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한 뼘 성장드라마
단순한 생활 본문
뭐랄까...이런 경험은 그간 해본 적이 별로 없어서 참 묘하다.
텔레비전은 약 5개월 전부터 꺼져있고, 컴퓨터 인터넷은 간간히, 스마트폰도 문자 외엔 별로,
그리고 근래 몇 달 동안 우리 동네 밖을 거의 벗어나본 적이 없다.
그런 나는 하루 종일 뭐하는가 하면,
6시에 일어나서 아침 기도하고 밥 차린다.
운전해서 애들 학교 데려다주고 와서
삶은 달걀과 견과류와 과일 챙겨 도시락 싸고
운동하고 돌아온 남편과 아침 먹고 그가 공부하러 가면
나는 빨래 청소 소소한 집안일 한 후 1시간 정도 묵주기도.
그리고 다른 급한 일 없으면 책상에 앉아 신부님 책 원고 교정,
근데 이건 쉽지 않다. 진도가 잘 안 나간다.
집안에서 종종종, 동네에서 종종종 동선은 짧지만 무슨 일이 자꾸 생긴다.
도무지 가만히 있을 시간은 없다.
무엇보다 밥과 반찬 알뜰살뜰 잘 먹어주는 식구들 때문에
이틀에 한번 꼴로 마트나 동네 수퍼, 단지 내 장터 등에서 식재료 사고,
반찬 만들기 신공에 지난여름 하루해가 짧았다.
친정에서 큰언니 올케언니들이 잔뜩 보내주는 농산물을
다듬고 씻고 데치고 무치느라 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우리 언니들은 나 힘들다고 완성품 반찬도 많이 보내주고
조리만 하라고 다 다듬거나 일부 데쳐서 보내주기도 해서 감사했다.
작은 언니는 이것들을 자주 배달하느라 힘들었을 것이다.
올해만큼 새로운 요리에 도전해본 적도 없다.
올해만큼 다양한 음식 많이 해본 적도 없다.
올해만큼 엄청난 양의 고구마줄기 껍질 벗겨본 적이 없다.
(근데 난 이 일을 좋아한다 ㅎㅎ)
나의 부엌 생활은 올해가 절정기로 앞으론 이보다 더 화려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남편은 지난 3월 군에서 전역하고 인생 2막을 위한 시험을 준비해왔다.
장기복무 제대 군인 사회적응제도를 이용하며
사실 지난 7월부터 근무지에서 집으로 돌아와 본격 준비해왔다.
그 시험이 내일이다.
소미는 9월 수시원서를 넣고 11월 수능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저녁이나 휴일엔 네 식구가 하나 같이 다 책상에 앉아 뭔가 들여다보고 있으니,
잠 많은 고양이가 자다자다 지쳐 심심하다고 쫌 놀자고 제일 만만한 소은이 발가락 깨물거린다.
남편은 지금 대전에 있다.
애들이 날보고 아들 군대 보낸 엄마 같다고 한다.^^
집안이 고요해서 무엇이든 하기 좋은데, 무슨 일도 잘 손에 잡히진 않는다.
저녁 기도 하고 계획에도 없는 글을 주절주절 써본다.
기도-밥-운전-기도-집안일-원고교정-밥-운전-기도
이게 답답할 것 같은데 시간이 지날수록 생각만큼 나쁘진 않다.
삶이 단순해지니 뭔가 내 안이 고요해지는 부분이 있다.
늘 우선 순위에서 밀려 예닐곱 번째쯤 생각나던 하느님을 상위권으로 모셨다.^^
기도와 묵상이 한결 편안해지고 좋아지니 내 삶, 내 안이 샅샅이 들여다보이기 시작했다.
안 보이던 게 보이고, 안 들렸던 게 들리고,
피하고 싶었던 생각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고, 부정하고 싶은 일을 인정하게 되고,
내가 어쩔 수 없는 일은 받아들이게 되고, 부끄러운 일에 솔직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한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는 내가 보였다.
다들 힘든 한 해지만 그만큼 성장하는 한 해가 되리라 믿는다.
그 결과가 어떠하든.
우리 식구 중 가장 팔자 좋은 1묘.
방해 끝에 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