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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학교

2002 춘천인형극제를 다녀와서

M.미카엘라 2002. 8. 14. 06:27
참 오랜만에 춘천을 다녀왔다. 대성산 수피령을 넘어 화천의 다목리, 사창리를 통해
가는 춘천 길은 경춘가도나 경춘선을 타고 가는 춘천 길과는 그 맛이 사뭇 달랐다.
군부대가 즐비하고 길이 꼬불거리는 정도가 '참, 여기 강원도지!'하는 생각을 새삼
들게 했다. 우리가 민간인(?)일 때, 그리고 길이 아직 비포장일 때 이 길을 남편과
둘이 넘었던 추억을 생각하면 참 양반이 된 길이다.

내내 비가 내리다가 춘천에서 시간을 보냈던 이틀 동안 날씨는 반짝 개어 맑고 꽤
좋았다. 닷새 동안의 남편 휴가 중 이 춘천에서 보낸 시간이 가장 좋았던 것도 날씨가
크게 거들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학생 때 강원대 다니던 친구가 있어서 꽤 자주 갔던
춘천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흑백필름 같은 야트막한 도시'라는 인상을 내게 안겨
주었다. 거대한 지하상가가 생기고 번듯한 빌딩이 모인 번화가만 빼고는 여전하다
라는 기분이 더 푸근한 느낌이 들게 했는지 모른다.

춘천은 꽤 많은 지방축제를 가진 도시였다. 나는 인형극제와 마임페스티발 정도만
알고 있었는데 그것 말고도 꽤 많았다. 태권도축제와 애니타운 페스티발(만화영화축제)이
곧 이어 열릴 모양인지 곳곳에서 홍보물을 볼 수 있었다. 벌써 인형극제만 14회 째라는데
놀라웠다.

우린 8일 개막식부터 보았다. 저녁 무렵 춘천 시내에서 간단한 시가 퍼레이드를
보고 인형극장으로 갔다. 야외무대 주변으론 참가자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우린 좀 일찍 도착한 덕분에 아주 좋은 자리에 앉을 수 있었지만, 개막식이라는
게 아이들에게 특별히 재미있는 행사일 수는 없었다. 여러 어르신들의 이모저모한
말씀에 낮에 있었던 아마추어 연극경연대회 시상식으로 이어지는 순서가 지루한 모양
이었다.

무척 기대를 했던 소미는 왜 이런 것만 하느냐고 성화였다. 나는 내일 진짜 인형극을
보게 해줄 테니까 기대하라고 달랬다. 소은이는 맨발로 서서 간간이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에 맞춰 춤도 추고 까불거렸다. 그냥 밖에 나온 게 좋은 모양이었다. 박수를 쳐야할
때는 그 까불거림이 극에 달해 털썩 주저앉더니만, 두 발목을 손으로 잡고 '발박수!
발박수!' 이러면서 발바닥을 부딪쳐 발로 박수를 친다고 했다. 그 고난도의 박수를
한참을 계속 그랬는데 주위 사람들도 쳐다보며 낄낄 웃었다. 아주 못 말렸다.

나는 인터넷에서 티켓을 예매하고 대강 행사개요를 꿰고 갔지만 개막식 순서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두 아이 성화에 따라 함께 몸이 근질거렸다. 그런데 때맞춰 식은 다
끝나고 개막공연으로 그림자극 <불새>공연을 시작했다. 소미와 소은이는 그때부터
끽소리도 안 했다. 소은이만 간간이 무섭다 했을 뿐, 소미는 정신이 온전히 빨려 들어간
게 분명했다. 참 여름밤에 야외에서 보기 좋은 공연이었다. 벽에 비치는 그림자극
말고도 바로 앞에서 인형을 든 공연자의 움직임이 보였는데 그것도 어른들에겐 하나의
볼거리였다. 재미있게 보았다. 개막식 동안 붙잡아 두었던 아이들에게 면목이 서는
순간이었다.

다음 날은 오전 오후 각각 유료 공연 두 편, 그 사이 무료 야외공연 한편을 보았다.
세 편 모두 다른 형식을 가진 인형극이라 흥미로웠다. 오전에 본 <왕자와 거지>는
인형을 움직이는 공연자가 검정 옷을 입고 얼굴도 검은 수건으로 가린 채 직접 인형을
가지고 등장하여, 바퀴 달린 조그만 의자에 앉아 이동하며 꾸민 극이었는데 처음엔
좀 낯설어 어색했지만 곧 그 검은 옷의 공연자는 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워낙
목소리 연기가 좋았고 인형의 움직임이 생동감 있었기 때문이다.

