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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정원

10주년 결혼기념일

M.미카엘라 2004. 11. 23. 00:05
 

*** 운영자님께 메일을 드렸으나 웬일인지 메일이 돌아와서 부득이하게 게시판에 글을 올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여덟 살, 여섯 살, 두 딸을 둔 군인의 아내입니다.

그런 제가 오늘(19일) 결혼한 지 10년이 되는 날을 맞았습니다.

한 달 전부터 오늘로 휴가를 맞춰서 낸 남편과

며칠 전부터 이 뜻깊은 기념일을 어떻게 잘 보낼까 궁리를 했습니다.

아니, 남편은 고맙게도 제가 하고 싶은 것에 모두 맞춰줄 준비를 한 듯이 보입니다.


저희는 연애시절에는 연극이나 영화, 콘서트 등을 자주 보러 다녔는데

결혼 이후 10년간 특히 연극은 한 편도 보지 못했습니다.

마음의 여유가 없던 탓도 크지만 워낙 문화적인 혜택과는

거리가 먼 곳만을 따라 살다보니 어찌 그리 되었답니다.


그러다가 전방에서 살다가 이렇게 도심지로 나오니 물 만난 고기가 된 기분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특별한 날이니 영화 말고 특별한 연극을 보자고 맘먹었습니다.

두 아이도 바쁜 저희 친정언니에게 미리 부탁해서 모처럼 맘 푹 놓고 맡겨놓은 상태였지요.

그래서 좀 뒤늦은 감이 있지만 어제 저녁 공연정보를 기웃거리다가

전부터 너무나 보고 싶었던 이 <버자이너 모놀로그>가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좌석이 모두 만원인지 예매를 할 수가 없으니

이 노릇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너무 난감했습니다.

결혼 10주년 기념일에 남편과 볼 연극으로 이만한 것이 없다 싶은데....

아직 못 봤지만 저희 두 사람에게 잊을 수 없는 연극이 되리라는데 의심이 없습니다.

다른 공연물도 많지만 이미 마음을 정한 탓에 도대체 다른 연극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R석을 예매하려고 했답니다.

혹시 인터넷 판매분 말고 현장 판매분이 따로 있는 건가요?

제가 오늘 8시 공연을 볼 수 있는 길이 혹시 없을까요?

문화오지에서 사는 일이 다반사인 저희 부부에게 특별한 날,

모처럼 좋은 연극을 관람할 기회를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서주희, 팜플릿사진


제 연락처는 017-000-0000입니다.

길이 있다면 전화를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꼭 좋은 소식이 있길 기도하겠습니다..


양재형 드림.




 

 

 

**** 서주희님께

제가 결혼 10주년 기념일을 그렇게 근사하게 기념하게 되리라곤 생각지 못했습니다. ‘10년 만에 남편과 함께 보는 연극’만으로도 충분히 기념할 일이라고 여겼지요.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사인회를 하셨고 ‘서주희’라는 사인 하나만 받아도 큰 선물이다 하고 있었는데 거기서 서주희 님은 저를 알아봐주셨습니다.


“저희 부부 10년만에 처음 함께 본 연극인데… 정말 너무나 잘 봤습니다.”


얼굴빛이 조금 다르다 싶었는데 “저희가 오늘 결혼 10주년이거든요”했더니 이내 얼굴빛이 환해지면서 저를 와락 포옹부터 하셨더랬지요.

“아, 그 분이세요? 게시판 글의… 제가 인터넷을 봤거든요. 정말 반갑고 감사합니다. 그래, 오늘 하루 잘 보내셨어요?”

“보고 싶었던 연극을 보았으니 너무 잘 보낸 셈이지요.”


감사드려요. 사실 편견이라면 편견이죠. 유명한 배우나 이런 분들은 알아도 조금 모른 척, 반응을 하신다 해도 약간은 뻣뻣할 것이라는…… 제가 그만큼 서주희 님을 대단히 보았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예전에 출연하신 연극이 제목은 가물 해도 어렴풋 기억이 나기도 합니다.


<버자이너 모놀로그>는 딸을 둘 둔 제게 큰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여자를 셋이나 거느린 집안의 가장인 남편 역시 그러했던 듯합니다. 금기시 되었던 여성의 성기에 관한 통렬한, 혹은 적나라한, 혹은 서글픈 자화상을 남김없이 보여 주셨으니까요.


