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한 뼘 성장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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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정원

영숙씨에게 보낸 편지

M.미카엘라 2005. 5. 13. 10:31
 


한번도 제 글에 흔적을 남기신 적은 없지만

몇 년째 숨은 독자로 꾸준히 저와 교류하는 분이 계십니다.

직장여성으로 저처럼 두 딸이 있으시고, 서너 번 만나 뵌 적은 있지만

아주 가끔씩 아주 긴 편지로 회포를 푸는 특이한 사이입니다.

이번에도 한 두서너 달쯤 되는 주기로 각각 한통씩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그 안엔 서로가 엄마들인 만큼 아이 기르는 이야기가 빠지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이 편지로 새 글을 대신할까 합니다.

글을 올릴 수 있게 허락해주신 영숙씨께 감사드립니다.

 


***********************


잘 지내시죠?

칼럼에서의 재형님은 여전히 일상의 생활을 맛스럽게 펼치고 계시네요.


<중략>


요즘 은채는 키가 많이 컸어요. 제 어깨까지 오는 것 같아요.

부쩍 아가씨 티가 나는 것이 조금은 서운한 감도 듭니다. 벌써 다 큰 것 같아서요.


월요일에는 비디오를 봤어요.

시은이가 돌 무렵의 비디오인데 그때의 은채는 지금 시은이보다 더 어리더군요.

은채는 수련회를 가고 없었는데 그걸 보던 시은이가 얼마나 깔깔거리고 웃는지요.


아이들이 엄마 품을 떠나는 건 정말 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은 이렇게 크는데 엄마인 나는 뭘 이루었을까 라는 생각도 들었구요.

좋은 엄마노릇도 해야 하고 아이들 공부도 신경 써줘야 하구요.


둘 다 어찌나 엄마에게 이것저것 요구하는 게 많은지 모릅니다.

한 아이에게만 말을 붙이면 이내 나머지 하나가 다리에 붙어

제 말도 들어달라는 양 말을 붙이지요. 그것도 둘 다 하이톤으로요.

아이들 어렸을 때는 몸이 힘들었는데

요즘은 저녁시간에 제 시간이 더 없다고 느껴지는 것이

정신적으로 신경을 써줘야 하다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은채가 요즘 많이 씩씩해 진 것 같아요.

얼마 전 은채 학교선생님을 만나 뵈러 간 적이 있습니다.

은채의 소극적인 성격을 상담했었는데 선생님께선 의외의 말씀을 하시더군요.

'소심함과 자신감은 백지 한 장 차이다' 라구요.

정년퇴임을 앞두신 선생님의 오랜 경험에서 나온 말씀이셨죠.

사실, 이명박의 '신화는 없다' 에서도

그의 중고교시절은 가난함과 피곤함 등으로 무척 소심한 편이었는데,

대학 단과대학 학생회장이 되면서 그의 소심함은 자신감으로 떨쳐지지요.


한번의 기회에서 자신감을 느끼면 성격이 달라질 것이라고 하신 그 말씀이

제게 얼마나 위안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아마 그런 기회를 만나지 못한 사람들만이 소심한 사람들로 남은 게 아닐까요?


한달쯤 전에 집에 오시는 아주머니의 개인적인 사정으로 오후 내내 아이들끼리

있어야만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은채가 시은이를 유치원에 가서 데려왔지요.

별 것 아닌 일이었는데도 은채는 나름대로 자기도 이런 걸 할 수 있구나 라고 느꼈나봐요.

그리고 담임선생님께서 제가 학교 갈 때 사 가지고 간 화분에 물주는 걸

은채에게 시키겠다고 하셨는데 그것도 나름대로 은채에게 좋았던 것 같구요.

그런 일을 계기로 은채에게 '많이 씩씩해졌다'라는 말을 몇 번 했더니

그것도 상승효과에 더해진 것 같구요.


소미가 반장에 당선되었다는 소식은 칼럼에서 봤어요.

아이들이 씩씩한 거..... 재형님 그거 참 복인 줄 아세요.

저는 앞으로 제가 분위기를 잘 조절해야 할 것 같습니다.

민감한 아이들이라 제가 피곤하다고 한 마디 던지는 말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거든요.

나름대로 씩씩했던 시은이도 이제 좀 크니 이 집안 아이들의 특성대로 잘 삐지고 마음 상해하고 합니다. ㅠㅠ

몇 년만 고생해야지 하고 생각합니다.


너무 이런저런 사연만 늘어놓았네요. ^^

잘 지내시고, 또 연락드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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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숙씨.

잘 지내셨어요? 저도 고의는 아닌데 답장 무지하게 늦게 하죠?

암튼 우리의 편지 주기 한번 끝내줍니다.

다른 사람들 같으면 삐지거나 서운하거나 소원하거나 그러다가 흐지부지한 관계가 되거나....

이것들 중 하나가 되었을 것인데 암튼 둘 다 스타일이 그러그러하니

오랜만에 주고받아도 늘 한결같은 느낌입니다.

편안하고 부담 없고 그러면서도 주절주절 쉽게 수다가 나오구요.


<중략>


은채가 다소 적극적이고 자신감 있는 성격이 되어간다니 참 즐거운 소식이네요.

어제 잇몸치료 받으러 치과에 갔다가 대기실 잡지에서 본 기사가 생각납니다.

이란 주제로 한 여성지 최신호에 난 기산데

어떤 여성 CEO는(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아요) 어릴 때 꼭 은채 같았나봐요.

