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한 뼘 성장드라마
엽기적인 그녀들의 말, 말, 말!(8) 본문
*** 솜솜이 편 ***
<임금님 진상품?>
이웃집에서 아이들 머리만한 아주 큰 배 네 개를 선물 받았다. 크기도 큰 게 어찌나 물이 많고 맛이 좋은지 아주 혀에서 살살 녹았다.
“얘들아. 이거 어진이네 이모가 어제 너희들 잘 때 가져오신 거거든. 한번 먹어봐. 얼마나 맛있는지 몰라.”
소미는 오랜만에 배 먹어본다고 깎을 때부터 군침을 삼키며 야단이었다. 그러더니 딱 한입 베어 먹고 나서는 이런 기막힌 품평을 한다.
“아! 진짜 맛있다. 대통령한테 바쳐도 나무랄 데 없는 배예요.”
<방 청소>
청소기 돌리게 둘이 놀던 거 말끔히 정리하라고 했더니 얼마 전 그날도 역시 소은이는 ‘농땡이’다. 도대체 안 한다. 믿는 구석이 둘이나 되니 온갖 달콤한 말, 칭찬이 안 먹힌다. 열심히 정리하며 부산하게 왔다 갔다 하던 소미가 은근히 부아가 나지 않을 수 없다.
“아이구, 저런 애가 커서 어떻게 될까 기대 된다 정말. 수녀님이 돼가지고 남이나 시키고 그러겠지?”
<가래에는>
소은이가 목감기가 와서 열도 나고 기침에 가래가 심했다. 열이 내리자 둘이 병원놀이를 하면서 잘 노는데 소미가 작은 약병에 우유를 넣어서 자꾸 소은이에게 여러 차례 먹였다.
“소미야. 가래가 많을 땐 우유나 요구르트 같은 유제품이 좋지 않대. 한 며칠 소은이가 안 먹었으면 좋겠는데.”
“네, 그래요? 이것만 먹이고 안 먹일게요.”
“그래. 먹어도 괜찮지만 가래가 많다니깐…”
“아참! 엄마. 가래가 많을 땐 사포날을 먹여야 돼요, 사포날. 부광약품.”
*** 손손이 편 ***
<깨달음>
두 아이에게 화판을 하나씩 사주었다. 유치원에서 야외 스케치 가는데 필요하다고 했다. 소은이가 견출지에 제 이름을 쓰고 내가 붙여주려고 하는데 영 맘에 안 드는 눈치였다.
“엄마 이거 이름표 삐뚤어졌어요.”
“아냐. 이 정도면 괜찮은 거야.”
“아니예요. 이거 삐뚤어요. 맘에 안 들어.”
“아니라니까. 이거 봐. 소은이가 붙인 게 더 삐뚤다 뭐.”
“아니래니깐요…(하다가 조금 잠자코 보더니) 아하! 내가 이름을 똑바루 안 쓴 건가부다.”
<이유>
소은이가 내가 화장실에 있는데 자꾸 불을 켰다 껐다 쉴 새 없이 장난을 계속했다.
“소은이 너 그러면 전구 금방 끊어져. 고만해. 전기세도 많이 나가구.”
“엄마, 노래 부르세요. 이거 노래방이예요. 히히.”
<투니버스>
하루 종일 만화를 내보내는 케이블방송 ‘투니버스’ 때문에 골치다. 평소 리모컨을 조정해서(어른들만 안다) 안 나오게 해두는데 그날은 저녁 무렵이라 해제했다. 우리 집은 투니버스가 ‘41번’ 채널을 통해 방송되는데 마침 아이들이 아주 좋아하는 <아따맘마>라는 일본만화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관심 있게 찬찬히 봤더니 주인공은 어린이들인 듯한데 별로 그렇게 좋아보이지 않았다.
“아이구, 오늘 보니까 <아따맘마>는 안 되겠다. 너희들이 조금 더 커서 봐야할 것 같아.”
그러니까 소은이가 망설임 없이, 그러나 눈은 여전히 화면에 고정시킨 채 무심한 말투로 이런다.
