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한 뼘 성장드라마
유물의 완성 본문
5학년 소미는 취향이 좀 ‘노땅’ 같은 데가 있다. 좋아하는 것들이 요즘 아이들과 살짝 비껴나 있는 것들이 몇몇 된다.
이 애가 좋아하는 음식은 한정식이다. 따뜻한 맨밥에 토속적인 반찬이 많은 상차림을 제일 좋아하고 젓갈이나 장아찌 같은 것도 즐겨먹는다. 한복을 아주 좋아해서 클 때까지 계속 몸에 맞는 한복을 사달라고 하고, 박물관을 가는 것을 좋아하고, 도시에서 사니까 자기는 주말에는 가끔 멀리 자연의 기운을 쐬고 와야 기운이 나기 때문에 이 다음에 수녀님 되어 산골에서 집 지어서 살겠다고 하고, 책도 <100년 전 아이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같은 것을 골라 사고, 6,70년대 생활상이 아주 재미있는 만화영화 <검정고무신>을 거의 외다시피 하며 열광한다.
그리고 도시 한복판에서 옛 물건들이 숨 쉬는 인사동. 우리 집 두 아이는 여기만 가자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다. 지지난 주에 멀리 미국에서 다녀가신 jj님을 뵈러 인사동 경인미술관에 갔던 날. 비가 주척주척 내려서 다니기 궂은 날이었지만 아이들은 신났다.
완전히 인형 같은 7개월 된 jj님 외손녀에게 정신이 나가 이리저리 안아보고 핸드폰 사진을 찍느라 바빴고, 베로니카 할머니(jj님을 우리 애들은 그렇게 부른다)가 풀어놓으시는 크고 작은 선물에 입이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 거기다가 인사동 나들이 때면 내게 빠지지 않고 ‘기념품 사주기’를 강요하는데 이미 허락까지 해놓은 터였으니, 비가 온들 폭풍우가 친들 아이들은 귀찮을 일도 꿉꿉할 일도 하등 없는 그런 날이었다.
기념품.
어딜 가도 우리 딸들은 기념품에 목숨 건다(^^). 인사동 한두 번 온 것도 아니고 때마다 무슨 기념품인지 그날도 나는 알면서도 또 허락했다. 그런데 소미가 고른 물건이 흥미롭다. 인사동엔 여자아이들이 갖고 싶어 할 아기자기한 예쁜 물건들이 좀 많은가. 소미는 그 어려운 선택 속에서 ‘조선시대 미니유물 발굴터’라는 것을 골랐다. 나도 처음 보는 건데 네모난 진흙(색깔은 푸른색이었지만)을 같이 들어있는 도구로 파 들어가다 보면 아주 작은 미니어처 유물이 나온다는 얘기다. 값은 무려 1만 5천원. 재미있어 보이지만 그래도 좀 비싸다 싶어서 만류하고 싶었는데 이미 언니가 계산한 후였다.
집에 돌아와서는 ‘우리의 고고학자 솜솜’양은 본격 발굴에 들어갔는데, 개성 없이 열쇠고리 두 개를 산 손손 양이 눈치 없이 한 축 끼어들고 싶어하면서 발굴기간 내내 날마다 시끄러웠다. 그러게 넌 왜 또 열쇠고리냐, 그러고도 이렇게 끼어들어서 나만의 재미를 망가뜨리냐 하면서 소미가 분통을 터뜨리는 가운데 하루에 한 개씩 나흘간에 걸쳐 발굴은 끝이 났다.
내가 무슨 고고학자들이 그렇게 성미 급하냐, 유물발굴이 얼마나 시간 걸리고 정교한 작업인데 천천히 좀 해라, 하였더니 그나마 나흘 걸린 것이다. 아까워서 하루에 한 개씩 하면서도 발굴해야 할 유물이 네 개뿐인 걸 너무 아쉬워했다. 물에 씻어 깨끗이 정리한 유물은 고무레, 호미, 백자, 청자였는데 아주 작아서 앙증맞고 귀여웠다. 고므레와 호미는 진짜 쇠고, 백자 청자는 진짜 도자기다.
그런데 ‘우리의 고고학자 솜솜양’의 유물발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유물을 유물로 두지 않고 완성시키는 작업을 하였는데, 찰흙으로 작은 사람을 만들어 발굴한 유물을 그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 것이다. 고므레 들고 서있는 농부, 호미로 김매는 아낙, 물동이를 이고 가는 누이, 도자기를 든 소년. 나는 찬탄을 하며 칭찬을 했다. 너무 기발한 생각이었고 꽤 섬세했다. 밀짚모자 쓴 농부하며, 수건 쓴 아낙… 그리고 머리와 몸통 사이, 몸통와 다리 사이는 이쑤시개를 작게 잘라 속에 꽂았다.
나는 집에 혼자 있으면 지금도 텔레비전 위에 올려놓은 이 농부가족에게서 무슨 이야기가 들리는 것 같다. 몇 년 전 유물인지 몰라도 그때 살았던 사람들이 아닐까 싶고 그들의 이야기가 새삼 궁금해진다. 타임머신이라도 있으면 타볼 건데(^^) 귀를 조금 더 기울이기나 해야겠다. 장난감 유물들에 새로운 생명과 이야기를 만들어준 소미가 너무 사랑스럽고 귀여운 사건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