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한 뼘 성장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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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정원

어둠이 아이들을 비껴 간다

M.미카엘라 2004. 12. 16. 01:19

 아이들에게 임종은 실감할 수 없는, 손에 잡히지 않는 그 무엇이다. 엄중한 자리인 줄 아는 듯하지만 아이들의 몸과 생각은 그리 오래 그 엄중함을 잡아두지 못했다. 그래서 그 무거운 분위기 한가운데서 참을 수 없는 웃음을 터뜨리게도 만들고, 아이 때문에 지나치게 오래 슬퍼할 수도 없었다.


 지난 주 수요일에 엄마가 돌아가셨다. 아버지 이후 두 번째 임종을 지키는 자리는 가라앉을 대로 가라앉았다. 정신이 드셨을 때나 없으실 때나 반쯤 뜬 눈에 틀니를 뺀 허전한 입을 조금 벌리고 마른 몸에 힘겨운 숨을 몰아쉬는 엄마가 작은 미동을 보이기라도 하면 우리 형제들은 일제히 화들짝 놀라며 엄마를 불렀다.

 “엄마, 엄마, 우리 보여? 보여 엄마? 나 알지? 알지 엄마?”

 한번이라도 더 엄마의 또렷한 의식을 잡아보려는 안타까운 심정은 너나 할 것 없이 다급하지만 공허한 외침만 되풀이하였다. 그런데 그 늦은 밤에 우리 가운데 소은이가 깨어 있었다.

 “왜 할머니한테 반말해?”


 조금 우리를 알아보시는가 싶더니 다시 설핏 정신을 잃으실 무렵, 소은이가 물었다.

 “엄마, 할머니 왜 이래?”

 어린 눈에도 할머니 모습은 심상치 않아 보이는 모양이었다.

 “으응, 할머니 지금 주무시는 거야.”

 “근데 왜 할머니 눈 뜨고 자? 금붕어처럼?”

 이 심각한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못하는 그 심심하고 무심한 갑작스런 물음에 도무지 그냥 참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먼저 웃기 시작한 건 큰오빠다.

 “저거 누구 딸이냐?”

 

 엄마가 최후에 온힘을 다 모아 가장 또렷한 의식으로 우리를 둘러보시며 하나하나 눈을 맞추고 입을 달싹여 무슨 말인가 하려고 하셨지만 한마디도 소리를 내지 못하셨다.

 “엄마 누구 찾아? 누구? 작은오빠? 작은오빠 오라구 할까? 조금 참으셔 엄마. 오빠 오라구 할게.”

 가까이 사는 작은오빠가 집에 다니러 간 바람에 전화하러 언니가 일어서는데 소은이가 또 한마디 했다.

 “우리아빠 찾나봐 할머니가.”

 

 소은이는 할머니 얼굴을 잘도 만지고 손도 한참 잘도 잡아드렸고 할머니가 건강해서 우리 집에 오셨으면 좋겠다고 자주 이야기했지만, 아이들은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슬퍼 우는 게 아니라 내가 우니까 따라 울었다. 엄마 울지 말라고 하면서 울었다. 그러면서도 어느새 제 아빠에게 발빠르게 전화해서 할머니 임종을 전하기도 했다.


 장례식장에 도착한 우리들은 황망해서 뭘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동안 엄마의 빈소가 차려지는데, 영정도 없이 처음 과일이며 포, 술이 올려지는 상이 차려지자 소은이는 “아, 맛있겠다. 저 곶감 먹고 싶다”하면서 곧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대려고 했다. 그 천연덕스러움은 또 한번 우리들을 웃게 만들었다.


 하긴 아이들이 슬픔이란 걸 자기 안에 오래 가지고 있을 수 있다면 이미 아이들이 아니겠다. 내가 우는 걸 더 이상 보지 않겠다고(그러면 어쩔 건지 모르지만) 말했던 소은이가 나보다 더 슬퍼하고 눈물을 흘린대서야 어른들이 또 어찌 볼까. 불의의 사고로 부모를 잃은 어린 상제들이 상복을 입고 천진하게 노는 모습에서도 눈시울을 적시는 어른들이 많은데. 오래오래 애통한 감정 같은 것이 어린 아이들을 비껴가는 것은 아이들을 사랑하는 하늘이 주신 선물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우리 형제들도 그렇다. 40년대 중반에 태어난 사람부터 60년대 후반에 태어난 사람들이 주르륵 여섯이라 나이 터울도 적지 않지만, 평소 세대를 뛰어넘어 격의 없이 재기발랄하고 순발력 넘치는 유머가 끊이지 않는다. 다혈질에 서로간의 애정이 과해 싸우기도 싸우지만. 그래서 엄마가 힘든 이생의 삶을 놓으시고 편안해지셨다는 믿음이 저마다 가슴에 가득했던 탓인지 허전함은 아직 실감하지 못한 채 우리들의 그 특유의 유머는 사이사이 상중에도 끊이지 않았다. 곧 정신이 퍼뜩 나서 “엄마가 저것들 뭐가 저리 좋다냐, 하시면서 욕하시겠다”하는 말을 곧 하면서도 말이다. (이건 부끄러운 우리들만의 비밀이기도 하다.)


 “아직은 몰라. 지나봐야 알지.”

 

 그런데 빈소에 오시는 분들이 들려주시는 말씀이 이 철없는 상제들을 두고 하는 말인지 이제야 알겠다. 나는 우리 집으로 돌아오는 길부터 벌써 목은 꽉 메어오는데 가슴은 뻥 뚫린 허전함과 공허감을 어쩌지 못했다. (언니오빠들이 들으면 서운할지 모르지만) 친정언니오빠는 있지만 왠지 ‘친정은 없다’는 공허함이 온몸을 휘감아 결국 집에 와서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들이 만화를 보다가 당황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소미야 소은아. 엄마가 할머니 보고 싶은데 이제 볼 수 없다 생각하니까 그래. 어쩌지? 소미 소은이는 엄마 우는 거 싫어하는데…. 그래도 얘들아, 엄마가 당분간 자주 이렇게 울어도 이해해줘 응? 엄마가 없으면 소미 소은이도 이럴 수 있잖아. 그러니깐. 좀 있으면 괜찮아질 거야.”

 아이들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허락했다.

 “괜찮아요 엄마. 맘껏 우세요. 이해해요.”

 이쯤 되니 아이들이 나보다 더 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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