“41번은 교육만화 없어요. 기냥(그냥) 만화예요.”
<귤 꺼내러 갔다가>
하루 종일 직사광선이 들지 않는 선선한 뒷베란다에는 이런저런 식품을 두기가 한결 좋다. 냉동 코다리를 사다가 녹여서 한 사흘 조금 더 꾸둑하게 말리려고 채반에 널어둔 것을 소은이가 귤 꺼내려고 갔다가 본 모양이었다. 딱히 누구한테 하는 소리는 아닌 듯 작은 소리로 혼자 중얼거리며 나왔다.
“고등어가 불쌍해 보여….”
<끝까지>
요즘은 아이들이 그 실리콘 같은 재질로 된 딱지 때문에 집집마다 아주 난리다. 우리 집도 저녁 먹기 전부터 두 아이가 그것 때문에 실랑이를 하더니 밥상 앞에서까지 계속 그랬다.
“언니, 딱지 줘.”
“싫어.”
“언니, 나 딱지 좀 주라니깐.”
“싫어.”
“언닌 많잖아. 난 왕딱지는 한 개도 없는데. 그러니깐 딱지 좀 줘.”
“싫어.”
남편이 껴들었다.
“얘들아. 그만 하고 밥 먹자.”
그래도 소은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집요하게 들러붙었다.
“빨리. 딱지 줘. 빨리. 딱지.”
“싫어. 싫대두. 자꾸 그런다 넌. 니 맘만 있냐? 내 맘도 있지. 으이그~”
“그래도오~ 딱지 줘. 빨리이~”
이번엔 내가 2차 경고를 날렸다.
“그만 해라. 밥 먹고 하던가. 언제까지 그럴 거야? 이제 그만해. 빨리 딱지 저 뒤에다가 놔. 둘 다. 어서.”
소은이는 할 수 없다는 듯이 미적미적 뒤에다가 놓으면서 재빨리 소미 귀에다가 뭐라고 소곤소곤댔다.
“뭐라고 하는 거야?”
“아, 아니예요.”
“뭔데? 궁금하다.”
"....."
“엄마가 혼낼까봐 소은이가 저러는 거예요.”
(나는 웃으면서) “뭐라고 안 그럴게. 말해봐 소은아. 뭐라고 그랬니?”
소은이의 고 까만 눈이 요리조리 잠시 망설이는 빛이더니 이윽고 말했다.
“딱지 줘.”
내가 졌다.
<냉면>
물냉면을 해주었더니 소은이가 먹지는 않고 한참을 계속 저어대기만 했다. 그만 하고 먹어도 된다고 했더니 여전히 냉면을 저으면 이랬다.
“얘네들이 서로 친해져야 맛있어요. 면하고 국물하고.”
<착각>
학교와 유치원에서 돌아온 아이들에게 핫케이크를 해서 우유와 먹게 했다. 그런데 200ml 우유 한 팩씩을 들고 입구를 열던 소은이가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어? 여기도 ‘푸르지~오’가 있네.”
아파트브랜드 광고를 흉내 내며 하는 소리에 난 문득 궁금해져서 “어디어디?” 했다. “여기요”하며 우유 입구를 가리키는데 나와 소미는 그 순간 박장대소를 했다. 그건 ‘푸르지~오’가 아니라 ‘누르시~오’였기 때문이다. 우린 요즘 우유를 열 때마다 ‘누르지~오’하면서 소은이를 놀린다.
<전화>
요즘 전화가 울리면 아이들이 서로 받으려고 난리다. 그런데 그만 제 이모 전화를 내가 저녁을 준비하다가 부엌에 있던 무선전화기로 홀딱 먼저 받은 것이 사단이 났다. 소은이가 왜 엄마가 받냐고 울고불고 난리였다. 언니는 내 사정을 듣고 다시 전화를 해서 소은이와 먼저 통화했다. 소은이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소은이 왜 울어?”
“있잖아요, 엄마가요오~”
“울지 말고 바르게 말해야지.”
