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한 뼘 성장드라마
작은 고추가 맵다 본문
사흘 전, 오후 한 시가 조금 넘어서 곧 소미가 돌아오겠다 싶었는데 전화가 왔다. 그런데 “여보세요…”하더니 끊어지고 다시 전화가 왔으나 “여보세요. 소미…”하다가 또 끊어졌다. 조금 더 기다렸더니 다시 전화가 왔다. 소미였다. 통학차를 놓쳤다고 “엄마가 데리러 오세요” 한다. 이 동네 사는 같은 반 친구 이수하고 노느라고 놓쳤다는 것이다. 난감했다. 늘 세워져 있던 차가 그날따라 남편이 쓰겠다고 가져가버렸기 때문이다. 할 수 없이 이수 어머니께 전화를 했더니 다행하게 흔쾌히 다녀오시겠다고 했다.
군인아파트는 대부분 애매하게 외진 곳에 있다. 이곳은 학교도 모두 좀 먼 편인데다가(버스로 15분가량) 학교를 거치는 일반 시내버스가 거의 없어서 더욱 특별한 교통대책이 필요하다. 그래서 아이들은 아침에 아파트단지 입구에서 기다리는 넉 대의 군인버스에 나누어 타고 등교한다. 넉 대의 버스는 저마다 학교 노선을 달리하는데 그중 가장 나중에 출발하는 작은 버스가 소미네 학교로 간다. 이 버스는 아이들 하교시간에 맞춰 학교 앞에서 다시 운행되기 때문에, 1학년 아이를 둔 부모들은 한결 안심이 된다. 집 앞에서 태워서 학교 문 앞까지 데려다 주고 다시 데려오고 하니, 걸어 다니는 아이들이나 일반버스를 이용해야 하는 아이들 부모보다 걱정을 덜 수 있다.
그러나 이 특별한 버스를 타는 아이들은 차 시간을 놓치면 그야말로 난감하다. 꼼짝없이 엄마가 데려다 주거나 데리고 와야 하는 형편은 누구나 같다. 특히 소미네 학교의 경우 아이들이 버스를 놓쳤을 경우 돌아올 수 있는 방법은 그 먼 거리를 걸어서 돌아오거나 큰 길까지 걸어 나와서 택시를 타야 한다. 이런 애로사항이 있어서 소미 혼자 버스를 타고 오가게 되면서 시계를 채워 시간을 잘 지킬 것을 여러 차례 일렀다. 아직 분침까지 정확하게 시계를 볼 줄 모르지만 크게 한시, 두시 이런 정도는 알기 때문에 꼭 1시 차를 타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놓친 것이다.
소미는 아직 1학년에겐 급식을 하지 않는 학교에서 돌아와 너무나 배고파했다. 일단 밥부터 먹여놓고 어찌된 일인지 자초지종을 물었다.
“엄마, 우리는 시간에 맞춰 갔는데 버스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조금 놀면 오겠지 해서 학교 안으로 들어와서 좀 놀다가 가봤더니 버스가 간 거예요.”
“그럼 다른 애들은?”
“다른 애들은 타고 갔죠.”
“학교 깊숙이 안으로 들어가서 놀면 안 되지. 버스가 왔는지 알려면 교문 가까운 쪽에서 놀면서 기다려야지.”
“그러면 재미없단 말이예요. 교실 옆쪽 놀이터에서 놀아야 재밌는데요.”
“그래도 다음부터는 버스가 없더라도 꼭 교문 주변을 떠나지 말아야 돼. 알았지?”
그런데 난 사실 그게 궁금한 게 아니었다. 아직도 낯선 학교에서 동전도 카드도 없는 소미가 어떻게 전화를 찾아서 집으로 걸었을까가 더 궁금했다.
