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한 뼘 성장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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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도서관

세 가지 책 이야기

M.미카엘라 2002. 9. 1. 18:00

*교보문고 나들이

8월은 잘 놀고 잘 쉰 한 달이었다. 여름 휴가가 끝나고, 나의 화려한 광복절 외출, 그리고 바로 2주 동안 이어진 남편의 서울 파견근무까지. 우리 세 모녀는 주말마다 남편을 만나러 서울에 갔다. 서울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서울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며 오랜만에 색다른 즐거움을 누렸다.

지난 주 토요일에는 아이들을 데리고 교보문고에 갔다. 동네 서점은 자주 가보았어도 두 아이들에겐 생전 처음인 우리 나라 최대의 서점이지만, 나 역시 언제 가보았나 싶게 정말 오랜만이었다. 설레는 기분마저 들었다. 책의 숲에서 한 두어 시간 동안 비록 그 표지만 보는 일에 만족한다 할지라도 정신없이 빠져보자 작정을 했다.

그러나 아이들을 데리고는 그마저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너무 많았고 남편과 나는 아이들을 잃어버릴세라 한 명씩 맡아서 손을 꼭 잡고 천천히 볼 수밖에 없었다. 책의 숲에 빠져보겠다고? 빠지긴 빠졌지만 내가 보고 싶은 책 부근엔 얼씬도 하지 못했다. 그저 그림책 주변에서만 한 시간 반을 있었다.

소미와 소은이는 그 많은 책들 사이에서 자기들이 보았던 책들을 기가 막히게 찾아내어 환호성을 질렀다. 너무나 보고 싶고 갖고 싶고 책이 많아 어쩔 줄을 몰라했다. 하긴 어른인 나도 그 아름답고 빛깔 곱고 온갖 모양과 크기의 그림책들 사이에서 넋이 빠질 정도로 취했는데 아이들은 오죽 하랴 싶었다. 정말 아이들이나 나나 오랜만에 눈이 호강했다.

나는 아이들에게 원하는 책을 다 살 수는 없다고 말했다. 우리는 그림책을 빌려보는 곳이 두 군데나 있으니 앞으로 책을 계속 빌려보다 보면, 여기서 사고 싶은 책들이 하나 둘 나타나 우리 집에 머물다 갈 것이라고도 했다. 그래서 의정부 시내쯤에 있는 서점에서도 사기 어려운 책이나 두고두고 오래오래 여러 번 들추며 볼 책, 그리고 빌려주는 책에는 잘 있을 것 같아 보이지 않는 특별한 책들을 중심으로 사자 했다.

소은이는 내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상관을 안 하는 건지 계속 "엄마, 이거 좋다" "엄마, 나는 이런 책이 좋드라"하면서 연신 책을 내 손에 쥐어주었다. 우리는 여러 차례 돌아보며 고민고민한 끝에 모두 다섯 가지를 샀다. 취학 전 아이들의 생활 속 사소한 궁금증을 쉬운 말로 풀어주는 백과사전식 책 한 권, 가장 쉬운 종이접기 책 한 권, 그리고 독특한 방법으로 수개념을 도와주는 아주 특별한 그림책 한 권, 그리고 온갖 대표건물이나 동식물 그림이 곁들여진 대형 벽그림 세계지도 한 장을 샀다.

그리고 끝으로 한 가지는 남편이나 내 생각을 완전히 빼고 소미와 소은이가 순수하게 스스로 고르게 해주었다. 무엇을 고르든 하나는 사주겠다 했다. 소은이는 뭐든 손에 손 들어오는 작은 물건을 좋아하는데 책에서도 예외가 없었다. 손에 쏙 들어오는 아주 작고 앙증맞은 영어단어 그림책을 골랐다. 그리고 역시 우리집 대표 욕심쟁이답게 꼭 두 개를 사겠다고 애원의 눈빛을 보냈다. 통과!

소미는 소은이가 골랐던 영어책들 사이에서 역시 손에 딱 들기 좋은 핸드폰 모양의 책을 골랐다. 책표지에는 동그란 버튼이 있고, 누르면 벨소리가 난다. 내용 역시 친구들과 영어로 전화하는 대화체 문장이 하나씩 있었다. 나는 사실 아직 영어교육에 대한 어떤 장기적인 계획이나 소신, 시기나 방법을 못 정했기 때문에 영어책에 그다지 열정이 없다. 다만 요즘 열풍처럼 부는 조기영어교육 바람에 소신이나 계획 없이 편승하여 아이를 쉬 지치게 하지 않겠다는 생각만 있다.

그래도 뭐 어떤 것이든 한 가지는 사주겠다 약속했으니 지킬 도리밖에 없었다. 그 여섯 가지를 모두 계산하고 간단하게 패스트푸드점에서 요기를 했다. 같이 갔던 조카에게 어떻게 전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라 일러주고, 우리 식구는 교보문고를 빠져 나와 구로에 사는 친구 집으로 향했다.

