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한 뼘 성장드라마
엽기적인 그녀들의 말, 말, 말! (10) 본문
<이거 물 아니예요>
지난 봄, 하얀새님이 나와 같이 아침고요수목원 갔다가 돌아오면서 우리 집을 잠깐 들러서 간 적이 있다. 저녁 즈음이라 돌아갈 마음이 바쁘기도 했고 나는 집에 특별히 근사하게 대접할 것도 없는 형편이었는데 하얀새님은 밖에서 먹을 거 다 먹었는데 그냥 물이나 한 잔 달라고 했다. 그래서 끊여서 냉장고에 넣어둔 결명자차를 한 잔 내놓은 게 전부였다.
그때, 마침 남편이 전화를 해왔다.
“으응… 진솔이 엄마 우리 집 잠깐 들렀다 가시라 했는데 막상 뭐 대접할 게 있어야지. 물 한 잔 내놓고 있어 지금.”
그렇게 말하는 내 옆에서 하얀새님은 남편 들으라고 “진짜예요. 물밖에 안 주시네요” 하면서 장난스럽게 소리쳤다. 그랬더니 옆에서 듣고 있던 소은이 정색하면서 하는 말.
“아니예요 하얀새 이모. 이거 물 아니예요. 이거 차예요. 결명자차.”
<노을>
저녁 무렵 차를 타고 어딜 가는데 해가 빨갛게 거의 다 지면서 노을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소미가 그걸 바라보며 말했다.
“엄마, 난 이때가 참 좋아요.”
“그래? 소미도 그래? 엄마도 그런데… 근데 소미는 이런 때 어떤 마음이 들어?”
“내 마음이 아주 순해지는 것 같아요.”
<포식한 후>
어머니 생신 때 시누이 식구까지 불러 온 식구가 한 식당에서 맛있는 저녁을 먹었다. 소미가 아주 맛있게 많이 먹고 나서 나오면서 하는 말.
“아후~ 엄마, 배에 금이 갈 것 같아요.”
<상식>
토요일엔 아이들은 꼭 9시 반 안에 재우지 않는다. 10시 좀 넘어도 여유 있게 놀게 해주는데, 그날따라 남편과 내가 보던 드라마에서 80년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들이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었다. 드라마가 재현하기도 하였고 당시 촬영된 필름을 함께 섞어서 보여주기도 하였는데 소미가 거기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 잔혹한 장면을 계속 보게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소미가 고개를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내게 물었다.
“엄마, 참 이상해요. 우리나라 군인이 왜 우리나라 사람한테 총 쏴요?”
“……”
남편과 내가 순간 서로를 쳐다보면서 빨리 대답을 찾지 못하고 있는데 다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6.25 전쟁도 아닌 거 같은데…”
“그게 이상하니? 그래. 이상할 거다. 당연히 이상한 거지 그게….”
그때 소미가 나름대로 답을 찾았다는 듯이 웃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아아~ 알겠다. 엄마 저건 그냥 드라마지요? 그냥 꾸며낸 얘기지요?”
그 다음은 남편이 바통을 받았다. 아이 눈높이 맞게 ‘꾸며낸 이야기’가 아닌 아이의 상식에서도 훌쩍 벗어난 역사 속 이야기를 짧게 설명해주었다.
<아쉬움>
어머님 댁에서 아이들을 일 주일간 놀게 하고 데리고 돌아오던 날. 고속도로에서 개를 잔뜩 싣고 달리는 차가 우리 차와 나란히 잠시 달리게 되었다.
“와~ 소미소은! 저기 옆에 봐봐. 저 차에 개 정말 많다.”
“어디요? 어디요?”
두 아이는 한쪽 창에 매달려 밖을 보면서 환호하고 소리 지르고 뭐라고 재잘댔다. 그러다 소은이가 갑자기 창문을 열었다.
“소은, 왜 문 열어? 달리는 차에서 문 열고 얼굴 내밀면 위험해. 여긴 더구나 고속도로야.”
그랬더니 소은이는 잠시 망설이다가 순순히 창문을 스르륵 닫으며 아쉽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에이, 개들한테 뭣 좀 물어볼 게 있었는데…”
<미용실에서>
우리 세 모녀가 이용하는 단골 미용실에 갔다. 거기서 소은이 머리를 좀 많이 잘랐다. 긴 머리 풀고 다니는 게 이쁜 줄 알고 머리카락을 잘 안 묶으려고 하는 통에(사실 머리를 묶는 게 훨씬 이쁜데도 손손은 그걸 모른다) 나와 늘 실랑이라, 소은이와 내가 만족할 스타일을 찾고 싶었다. 그래서 적당히 묶어지면서도 풀고 있어도 무겁지 않을 정도로 잘라 달라고 했다. 잠시 머리 자르던 분이 자리를 비운 사이 소은이가 내게 물었다.
“엄마, 엄마는 왜 이 삼촌한테만 머리 잘라요?”(우린 남자에게 자른다)
“잘 자르시니까. 그리고 저기 동네 작은 미용실에 계실 때부터 오랫동안 알고 지냈으니까.”
“잘 자르셔서 이제 이렇게 큰 미용실 하시는 거예요?”
“응. 엄마는 암튼 저 삼촌이 잘라주는 게 맘에 들어.”
그랬는데 그 다음 질문이 포복절도하게 만들었다.
“그럼 엄마. 저 삼촌이 이 미용실 ‘우두머리’예요?"
<외출할 때>
방학 때 소은이가 소미의 피아노 학원에 따라간 적이 두어 번 있다. 아이들은 학원에 가려고 집을 나서고 나도 잠깐 밖에 볼 일이 있어서 같이 나가려는데 소미가 빈집에 대고 인사를 했다.
“다녀오겠습니다.”
“왜 벌써 인사해? 저기까지 같이 나갈 건데.”
“하느님한테 하는 거예요. 늘 집에 계시잖아요.”
아이들은 식구가 함께 외출했다가 돌아와서도 인사를 잊지 않는다.
<동정>
“엄마, 내가 모기 잡았어요. 날라가는 모기요.”
“어디? 소은이가 이제 선수됐구나.”
“이거 보세요. 모기…”
“에구 어쩌나. 이건 모기 아냐 소은아. 이건 하루살이야.”
“에이, 미안하다. 그냥 하루 살게 할 걸. 하루밖에 못 사는데…”
<소은이의 일기>
8월 18일
제목: 가톨릭 회관
가톨릭 회관에 갔다.
가톨릭 회관에서 아프리카에서 굶고(굴무고) 있는 아이들 사진을 보았다. 너무 불쌍했다.
그래서 나도 도와주고 싶었다. 하지만은 도와주지는 못했다.
그래도 사랑의 상자에만 많이 모으면 되겠다.
나는 직접 도와주고 싶었는데 그래도 재미있었다.
* 사랑의 상자: 아프리카에 기증할 중고 생활물품 넣는 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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