<몬스터가 보낸 초대장>은 우리가 잘 아는 보통 인형극으로 무대 밑에서 막대로
조정하는 형식이었다. 그리고 야외공연인 <일곱 마리 아기염소와 늑대>는 기존 명작에
다른 이야기를 끼워 넣어 조금 변화를 준 작품이었다. 엄마 염소가 아기염소들에게
황소 흉내를 내다가 배터진 엄마 청개구리 이야기를 들려주는 부분이 그것이다. 그러니까
두 이야기를 하나의 작품으로 엮은 것이다. 막대 인형, 또 헝겊 인형에 손을 넣어
움직이는 인형, 직접 인형 머리를 쓰고 사람이 꾸미는 부분까지 다양해서 재미가
두 배였다.

거기다 관객을 직접 무대 위로 불러 올려 참여시키거나, 함께 소리치게 해서 아이들에게
인기가 아주 좋았다. 소미는 혹시 자기를 무대 위로 불러 올리면 어떡하나 너무 걱정을
했다. 청개구리가 "여기 올라와서 나 좀 도와줄 친구 있으면 손들어 보세요!" 하는데도
손을 안 들었다. 자기 저기 나가는 거 너무 쑥스럽고 싫다는 거였다. 그러면서도 한참
거기 빠져있을 때는 저도 모르게 소리치라면 소리 치고, 묻는 말에 입 모아 큰 소리로
대답하기도 했다. 소은이는 음악이 나오면 엉덩이를 들썩였다. 나도 재미있는데 애들은
오죽 재미있을까 싶었다.

관객이 생각보다 많았다. 방학중인 아이들과 부모들이 대부분이지만 할머니 할아버지도
많았고 그냥 어른들끼리 온 경우도 적잖이 보였다. 사실 난 인터넷으로 티켓을 예매하
면서도 관객이 얼마나 될까 싶어 현장 판매하는 티켓 사도 될 텐데 했었다. 그러나
막상 가서 보니 예약도 안하고 미리 와서 발빠르게 티켓도 사지 않는다면 보기 힘들
수도 있어 보였다.

난 그냥 흐뭇했다. 예매를 해서가 아니라 관객이 많은 게 흐뭇했다. 사실 기대했던
시가 퍼레이드가 좀 시시하고 엉성했고, 국제적 행사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해외
극단 참가가 너무 적고 (6개국 7개 극단), 행사진행이 좀 세련되지 못하고 초라하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했는데, 관객이 많고 공연장이 꽉 찬 걸 보니 내 생각이 겉치레고
편견이었단 생각이 들었다.

사실 우리 나라 연극문화 토양이 배우 밥 벌어먹게, 아니 연극 하나로 한 가장이
자기 가정을 꾸릴 수 있게 보장해주지 못한다. 몇몇 히트한 장기공연 작품에 출연한
배우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대부분 너무 열악하다. 연극을 하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꽤 보았고 연극을 준비하는 과정에 참여도 해보았는데 정말 눈물겹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그 열정과 노력에 견주어 턱없는 대접이다. 그때도 그랬지만 여전히
크게 나아진 점은 없어 보인다. 관객은 여전히 입장료가 비싸다고 생각하고 관객은
초대장에 군침 삼키고 온갖 명목의 할인권은 발에 밟힌다.

난 춘천인형극제에서 다시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것도 아닌 이런 어린이 인형극에
몸바친 사람들의 열정을 보게 되었다. 청년들은 그렇다 치고 나이 지긋한 사람들의
해묵은 어려움과 생활인으로서 고달픔을 생각하면 마음이 짠해진다. 결코 호들갑이
아니다. 나는 내가 할 수 없는, 내가 하기 힘든, 내가 하기 싫은, 내가 엄두도 못 내는
일, 그러나 누군가는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을 존경한다. 인형극이나
어린이극을 하는 사람들이 그 중 하나다. 남편은 열악한 환경이라면 뭐가 좋아서
저렇게 할까 하는데, 나는 당신이 군이 좋아 자원해서 이리저리 '유목민 생활'하는
직업군인이 된 거나 다를 게 없다고 말했다. 좋아해서 하는 일이든,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 꼭 누군가 좋은 인형극을 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하는 일이든 분명 열악한
음지의 환경인 것만은 분명하다.

개학을 한 소미는 유치원에서 방학 보낸 이야기를 하는 시간이 있었나 보았다. 인형극제
다녀온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는 그림자극이 제일 재미있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설악산도
갔었고 물놀이도 하고 놀이공원에도 갔었는데, 그 이야기는 다 그만 두고 그냥 그것만
말했다고 했다. 두고두고 생각해도 잘 다녀왔다 싶은 대목이다. 아쉬운 게 하나 있다면
외국극단 공연도 한 편쯤 보고 싶었는데 10일부터 공연이 잡혀있어 못 본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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