정말 긴장 많이 했었습니다. 한 이불 덮고 자는 남편, 볼 것 못 볼 것 다 보고 사는 사이지만 이상하게 무대에 올려지는 이 특별한 소재(연극의 소재로는 전무후무하지 않나요)에 무덤덤할 자신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남편에겐 제목도 안 알려주고 그냥 정보 없이 보시라, 조금은 충격적일 수도 있다, 한 가지 정보만 알려준다면 1인극이다, 하는 언질만 하고 극장 가까운 곳에서 저녁을 먹고 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남편이 멀리 극장 건물에 서주희 님의 사진이 큼직하게 걸린 포스터를 보더니 “저거 작년에도 보고 싶다던 연극 아냐? 여자의 거기에 관한”합니다. 결혼 10년 된 남편치곤 아내에 대한 관심이 아주 ‘꽝’은 아니구나 생각하며 잠시 기분이 좋았습니다.


꼬박 두 시간의 1인극은 제 등에 땀이 배어나게 하였습니다. 웃옷을 벗어서 덥지도 않았고 각오를(?) 단단히 한 탓인지, 각오가 필요 없게 감동적이어서 그랬는지 암튼 그랬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1인극인데도 10여 명 이상이 출연한 듯 많은 사람들의 역할을 열연하신 서주희 님의 열정과 관객을 열기가 고스란히 전해져왔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특히 가장 많은 웃음을 주었으나 섹스는 몸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이더라는 20대 커리어우먼의 고백 부분에서 저는 몸에 저릿한 전율까지 일었습니다.

 

결혼기념일, 연극배우, 서주희와 함께

 

저는 연극을 보는 내내 두 딸을 생각했습니다. 두 딸에게 내가 보여주고 들려주어야 할 여자의 성에 관한 자세를 바로 잡기 위해 연극에 몰두했습니다. 저 역시 내 몸을 샅샅이 자세히 들여다본 적도 없고, 제 아이들이 그 나이 때 있을 수 있는 호기심 어린 몸에 관한 질문들을 피해보려고 애썼는데, 이런 자세로는 아무리 딸들에게 솔직하고 당당하게 자신의 몸을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한들 공허할 뿐이다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성교육 전문가인 구성애씨의 어머니는 자신의 다 큰 딸에게 남편과(구성애씨에겐 아버지죠)의 잠자리를 스스럼없이 이야기하고, 딸의 친구가 미군과 사귀면서 관계를 한다는 말에도 놀라지 않고 ‘그 친구와 놀지 말아라’는 말 한마디 없이 딸의 이야기를 다 들어주었다는 대목도 생각났습니다.


그러나 저는 서주희 님이 연극 중에 따라서 해라, 합창해라, 대답해 보시라 하는데도 그것조차 잘 하지 못했습니다. 입이 잘 안 떨어졌어요. 연극 다 보고 난 지금도 잘할 자신이 없습니다. 아직도 쑥스럽고 아직도 민망한 걸 보니 저부터 여자의 몸, 여자의 성기에 관한 금기에서 자유로워져야 할 것 같습니다. 어머니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늙고 추레하고 못 배운 어머니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남들 앞에서 내 어머니임을 말할 수 있는 것처럼, 자기 몸을 제대로 사랑하는 길이란 이와 비슷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 역시 자주 두 아이 젖 먹여 기르면서 볼품없어진 가슴, 두둑한 아랫배만 탓하고 부끄러워합니다. 그런 면에서 저 역시 제 몸을 제대로 사랑할 줄 모르는 것이겠죠.


그러나 이전보다는 생각이 훨씬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기질상 제 몸은 늘 생각보다 행동이 몇 템포씩은 늦는 편이니 실천을 하자면 더 시간이 걸리겠지만 생각의 진보를 이루어내는 것도 얼마나 대단한가 하며 스스로 격려하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번 연극은 여러모로 고정관념의 틀을 깨는 중요한 전기가 될 것입니다.


서주희님.

연극을 본 후 저에겐 작은 소망이 하나 생겼습니다. <버자이너 모놀로그>가 14세 이상 볼 수 있는 연극이니 제 두 딸이 이 연극을 볼 수 있으려면 아마도 8년 이상은 족히 넘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부디 이 연극이 롱런을 이어가서 저희 두 아이와 함께 볼 수 있는 그런 날이 있길 기대합니다. 저로서는 서주희님이 계속 해주셨으면 하는 마음이 한 가득이지요.


서주희, 축하의 말

 

투박한 결혼반지 끼고 다니기 뭣해서 가볍고 예쁜 반지를 하나씩 사서 낄까, 둘이 신혼 기분 내면서 어디 1박 2일 여행을 다녀올까, 근사하고 값비싼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을까, 가족사진을 폼나게 찍을까, 둘이 궁리는 많이 했습니다만 저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결혼기념일이었습니다. 적어주신 축하의 메시지처럼 다시 10년 후 결혼기념일엔 저희 네 식구가 꼭 <버자이너 모놀로그>를 함께 보면서 활발한 대화와 토론이 오가는 행복한 저녁을 맞게 되길 기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양재형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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