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한 뼘 성장드라마
VVIP의 자세 본문
나 이러다 구제불능 자랑쟁이 되겠다. 최근 좋은 일이 많아서 자랑을 늘어지게 했는데 6월 들어서자마자 또 즐거운 일이 생겼다. 그래도 우리 아이들에게 추억이 되는 일을 이 ‘성장일기장’에 빠뜨릴 수 없는 일. 그래서 또 이 야심한 밤에 자랑 시작이다. ^^
나는 블로그를 8년 넘게 하다 보니 이런저런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다. 이 방의 성격상 특히 '솜손'은 많은 분들의 사랑과 배려, 덕담 속에서 자랐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데 때로는 선물을 주시는 분까지 계신다.
어제는 한 블로거님이 클래식 음악회 입장권을 선물해주셨다. ‘자비네 마이어’라는 독일 출신의 클라리넷 연주자의 내한공연이었는데 티켓을 받아들고 보니 세종문화회관 VVIP좌석이었다. VIP야 많이 들어보았지만 VVIP라니, 예사로운 자리가 아니겠구나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 대규모 공연장에서 연주자가 코앞에서 보이는 특급좌석이었다.
잠시 거기서 VVIP의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 걱정이 생겼다. 정확히 말하면 소은이를 걱정했다는 편이 맞다. 귀에 익숙한 대중음악도 아닌데 사브작사브작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이 아이를 어떻게 가만히 있게 만들까. 다행인 건 자칭 ‘극장 울렁증’이 있는 소은이는 영화관엔 죽어도 안 가고 싶어해도 이런 공연장은 아주 좋아한다는 점. 일명 라이브(Live), 말하자면 날것을 좋아한다고나 할까. 지난 번 조카의 작곡데뷔 때 그 난해하고 지루한 현대음악도 잘 참고 들었다.
다만 넘치는 감사 속에서도 정말 애석했던 건, 우리 세 모녀가 가장 좋아하는 클래식 음악인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 A장조>가 이틀간 공연 프로그램 중 바로 전날의 레파토리였단 점이다. 이 곡이 오늘 프로그램이었다면 얼마나 더 좋을까 하면서 안타까워했더니 소은이가 이런 대답으로 나를 잠시 부끄럽게 했다.
“오늘이면 어때요? 이것도 감사해야죠.”
소은이는 그 의젓한 말만큼 긴 시간의 공연을 꽤 잘 참아냈다. 길고 늘씬한 자태가 인상적인 아름다운 자비네 마이어가 등장할 때부터는 꼼지락 대는 것도 잊고 꽤 몰입한 듯 보였다. 두 팔을 머리 위로 쭉 뻗어 힘차게 박수까지 쳤다. 옥의 티라면 프로그램 끝 곡에서 살짝 졸았다는 것.^^
소미는 이미 ‘VVIP의 자세’가 딱 되어있었다. 얌전하게 앉아서 잘 감상할뿐더러 어느 때보다 박수를 즐겁게 쳤다. 다만 흥에 겨워 끝 곡이었던 베토벤 4번 교향곡을 들을 때 교향곡이 4악장이라는 것을 깜빡 잊고 협주곡 때처럼 3악장 끝날 때 박수를 치고 말았다. 무안하고 민망해서 어쩔 줄 모르는 소미의 귀에 대고 나는 빠르게 속삭였다.
“솜솜, 괜찮아. 다른 사람들도 제법 쳤는데 뭘.... 엄마는 옛날에 모두 조용한데 엄마 혼자만 짝짝짝 친 일도 있어.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뭐.”
히힛… VVIP 자세가 따로 있으랴. 실수할까 긴장하여 음악을 즐기지 못하는 것보다, 흥겹게 즐기다보니 깜빡 번지수 놓쳐 박수치는 일이 차라리 낫다.^^ 다 보고 나오는데 소미가 그때까지 기분을 회복하지 못한 것 같아서 다시, 감상에티켓이란 게 있긴 하지만 그래도 음악 감상의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관객이라고 말해줬더니 좀 풀리는 것 같았다. 또 하나 다행인 건 수다쟁이 소은이가 타이밍 딱 맞춰 이 때 살짝 조는 바람에 언니의 실수를 못 보고 지나갔단 점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소미로선 자존심이 덜 상하는 일이다. ㅎㅎ
솜손은 많은 공연장을 갔지만 세종문화회관은 어제가 처음이다. 우리나라 최고의 공연장이라 말해주니 소은이는 ‘역시 웅장하다’고 한다. 세종문회회관 공연 보기가 어디 쉬운가. 좋은 좌석에서 보자면 아무리 좋아하는 공연이라도 결심이 쉽지 않다. 우리 딸들에게 이 드문 기쁨을 처음 맛보게 해주신 블로거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솜손에겐 이 새로운 경험이 오래오래 추억 속에 남길 기대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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