시간은 다섯 시를 향해 가고 교보문고 나들이는 마무리된 시점, 소미는 곧 잠이 들었는데 갑자기 소은이가 어깃장을 놓기 시작했다. 자기는 꼭 사고 싶은 책이 하나 더 있다는 것이다. 열심히 설명을 하는데 무슨 책인지를 잘 모르겠다. 여하튼 그렇다면 그 당시 이야기를 할 것이지 기껏 치킨이랑 김밥이란 잘 먹고, 차 잘 타고 달리다가 이게 무슨 생트집이란 말인가. 졸린가 싶었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소은이는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마포대교를 넘어 영등포로 진입할 때까지 악을 쓰며 울어댔다. 울면서 이어지는 소리는 오로지 세 가지 말의 연속 재생이었다. 고장난 플레이어처럼.

"내가, 내가 꼬옥 사고 싶은 책이 있었는데 나는 사주지도 않고 언니만 사주구"
"내가 사고 싶은 책 사주지도 않고 엄마 미워! 이제 엄마는 미워할 거야이, 아빠만 이뻐할 거야이."
"빨리 다시 거기로 돌아가란 말이야."

남편과 나는 한참 달래다가 포기하고 그냥 무시해버렸다. 시끄러웠지만 참았다. 그런데 악머구리 같이 끓던 소리가 어느 순간 점점 잦아들더니 갑자기 무슨 맘을 먹었는지 딱 정신 차린 목소리로 따복따복 말을 하는 게 아닌가.
"그럼 엄마, 다음에 그거 꼭 사주셔야 돼요오? 꼭 거기 다시 가서요오?"

소은이의 포기는 이렇게 느닷없다. 아니다 싶으면 한순간에 확 냉수 먹고 속 차리는 스타일이다. 그게 종종 매력일 때가 있는데 딱 무시하고 한동안 시끄러운 것만 좀 참아주면 그 발산(?)하는 매력을 종종 느낄 수 있다.

K의 집에 가서 이 이야기를 했더니 다 듣고 난 K 왈.
"그럼 이번 칼럼은 뭘 쓸지 알겠다. '교보문고 나들이'겠네?"
"흐음, 아직 생각 못했는데 그렇게 하면 되겠군. 제목 정해줘서 고마워! 내 그대로 쓰지"




*도서관 버스

우리 동네엔 매주 화요일 오전에 김화도서관 버스가 온다. 작은 버스 안에 있는 책은 일 주일 동안 세 권까지 빌려주는데, 나는 주로 아이들 그림책을 빌린다. 큰 확성기를 지붕에 달고 라디오를 크게 틀어놓고 오는데 처음엔 웬 쓰레기차가 저렇게 오래 아파트 앞에 머물러 있나 했다.

종종 트로트 가요가 흘러나오는 그 라디오 소리가 나는 그래도 반갑고 고맙다. 소은이를 책에 취미 부치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소미와 달리 도무지 책에 관심이 없고 먹는 데만 신경을 썼던 딸이었다. 도서관 버스가 온 걸 자기가 먼저 알아차리고(나도 듣고 있지만 짐짓 모른 척 해주었더니) 엄마에게 알려준다는 기쁨, 빌린 책을 서둘러 챙겨 의자는 없고 책만 가득한 '이상한 차'에 오르는 즐거움, 그리고 자기가 고른 책이니 어쨌든 자기가 꼭 봐야 할 것 같은 즐거운 의무감과 호기심, 뭐 이런 것들이 잘 섞여 소은이는 요즘 책보는 즐거움을 제대로 찾고 있다.

한창 여름 휴가가 있던 3주간은 버스가 오질 않았는데, 그때 얼마나 목을 늘이고 기다리는지 내가 언제쯤 다시 오느냐고 도서관에 전화를 막 넣으려고도 했었다.
"왜 움직이는 도서관이 안 오지? 우리 책 바꿔야 하는데…"
3주만에 다시 나타난 도서관 버스에 오르면서 소은이는 두 명의 아저씨들에게 인사도 잘 하고 그 재재거리는 목소리도 한층 높았다.

