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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학교

특별한 음악회

M.미카엘라 2008. 5. 9. 11:10

 

 

수철아.

사람에게 기회는 아주 우연히 온다고 생각해. 사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기회’라기보다 ‘계기’에 더 가까운 건데, 어떤 것을 좋아하게 되거나 더 나아가 마니아가 되는 일은 생각보다 아주 사소한 계기에서 시작되지. 팝송과 가요만 내내 들었던 내가 고전음악을 지루해하지 않고 살짝 즐기게 된 계기도 아주 사소하게 시작되었어.

 

학교 졸업하고 난 후였을 거야. 텔레비전의 모 회사 시계광고에서 머릿속이 다 시원해지는 왈츠곡이 흐르더라. 어둡고 우울한 방의 커튼이 갑자기 활짝 열리면서 강렬한 빛이 그 방안으로 흘러드는 그런 연상이 되는 왈츠곡이었어. 누구나 귀에 익은 요한 시트라우스 왈츠는 아니고 이 음악이 무엇일까 나는 그때부터 집착하기 시작했어.

 

요즘같이 인터넷으로 검색해볼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나는 무작정 그 음악이 내 귀에 포착되는 그 순간을 기다리며 고전음악이 하루 종일 흐르는 KBS 1FM을 틀어놓고 살았다. 그런데 지성이면 감천이라 하지 않니. 나오더라 어느 날. 나는 미친 듯이 메모지에다 그 곡목을 받아 적었지. 그건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였어. 1악장 중에 잠시 햇살처럼 반짝이는 소절이 내가 그토록 찾던 그 부분이었던 거야.

 

그때부터 차이코프스키 음악을 시작으로 조금씩 고전음악을 듣기 시작했어. 그렇게 조예가 깊은 건 아냐. 여전히 지루하지 않을 정도의 취향밖에 안 되지만 내게 그 경험은 아주 소중하지.

 

수철아.

어제 예술의 전당에서 초연된 네 작품을 들으며 난 그때를 떠올렸어. 어제의 창작곡들이 우리가 잘 아는 모차르트나 비발디, 베토벤, 하이든 같은 바로크, 고전, 낭만파 음악가들의 음악처럼 편안하고 기분 좋게 해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쩌면 너로 인해 내가 현대음악에 귀 기울이는 ‘계기’가 될 수 있겠다고 말야. 그래도 ‘내 조카 음악인데…’하면서 몰입하게 되는 것이 시작 아니겠니.

 

 

 

 

현주고모나 나는 단순해. 우린 네가 영화음악이나 드라마음악, CF음악 같이 많은 팬이 생길 수 있는 편안한 대중음악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 속으로 있지만, 그건 그냥 영화나 드라마를 많이 보고 좋아하는 우리들 취향에 유명한 조카를 두고 싶은 솔직한 바람이 더해진 것이다. ^^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현주고모랑 그 얘기했다.

 

모차르트나 베토벤의 음악이 그 시대의 트렌드에 맞는 당시 대중음악 아니었겠냐 사실, 모차르트나 베토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도 만드는 곡마다 인기몰이를 하는 작곡가 김창환과 김형석, 영화음악 만드는 이병우, 이문세 최고의 파트너였으나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이영훈, 토이의 유희열 같이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 음악을 만드는 사람들도 생각해보면 참 대단하다, 수철이도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 그런 곡을 썼으면 좋겠다....뭐 그런. ^^

 

암튼 너는 어제 아버지 엄마에게 최고의 어버이날을 선물한 거야. 다른 날보다 훨씬 이르게 목장의 소들 저녁 젖을 짜놓고 서둘러 준비하고 나왔을 내 오빠와 올케언니를 보니 난 그냥 짠하더라. 얼마나 설레고 좋았을까 싶었는데 그게 왜 짠한 기분과 맞물렸는지는 나도 모르겠어. 네가 이 곡을 작년 가을에 갑자기 돌아가신 큰아버지를 추모하며 썼다는 말을 들어서일까? 어쨌든 손님과 인사하기 바쁜 너를 붙들고 사진 찍기 쑥스러워하는 오빠와 올케를 억지로 네 곁에 데려다놓고 사진 찍어주길 잘했다 싶다.

 

 

 

소미소은이는 가장 나이 어린 관객이었지. 작곡가들로 보이는 지긋한 연세의 어른들과 대학생으로 보이는 관객이 주를 이룬 가운데, 관객 평균 연령 확 낮춰준 솜손에게 좋은 경험을 해주게 해서 고마워. 근데 소은이의 감상은 어땠는지 아니? “연주를 할 거면 확 하고 안 할 거면 말지, 그 큰 악기(아마도 더블베이스 연주자를 두고 하는 말 같다)를 갖고 끝까지 작은 소리로 찡찡찡찡 하다가 들어가냐. 어후 답답해!” ㅋㅋ 소은이다운 감상 아니냐?

 

그래도 옆자리에 앉은 네 형의 핸드폰이 진동으로 울린 걸 두고 나중에 “오빠는 음악회 때 핸드폰 꺼두는 에티켓도 몰라?”하며 따끔하게 지적을 했던 소미도 있으니 괜찮지 않냐? 음악회 에티켓을 아는 아이는 이제 시작이야. 오빠의 작품을 감상할 준비와 자격을 갖추었단 말씀. 그러니 너는 열심히 창작을 하거라.(한석봉 엄니 버전 ^^)

 

나는 무엇보다 솜손이 아담한 리사이틀 홀에서 그것도 꽤 앞좌석에 앉아 악기의 면면을 아주 자세히 볼 수 있었던 점이 좋았겠다 싶어. 아니나 다를까 서서 치는 실로폰 같은 악기 이름이 뭐냐 묻더라. 마림바 말야. 맑은 그 소리 나도 참 좋던데.

 

  

                            

 

 

암튼 너무 즐거운 저녁이었어. 그리고 우리 집 꽃 천지 된 거 아니? “수철이 오빠 여자 친구들한테 인기 많나봐”했던 소은이. 네가 여자 친구들에게 받은 많은 꽃이며 케이크를 다 어쩌지 못하고 우리에게 준 걸 기쁘게 생각하고 얻어들고 오는 저녁이 행복해보였지. 염불보다 잿밥에 더 관심이 많다고 아마 당분간은 오빠의 음악이 지루해도 이 꽃과 케이크 생각에 두 동생들은 오빠의 작품이 연주되는 자리라면 즐겁게 갈 거라 생각한다. ^^

 

수철아. 어제 고모부에게도 말했지만, 넌 정말 이제부터 시작이구나 싶다. 하지만 나는 즐겁게 너를 응원할 거야. 네가 ‘서울대 음대 출신’이라는 우리 사회의 대단한 프리미엄이 되는 타이틀을 갖지 않았다 해도 너의 착한 심성과 맑은 감수성이 네가 가진 음악적 재능으로 아름답게 구현될 거라고 믿기 때문이야. 겸손한 너, 이런 내 말이 부담된다 하는 말은 마. 지금 그 모습 그대로 우리 솜손에게도 좋은 멘토가 되고 있으니...

 

 

 

아침에 네게 메일로 보내려던 편진데 쓰다보니 길어졌다. 이거 그냥 블로그에 올릴게. 솜손의 어제 일기처럼 보이지 않니? 끝으로 소미가 오늘 아침 밥을 먹으며 했던 말 하나 더 전하며 이 편지를 줄일게.

“엄마, 수철이 오빠 어제 입은 하얀 자켓 참 잘 어울리지 않아요?”

 

 

(*추신: 어제 어버이날 내가 받은 솜손의 편지를 구경해다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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