낯도 가리고 수줍어하고 또 등등...


그런데 어머니가 열 살 되던 무렵부터 심부름을 시키더랍니다.

그것도 그냥 심부름이 아니라 버스 타고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친지의 집에 가서

떡이나 뭐나 들고 오기도 만만치 않은 물건들을 받아오는 심부름이었대요.

그리고 그 나이에 지금 주부들의 장보기 수준으로

시장에 가서 물건 사오는 심부름을 시키셨구요.

별거별거 다 사오고 거스름돈 챙겨 드리고 하였는데

그게 그렇게 사람을 달라지게 하였다네요.

모르는 건 물어봐야 하고 힘이 달리면 도움도 청해야 하고 하다보니

자연히 사람 대하는 일이 수월하고 그 모든 면에서 자신감도 생기고 적극적이 되었다 합니다.

지금 같아서는 참 간 큰 엄마구나 싶어요.

그게 지금보다 조금 덜 험악한 시대니까 할 수 있었을까요?


그런데 재미있는 건 거기 나온 어머니들 모습에 어떤 공통점이 있었는데

많은 어머니들이 어린시절 자녀에게 '엄격했다'는 점이었어요.

예의를 가르치고 버릇을 들이는 문제에선 가차 없이 엄했어요.

요즘은 '친구 같은 엄마' 이런 모습을 가장 이상적인 부모인양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시대가 변하니 저도 이런 엄마가 이상적인가 싶다가도

사실 저런 기사 보면 정신이 듭니다.


사람이 배워야 할 것이 시기마다 다르다는 점을 생각할 때

어린시절 생활태도를 엄격하게 바로 잡는 일은 참으로 필요하다 생각해요.

인사성, 밥 먹는 예절, 바른 존댓말, 가까이 사는 이웃과 오가며 지켜야 할 예절, 공공장소에서 지켜야 할 예절 등등.

이건 학교교육이 담당할 일이라기보다 가정교육으로 해결할 문제라고 봅니다.


치과에서 돌아와 잇몸이 모두 들뜨고 아려서 밥 먹기가 어렵겠다 하니

남편이 오랜만에 죽집에 가자 합니다.

'본죽' 거기 저희 식구가 팬이거든요. 맛있기도 하려니와 양도 푸짐해서... ㅎㅎ.


막 죽이 나와서 수저를 드는데 한 쌍의 모자가 들어와 제 바로 등 뒤 의자에 앉습니다.

널찍한 죽집에 우리 식구와 그 모자만 있는데 좀 시간이 지나면서 보니 이상한 거예요.

엄마는 아들한테 계속 곱게 존댓말을 하고 있는데

소은이 나이 정도 된 아들은 계속 엄마에게 반말을 합니다.

반말을 해서 뭐하다는 게 아니라 이 아이의 말투가 영 버르장머리 없고 제멋대로인 거예요.

아들에게 좋은 말 습관을 들이고 싶은 엄마의 심정이 등 뒤로도 환히 읽히는데,

저는 그러면서도 와~ 저 엄마 정말 속 좋다, 했습니다.

죽을 다 먹고 나오도록 그 엄마는 아들에게 말투에 대해선 꾸짖지 않고 

그냥 계속 존댓말로 아들 시중을 들면서 죽을 먹더군요.   


꽤 오래 전에 <인생에서 배워야 할 것을 유치원에서 다 배웠다>

뭐 그 비슷한 제목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적이 있었던 거 기억하세요?

그때 저는 그 제목을 잘 이해할 수 없었죠. 미혼이었고 책을 읽지도 않았으니 더욱 더요.

그런데 소미소은이 낳고 기르면서 책의 내용과 일치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제목의 의미를 잘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예절범절이나 버릇, 이런 것들이 어린시절부터 몸에 배지 않고 스르륵 어른이 되어버리면

이후에는 그 누구도 가르칠 수 없는 문제죠. 

다 큰 어른한테 가르칠 '과목'으론 너무 애매하고 민망하지 않나요?

그러나 옆에서 그런 사람을 맨날 두고 보자면 눈에 거슬리고 눈살 찌푸리게 되지요.

그러다보면 괜시리 평소 인간성은 좋은데도 그와는 별개로

그 사람이 꼴불견이 되어 미워지는 일이 생길 것 같아요.

저야 늘 집에 있는 사람이니 잘 알 수 없지만

영숙씨는 직장생활 오래 하시면서 여러 사람들 만나게 되니

그런 사람 만난 경험이 아주 없지 않으실 것 같아요.


'사람이 열 번 된다'는 말도 있지만 그건 가치관이나 신념이 달라지는 문제지

세살 버릇이 열 번 고쳐지는 문제는 아니지 않을까 합니다.

자식을 크게 기른 어머니들 역시 그런 점을 아셨기 때문에

자식이 크면 한결 너그러워도 어린시절엔 그리 엄격했던 거 아닌가 싶어요. 


에구구,,,. 너무 글이 기사 한 조각 가지고 오버했죠?

그냥 은채 이야기 끝에 떠오른 생각들을 쓰다보니 그리되었습니다.


영숙씨. 주절주절 쓸데없는 말이 많았습니다. 이해해주세요.

그리고 한번 정말 제가 명동 갈게요.

인도음식은 스타타워 지하 '강가'라는 식당에서 먹어봤는데 전 색다르고 괜찮던데요.


양재형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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