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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처럼 말하기

M.미카엘라 2001. 10. 5. 03:54

"엄마, 난 엄마를 프랑스까지 사랑해요."
"엄마, 히니는 아파트까지 사랑해요."

요즘 소미와 소은이는 이런 말투로 나에게 사랑표현 하는 일에 재미를 붙였다.
어디를 갔다오는 거리로 비유를 해서 그 긴 거리만큼 사랑한다는 말이다. 소은이는
물정 모르고 제 언니 흉내를 내기는 하지만, "에게, 겨우 아파트까지?"하는
말이 곧이라도 튀어나올 듯 그 비유가 우습고 어법이 안 맞을 때가 많다.

아이들이 이렇게 말하게 된 데는 전적으로 그림책의 공이 크다. 한 권은 전집
그림책 속에 있는 <마법사 츄츄와 요술 빗자루>, 다른 한 권은 한국프뢰벨에서
펴낸 <내가 아빠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세요?>인데 이 두 권의 그림책을
적당히 버무려 놓은 것이 요즘 딸들의 애정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츄츄는 아빠, 엄마가 마법사 모임에 가고 없는 밤, 요술 빗자루를 타고 재미있는
주문을 외워 이 나라 저 나라를 여행한다. 미국, 프랑스, 중국, 인도, 호주, 러시아,
싱가포르, 아프리카, 북극, 일본, 한국까지. 대표적인 그 나라의 건축물이나
기념물이 그려진 이 그림책은 사실 그림이 그다지 맘에 안 들지만(웬만한 고등학생
수준의 그림 같고, 사실적이지 못해서 다른 책에서 실제 사진을 본다 해도
그게 이거였는지 잘 모를 것 같다) 소미는 처음 전집을 샀을 때부터 이 책을
너무 좋아했다.

지난 여름엔 여행하면서 지도 보기를 대강 가르쳐주었더니 아주 흥미 있어 하길래
제 작은 책상 앞에 세계지도를 하나 붙여주었다. 그걸 가리키며 책 속 나라를
하나씩 구경시켜주니 그게 그렇게 좋은 모양이었다.

"와, 프랑스는 진짜 머네."
"중국은 우리 나라하고 딱 붙었네. 그럼 무척 가깝겠네요 엄마. 금방 갈 수
있어요?"
"서이 언니네가 여기 영국에 살아요? 무척 멀겠다. 그럼 어떻게 가요?"
"와, 러시아는 무∼지 땅이 크다. 좋겠다."
"북극 사람들이 사는 집, 이거 나 알아요, 엄마. 이글루 맞죠? 성생님이 갈켜
주셨어요."
"이거 후지산이 폭발하면 온천이 생기는 거예요? 전에 다른 책에서 봤잖아요, 엄마.
우리도 온천 가봤는데, 그럼 어디가 폭발한 거예요?"
"엄마, 엄마, 여기 지도 좀 보세요. 미국이 여기 맞죠? 그럼 지금 저기 테레비에서
비행기가 팍 집에 떨어진 데가 여기 미국 맞아요?"
이러면서 흥분을 하는데 저렇게도 신이 날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다가 미술학원에서는 한 달에 한 권씩 그림책을 골라서 사게 한 후,
한 달 내내 제 책을 끼고 읽히다가 그걸 월말에 집에 보낸다. 8월의 책이 <내가
아빠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세요?>였다. 황색 털을 가진 아빠 토끼와 아기 토끼가
서로 얼마나 사랑하는지 경쟁적으로 그러나 가슴 따뜻하게 표현한 책이다.

맨 처음엔 팔과 다리만 옆으로 위로 쫙 벌리며 '이만큼'하던 것이 '저기 강까지
가는 길만큼' '강을 지나 산너머까지 가는 길만큼' '달까지 가는 길만큼' '달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길만큼' 이렇게까지 사랑한다고 표현한다. 몸짓을 해가며
서로 더 많이 사랑한다고 뽐내는 아빠토끼와 아기토끼의 그림이 부드럽고
평화롭게 표현되어 감동적이다.

이 두 그림책의 비빈 것이 "엄마, 난 엄마를 프랑스까지 사랑해요"다. 아시아,
유럽, 북미, 아프리카를 두루 섭렵하며 그 거리만큼 나를 사랑한다니… 참,
키운 보람이 있구나. (호호호!)

그런데 사실 난 그 고백보다도 그림책 두 권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든
소미에게 뿌듯해하고 있었다. 내가 읽어주지 않아도 세계지도 앞에 앉아 손가락으로
어디어디를 짚어가며 중얼중얼거렸다. 마음속으로나마 츄츄처럼 여행을 떠난
것인지도 모르게.

그리고 일본은 자주 쪼끄맣다 하면서도 우리 나라가 쪼끄맣다는 소리는 한번도
안 했다. 역시 대한의 딸인가? 아님 나라를 지키는 대한민국 육군의 딸이라
자존심이 드높은가?(키키!)

소미와 가장 빠르게 친해지고 싶은 우리 집 손님은 책 다섯 권 정도를 싫다
소리 없이 좌악- 읽어 내려가 주면 된다. 소은이? 소은이는 "껌 사러 PX갈래?"
이러면 끝난다. 참, 이거 말하면 안 되는데. 쩝! 혹 나쁜 사람이 히니를 꼬드겨….
그래도 제 언니 따라한다고 부엌에 선 나를 붙들고 "엄마, 히니는 엄마를 햇님
나라까지 살랑해요" 한다. 아니, 그 먼 우주까지? 아파트까지라더니 장족의
발전을 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