종종 우리 나라 도서관의 폐쇄주의와 엄숙주의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조금 더 문턱을 낮추고 가깝게 다가설 수 있는 도서관이 되기 위해선 이렇게 국민에게 찾아가는 일을 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여긴다. 소은이가 어느 동네로 이사를 가든 도서관 버스에 친숙하다면, 저 혼자 어딜 나다닐 나이가 되었을 때 도서관을 찾는 일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나는 정책 입안자는 아니기 때문에 도서관이 늘 책의 1차 소비자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생각 속에서만 띄우며, 그런 정책이 빨리 생겨나길 빌 뿐이다. 공공도서관은 도서구입비로 많은 세금을 써야 한다. 기증 받을 생각을 일체 하지 말고 일괄로 엄청 사들여야 한다. 18년 간 한국출판문화협회 사무국장을 지낸 분을 가까이 모신 적이 있었는데 그 분이 살아 생전에(지난 해 타계하셨다) 늘 내게 자주 하시던 말씀이기도 했다. 그래야 출판 문화도 살아나고 도서관 문화가 살아난다는 것이다.

도서관은 사람이 모여 사는 곳 한복판에 있어야 하는데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아파트 단지 안에 예쁘게 서있어야 하고 화려한 상점이 모여있는 시내에도 멋진 모습으로 빼어나게 당당하게 서있어야 한다. 미국이 9,000여개 가까운 공공도서관이 있는데 반해 우리 나라는 400개의 도서관만 있다. 땅덩이의 격차를 감안하더라도 너무 적은 수라는 건, 일본이 2,500여 개가 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어디 붙어있는지도 모르겠고, 공무원 출퇴근 시간에 맞춰 운영되니 너무 이용시간이 제한되어 있다. 아무리 요즘 모 방송국에서 하는 책읽기 캠페인이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고, 파주에 아주 규모가 큰 출판단지를 만드는 중이라지만, 이런 형편이 계속 이어진다면 모든 게 공염불이 될 공산이 크다.

쓰다보니 무슨 정책까지 들먹이며 아는 체를 했는데, 이 문제에 대해서 평소 생각을 조금 한 터라 답답한 속을 달리 풀 재간이 없어서 이 모양으로 말이 길어졌다. 이제 끌탕을 하는 생각은 이쯤 접고 곧 소미와 소은이를 데리고 김화도서관을 한 번 찾아야겠다. 정책은 애들이 점점 크면서 달라지리라 믿는다.



*책 읽는 풍경

애들 책 읽어달라는 아우성에 시도 때도 없이 시달려온 엄마들은 그 괴로움을 잘 안다. 손님이 왔든 밥이 끓든 국이 넘치든 아랑곳하지 않고 책 읽어달라는 아이가 때마다 그렇게 신통방통하지만은 않은 거…… 아는 엄마들은 다 안다.

좀 말이 통하는 우리 아이들과 나는 그냥 자기 전에 읽기로 정했다. 아주 졸음이 오기 전에 미리 준비하고 보기로 했다. 이렇게 정하니 다른 시간에 괴롭힘을 덜 당한다. 그리고 나도 아주 성의껏 재미나게 읽어주는 일이 즐겁다.

밤마다 읽어주는 책을 보는 두 아이의 자세는 아주 판이하게 다르다. 소미는 입을 꾹 다물고 책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정말 어쩌다가 아주 모르겠다 싶은 것만 짧게 묻는다. 그런데 소은이는 제대로 책장을 못 넘기게 한다. 도무지 말이 많고 궁금한 게 많고 연상되는 생각이 많아서 나한테 연신 물어보기 바쁘다.

"엄마, 피노키(피노키오)는 '반말'하면 코가 길어지지요오?"
"엄마, 얘네들은 말은 다 다르게 하는데 그림이 왜 계속 계속 같지? 이상해!"
"엄마, 나도 애기 때 놀이공원 갔었지이? 그래서 애기 바이킹도 탔지이? 근데 나 그때 토할 거 같았다!"
"엄마 곰 뱃속에 있는 애기가 이상해. 이거 쥐 같애. 그치 엄마, 쥐지?"

조금 읽다가 늘 이런 식으로 브레이크를 거니 책장이 넘어갈 리가 없고 진도가 나가기 힘들다. 소은이가 이럴 때마다 소미는 그 자리에 벌렁 드러누워 소리는 내지 않고 두 팔과 다리를 공중에서 흔들면서 '내가 아주 미쳐! 누가 쟤 좀 말려줘요!'하는 표정이다.

어떤 책은 한 장 한 장마다 토를 달고 할 이야기를 끄집어내는데, 그 때는 대답을 하다하다 지쳐서 확 나까지 누워버린 다음, 소미하고 똑같은 짓을 하며 쉬어간다. 그러면 소은이는 볼륨과 톤을 한껏 높여 소리치다가 저도 낄낄 웃고 말 때가 있다. 아주 못 산다 정말. 당해보지 않고는 모른다. 그러면서도 꽤 긴 그림책을 꼬박 세 권씩 다 채워 읽어달라고 한다.

그런데 잘 읽어준 보답일까. 소은이는 요즘 자주 내게 이런 말을 한다.
"엄마, 내가 엄마 사랑하는 거 알지?"
(이거 본래 엄마들 버전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