“있잖아요. 내가 전화를 받으려고 했는데요오, 무슨 사람이요, 일하는 바쁜 사람이 먼저 전화를 받냐구요오….”
“소은이가 그러면 전화기 옆에 붙어 있었어야지.”
“저는요오, 전화기 옆에서 아무것도 안 하구 있었는데요오, 무슨 일하는 바쁜 사람이 먼저 그렇게 전화를 빨리 받냐구요오.”
언니는 내게 이 말을 전하면서 “넌, 일하는 바쁜 사람이 먼저 그렇게 전화를 빨리 받으면 어떡하냐?” 이러면서 전화기 저 너머로 깔깔 넘어갔다.
<가을에>
남의 집에 가서 놀던 소은이를 데리고 오면서 은행잎이 떨어지는 아파트 단지 길을 둘이 손잡고 걷는데 소은이가 이렇게 말했다.
“엄마, 아까 놀이터에서 노는데 정말 이쁜 거 봤어요. 바람이 막 부는데 은행잎이 와그르르 막 떨어지는 거예요. 엄마가 ‘이쁘다’ 그러면서 좋아하실 거 같아서 보여주고 싶었는데... 그때 바람이 딱 그치는 거예요. 에이...그래서 못 보여드렸어요.”
<억울해>
아이들에게 평소 어른들끼리 이야기가 오고갈 때는 그 사이에 껴드는 말을 하거나 너희들 말부터 들어달라고 큰 소리로 떼 부리지 말라고 말해둔 적이 있다. 정 급하면 어른들이 잠시 말을 쉰 틈을 타서 “엄마 저 이제 말해도 돼요?”하고 물으라고 했다. 그런데 그날 차 안에서 남편과 내가 한참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어깨 사이로 소은이가 야금야금 끼어들면서 대화를 헷갈리게 하더니 결국 내 귀 옆에다 대고 큰소리 뭐라고 뭐라고 막 자기 말을 들어달라 하기 시작했다. 난 그 순간 귀 아프고 머리 아프고 신경이 확 거슬려서 빽 소리쳤다.
“너! 엄마가 사람들 이야기 중에 그렇게 니 말만 들어달라고 소리치지 말라고 했지?”
소은이는 순간 고개를 팍 숙이고 팔뚝으로 얼굴을 가린 채 숨죽이고 가만히 있었다. 그런데 그게 안 되었는지 남편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은이에게 물었다.
“소은아, 무슨 얘기 하려고 했는데에? 아빠한테 말해봐.”
“…… ”
“말해봐. 응?”
그랬더니 소은이는 내게 자기는 아주 억울하다는 듯이 울면서 말했다.
“그러니까요오, 엄마. 말을 쉬지 말고 하시란 말이예요. 난 엄마가 잠깐 말을 쉬어서 다한 줄 알았단 말이예요. 어엉엉.”
난 멋쩍고 미안했지만 소은이 말이 너무 웃겨서 킬킬대며 손을 잡고 사과했다.
"어! 엄마가 그랬어?"
<이름>
대학에서 유아교육과 졸업반 학생들이 유치원으로 실습을 나오는 계절인가보다.
“엄마, 우리 유치원에 또 학생선생님이 오셨어요.”
“그래? 좋겠네.”
“근데요 저 학생선생님 이름이 뭔지 알아요.”
“성함이 뭐신데?”
“우리 달님반 학생선생님 이름은요, (아주 또박또박 자신있게) 김씨 현씨 숙씨.”
"하하, 손손! 그건 '김자(字) 현자 숙자' 라고 하는 거야."
<번개를 피하는 법>
엊그제 천둥 번개가 치니 제 아빠와 퇴근 무렵 통화하던 소은이.
“아빠. 번개 만지지 말고 오세요오. 번개 보이면 살살 피해서 와요.”
<옷가게에서>
남편의 겨울옷을 보려고 할인매장에 들렀는데 소은이가 옆에 진열된 속옷가게에서 날 불렀다. 아주 보드랍고 야시시한 슬립을 손에 들고 하는 말.
“엄마는 이런 거 안 입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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