소미는 먼저 자기 뇌에게 ‘울면 안돼’하고 말했단다. 내가 “그렇지. 잘 했어”하고 추임새를 넣자, 그때부터 신이 나서 재잘재잘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소미는 이수와 손을 잡고 선생님께 공중전화가 어디 있는지 물었다고 했다. 그러나 동전도 카드도 없기도 하고 처음 이용해야 하는 공중전화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다시 선생님께 묻자니 좀 미안한 생각이 들어서 지나가는 상급반 언니를 한 명 붙잡아서 물었단다.
“그 언니가 참 친절했어요. 1541 콜렉트 콜 그거 하는 방법 가르쳐줘서 저 혼자도 할 줄 알아요. 그리고 두 번이나 전화가 끊어졌어도 다시 해주었어요. 그 언니 정말 착하드라.”
“와! 우리 소미 정말 대단하다. 울지도 않고 정말 잘했어. 그래, 울면 아주 쉬운 우리집 전화번호도 생각나지 않는 거야. 뇌가 소미 말을 잘 듣네. 정말 기특하다. 엄마라면 당황했을 텐데 그렇게 똘똘하게 잘 할 줄 몰랐는 걸. 끝내준다 우리 소미!”
하지만 나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조금 더 문제해결능력을 시험할 요량으로 짓궂게 다시 물었다.
“근데 소미야. 만약 엄마가 집에서 전화를 안 받으면 어떻게 할 건데?”
“그럼 이수네 집으로 하면 되죠 뭐.”
“이수 엄마도 안 받으시면?”
“그럼 엄마들 핸드폰 다 있으시니까 핸드폰으로 하면 되죠.”
“그런데 그 핸드폰도 무슨 사정이 있어서 두 엄마 모두 안 받으면?”
“음, 그럼… 아빠들한테 하죠.”
“아빠들도 일하시느라 바빠서 안 받으시면?”
여기까지는 아주 좋았다. 정말 이 문제만큼은 걱정 안 해도 되겠다, 위기관리능력이 나름대로 있구나, 대견하다 하고 있는데 그 다음 대답이 압권이다.
“음, 그럼 선생님한테 군인버스 불러 달래죠 뭐!”
크크! 웃으면서도 뿌듯하고 기특하고 대견한 마음이 들어 몇 차례 칭찬을 더 했다. 110센티가 될까 말까한 작은 키에 18킬로그램의 몸무게, 가느다란 손목과 다리, 좁고 가녀린 어깨에 큼직한 가방 메고 나서는 모습이 아침마다 짠한데, 입학한 지 보름 된 1학년생이라면 충분히 당황할 수 있는 형편에서도 씩씩하게 대처한 모습이 참 이쁘고 믿음직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야겠다. 그리고 여러 모로 염려하고 간섭하기보다 좀 믿고 두고 보는 게 좋겠다 싶었다.
그리고 나는 소미의 학교가 점점 마음에 든다. 무엇보다 소미가 즐거워해서 마음에 들고 엄마들을 전혀 신경 쓰지 않게 해서 마음에 든다. 학부모총회에 위임장만 보내놓고 그날 오후 학교에 다녀온 한 엄마에게서 들었던 말과 소미에게서 들은 말을 종합하니 모두 맘에 든다.
1. 현재 교실 청소는 고학년 언니 오빠들을 데리고 담임선생님이 직접 하신다.
2. 학교 급식에 엄마들의 손이 필요하지 않게 했다.
3. 각 가정의 연락처가 있는 인쇄물을 주실 수 없냐는 한 엄마의 말에, ‘어머니들이 비상연락망이 있으면 안 하셔도 될 일들(돈을 걷어서 뭘 도모한다거나 하는 것들)을 하시는 경우가 있어서 잡음이 생기니, 그야말로 비상연락망 본래 취지에 맞게 여름방학에만 학생들에게 나누어주시겠다'고 하셨단다.
4. 학생을 위한 상담에 ‘부모님 오시라’하는 일은 거의 없고, 부모가 원할 경우는 수업이 끝난 오후에 언제든지 가능하다.
‘작은 학교가 꽤 야무지다’는 생각이다. 벌써부터 이 학교에서 졸업시킬 수 없다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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