋아서 방방 뛰었다. 동점이 되었다가 다시 박지성이 추가골로 이겼을 때는 밤 2시에 옆에서 자던 남편이 깰 정도로 혼자 소리 지르고 난리했다. 남편은 ‘아우 뭐야 시끄럽게~’하더니만 픽 다시 잠들고 나는 혼자 눈물을 찔끔거렸다. ‘에잇, 너 왜 밤중에 이 아줌마를 울리는 것이냐. 왜 그렇게 잘하는 거냐.’
엊그제 결승전에서도 박지성은 내가 욕실에서 이를 닦다가 중간에 나와서 보던 중에 첫 골을 넣었다. 그런데 애쓴 보람도 없이 연속 두 골을 상대팀에게 내주어 속이 상했는데, 다시 박지성의 어시스트로 안데르손이 동점골을 터뜨렸다. 박지성은 바로 교체되었고 이후 두 골을 더 뽑은 맨유는 승리했다. 새벽 3시쯤 우승 세레모니를 보는데 우승컵을 높이 쳐든 박지성을 보니 참 감격스러웠다.
내가 보면 넣는다. 그런데 이게 정말 내가 보았기 때문에 넣은 것일까. 박지성의 경기 스타일을 말할 때 전문가들은 몇 개의 키워드로 정리한다. ‘산소탱크’, ‘에너자이저’, ‘멀티플레이어’, ‘이타적인 플레이’. 그런데 나는 이게 이상하게 가슴이 아프다. 난다 긴다 하는 개인기 충만한 세계적인 선수들 틈에서 존재감을 뚜렷하게 보이며 팀의 주전이 되기까지 그가 살아남은 방법은 한마디로 팀을 위해 죽어라 뛴 것이다. 선수가 90분간 얼마나 뛰었나 km로 계산한 신기한 기록이 있는데 박지성은 단연 톱이다.
공격 포지션을 가진 세계적인 선수들은 수비를 잘 하려고 하지 않는다고 한다. 골문 가까이에선 패스를 하는 게 더 좋은데도 혼자 단독 드리블로 넣으려다 삑사리가 나기도 한다. 그런데 박지성은 골을 넣기보다 골을 넣을 수 있게 돕고, 내가 봐도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운동장 이 끝에서 저 끝까지 틈틈이 누비며 공격이면 공격, 수비면 수비 다 한다. 팀에 기여할 수 있다면 거름이 되길 마다하지 않는 성실하고 헌신적인 플레이가 멋지면서도 이상하게 가슴이 짠하다.
내가 그러면 남편은 좋아하는 것 하면서 돈 많이 벌고, 유명하고, 저렇게 세계적인 클럽에서 인정받는데 뭐가 가슴 아프냐고 한다. 뭐가 많이 받아? 에이, 연봉 너무 짜. 다른 선수들 비교하면 맨유가 진짜 헐값으로 잘 쓰고 있는 거라구.... 나는 꿍얼꿍얼댄다. 뭐든 경제적인 가치만 계산하면 장땡인 남자들이 이 마음을 어찌 알랴....^^
낼 모레 일요일 새벽, 맨유와 FC 바르셀로나가 유럽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맞붙는다. 모든 축구선수가 바라는 ‘꿈의 무대’라는데 박지성의 선발 출장을 고대한다. 2년 전에도 결승에 올랐으나 퍼거슨 감독이 박지성을 빼는 바람에 출전하지 못한 아픈 기억이 있다. 엔트리 명단에 올리지 않은 이유를 ‘이번 시즌 골을 많이 못 넣어서’라고 했다는데, 박지성이 그때 아픈 기억을 잊지 않았는지 올해 시즌 최다 공격 포인트를 세웠으니 이번엔 기대해도 되겠지? 결승에서 뛰게 된다면 밤잠을 설치며 보는 한국의 팬들을 위해 뛰겠다고 했다니… 짜식, 이래저래 내 가슴 찡하게 한다.
만약 이번에도 엔트리에서 박지성이 빠진다면 난 바로 바르셀로나 응원한다. 메시가 골 폭풍을 일으키길 바랄 거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스페인 내전>이라는 책을 읽고 스페인 클럽팀 레알 마드리드와 FC 바르셀로나의 역사적 악연을 흥미롭게 알게 되면서, 은근 바르셀로나 응원이 되는 중인데… 주말에 저 아랫녘으로 여행을 가는데 언니 잠 깰까봐 소리 죽여 가며 보게 생겼다. ㅋㅋ
2010-2011 유럽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광고 영상
아, 정말 대단하다. 메시 다음으로 박지성이 나오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