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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정원

진지한 농담

M.미카엘라 2006. 9. 30. 01:46
 

오늘 소은이가 이웃집 아주머니에게

다섯 개 들이 연필 한 세트를 선물 받고 내일 학교 갈 준비를 합니다.

드르륵드르륵 연필깎이에 연필을 넣고 돌리는 소리가 납니다.

방에 들어가 보니 소은이는 벌써 선물 받은 새 연필을 뜯어서

세 자루씩이나 드르륵 다 깎아 막 필통에 집어넣고 있었습니다.


“손손, 너 새 연필을 그렇게나 많이 깎았어? 쓰던 건 어쩌구 새 연필만 담아?”

“연필 없단 말이예요. 세 자루밖에 안 깎았어요.”

“세 자루 밖에? 그거 오늘 선물 받은 연필의 반이 넘는 개수야.”

“쓸 게 없어요.”


저는 책꽂이 옆에 있는 연필통을 쏟았습니다.

거기서 와르륵 쏟아져 나온 연필들입니다.

 

 

저렇게 많이 두고도 쓸 게 없답니다.

볼펜 깍지에 끼워 쓰지 않고도

아직 쓸 만한 길이의 연필이 번히 보이는데도

그걸 챙겨 넣고 새 연필을 아껴서 갈무리해 둘 생각은 없어 보입니다.


소은이를 재우고 연필을 깎으며 생각했습니다.

‘이건 음모다!’

흐흐, 음모가 분명합니다.

‘연필깎이’는 연필회사의 음모입니다.


요즘 아이들이 아무리 물건 귀한 줄 모르고 아낄 줄도 모르고

잃어버려도 도대체 찾을 생각을 안 한다지만,

사실 이렇게 연필을 헤프게 만드는 범인은 바로 연필깎이이기 때문입니다.


연필깎이로 연필을 깎으면 끝이 너무 뾰족해서 잘 부러지고

아이들이 드르륵 돌리는 재미에 적절한 시점에서 멈추지 않고 마구 돌리다보면

깎으면서도 무수히 부러져 금방 몽당연필이 되어버립니다.


요즘은 칼로 연필을 잘 깎는 아이들을 보기가 힘듭니다.

아이들이 서툴게나마 손을 움직여 칼로 연필을 깎아서 쓴다면

소근육 발달은 물론 뇌발달에도 도움이 된다고 하는데 말이지요.

머리는 손과 가장 친해서 손이 움직이면 머리도 친구 따라서 활발해진다고 합니다.


엄마들도 요즘은 바깥일을 하지 않는 분들도 여러 가지 스케줄로 공사다망하시고

적지 않은 돈 주고 사다놓은 연필깎이가 자기 본연의 임무(?)를 할 수 있게 돕느라

좀체 아이들 연필 깎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칼로 깎아서 쓰면 확실히 연필이 마딥니다.

제가 해봐서 압니다.

12자루 한 다스를 꽤 오래 쓰지요.


결론적으로 연필회사로서는 연필깎이가 효자라는 생각에 여간 고맙지 않을 것입니다.

하긴 연필깎이는 연필회사에서 만들어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분들은 연필깎이로 깎으면 연필이 헤퍼진다는 것을 미리 알았을까요?

분명히 알았을 테지요?

회심의 미소를 지었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탐정도 아니면서

다른 분들은 이미 다 아는, 그래서 사실 시답지 않은,

그런 작은 깨달음을 두고 이렇게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양

이 밤중에 혼자 연필 깎으며 무릎을 칩니다.

이런 제 모습이 웃기시다면 뭐… 웃으셔도 괜찮습니다.


다만 한 가지.

저기 저 ‘음모의 결과물’로 짧아진 몽당중생들을 구제하는 방안에 대해 고민하던 끝에

전국에 계신 여러 독자님들께 볼펜 깍지를 모아주실 것을 부탁드리기로 했으니

웃어서 좀 미안하신 분들,

그리고 각계각층 뜻있는 분들의 후원을 기다리겠습니다.


지금까지 솜손네 집은 겨우 두 개의 볼펜 깍지를 가지고 쓰는데

나날이 늘어나는 몽당연필의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고

계속 새 연필을 과소비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습니다.


전통 깊은 국민볼펜인 ‘모나미153’의 깍지가 가장 제격이지만,

연필 꽁지를 적당히 깎아서 끼울 정도의 볼펜깍지면

그 어떤 모델이라도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단, 저의 갸륵한 절약정신을 이쁘게 보시고는

꼭 한 자락 성원을 보내고 싶으신 욕심에

멀쩡하게 잘 나오는 볼펜의 목을 비트는

무모한 후원은 하지 마시라는 간곡한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아, 또 한 가지…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소포 값은 들이지 말아주세요.

그냥 혹여 저희를 만날 기회가 있으실 때

한 개나 두 개 이렇게 챙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솜손의 가족을 아껴주시고 채찍질 해주시는 여러분,

모두 추석 잘 보내시고 좋은 기억으로 이 투명한 가을날을 수놓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때때로 일가친척 집에서 굴러다니는 다 쓴 볼펜 어디 없나

주위도 열심히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추석 지나서 뵙겠습니다. 꾸~벅^^


2006년 9월 29일 밤

솜손 에미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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