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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학교

여행 끝에

M.미카엘라 2002. 10. 26. 13:53
그럴 때가 있다. 평소 좋아하던 일이 갑자기 하기 싫어질 때가 있다. 늘 잘해오던 일도 왠지
내키지 않고 불안한 때가 있다. 거침없이 즐겁게 하던 일도 무엇 때문인지 망설여지고 머뭇거리게
되는 때. 그런데 왜 그런 건지, 까닭을 딱히 알 수가 없으니 그 일을 하지 않을 명분은 따로
생각나지 않는다.

이번에 남편의 휴가가 그랬다. 추위가 오기 전에 어디론가 네 식구 훌쩍 다녀오자 했는데
내가 딱 그런 기분에 휩싸여 도무지 마음이 정리가 되지 않았다. 여행이든 뭐든 싸돌아다니는
것 꽤나 좋아하고, 누가 그러는데 내가 원치 않아도 역마살이 있다 하니 어디론가 가는 일이
늘 설레고 즐거워야 할 일인데 이번엔 이상하게 내키지가 않는 것이었다. 어디로 갈지도 모르겠고
(늘 여행지 선택은 내게 있다) 가고 싶은 데도, 만나고 싶은 사람도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집을 베이스 캠프 삼아 가까운 곳 왔다갔다하면서 일을 보거나 구경 갔다 오자하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지만, 늘 집과 부대를 쳇바퀴 돌 듯 하며 사는 남편에게 휴가 4일을 고스란히
그렇게 보내자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이런 기분으로 재수 옴 붙어서 혹시 교통사고나 나는
건 아닐까 싶은 방정맞은 생각부터 들었으니 정말 나로선 꽤 심각한 징후였다.

그러나 어쨌든 우리는 서해고속도로를 달렸다. 그야말로 이번 여행은 발길 닿는 대로 가는
여행이었다. 그러다가 행담도 휴게소에서 남편이 아무래도 긴 여행길을 위해 타이어를 교체
해야겠다고 했다. 참, 우리 집은 지난 10월 1일부로 새차를 갖게 되었다. 그건 새(new)차가
아니라 그냥 우리 식구가 새로 타게 된 차로 93년식 에스페로다. 50만원 주고 샀다. 우리는
폐차시킨 티코도 45만원 주고 산 경력이 있으니 남편과 나는 낄낄거리며 "우린 50만원 이상
주고 차 절대 못 사지. 암! 길면 한 5년, 적어도 3년은 탄다!"했다.

아무튼 새로 산 차는 속은 큰 문제가 없었지만 타이어를 갈게 되었다. 그래서 찾아든 곳이
당진이다. 고속도로 가까운 곳에 마침 큰 타이어 총판점이 있었다. 우리는 새 타이어로 바꾸고
나서 당진의 특별한 땅 왜목마을을 갔다. 서해에서 일출과 일몰을 동시에 볼 수 이상한 땅으로
이름이 높은데, 해가 저물길래 기막힌 낙조를 볼 수 있겠다 하면서 맘을 설렜는데, 약간 흐린
탓에 실패하고 말았다.

바닷가에서 새우를 조금 사서 굽고 밥을 시켜 저녁 삼아 먹고 우린 또 무작정 대천으로 갔다.
다행이 육군대천콘도에 방이 있었다. 하룻밤 자고 나서 금요일. 무창포 해수욕장의 철지난
바닷가를 구경하고 '콩밭 매는 아낙네야'로 유명한 청양 칠갑산 자락으로 흘러들어 장곡사까지
잘 들어갔다.

그리고 공주를 거쳐 대전으로 들어오는 길. 비는 주척주척 내리고 있었지만 현충원을 들러
시아버님 묘소에 참배할 참이었다. 그런데 공주에서 오면서 산 햄버거 하나 때문에 남편과
나는 크게 탈이 나고 말았다. 아이들과 다르게 좀 매운맛 나는 햄버거였는데 그게 아무래도
뭔가 수상했던 것이다. 화장실을 들락거리고 뱃속은 엄청 괴로운 전쟁 중이었다.

이천에서 하룻밤 자고 돌아오는 토요일 오후에는 소미가 체하고 말았다. 약을 지어 먹여도
월요일 아침까지 물만 먹어도 10분 안에 토해내고 말았다. 병원에서 링거주사를 맞고 돌아와
겨우 진정 기미를 보였고 나와 소미는 눈이 쾡해진 채로 기진맥진했다. 소은이만 빼고 세
식구는 그렇게 여행 끝에 괴로운 일을 당했다.

이런 일이 있으려고 그랬을까? 집 떠나기 전 내 기분 말이다. 사람이 살면서 어떤 때는 직감이나
육감을 믿어야 할 때도 있다 싶다. 동물적인 감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암튼 과학적이거나
의학적인 것만 아니라 우리는 가끔 우리 자신의 직감이나 직관을 믿고 사는 것도 좋을 때도
있다는 생각이 뒤늦게 든다. 그것 아니라도 사람은 제 할 일 다하고 살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번 여행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육군대천콘도에선 밤엔 파도소리가 그윽하고
아침엔 바다가 환히 내다보인다. 공원을 지나 걸어나가면 바로 바닷가 모래밭이다. 비탈진
곳에 가람이 배치된 인적 드문 특별한 장곡사는 또 어떤가. 울긋불긋 물드는 단풍, 우수수
떨어진 은행잎, 사찰 진입로 전에 널린 해학적이고 소박한 장승들, 긴 시멘트 전봇대에 매어진
줄이 아주 긴 그네 타기,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자지러졌다.

"엄마, 오늘은 아주 특별한 날이에요."
소미가 그네를 타고 돌아오면서 내게 건넨 말이다.



*사진 1, 2 칠갑산 장곡사에서
** 사진 3. 4 무창포 해수욕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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