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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정원

집중 또는 몰두

M.미카엘라 2011. 1. 31. 01:19

 

 “맞아요. 저희도 그랬어요. 저희 언니와 형부가 와서 살다시피 하면서 낮엔 그냥 온 식구가 뭉쳐서 여기저기 미친 듯이 저희도 다녔어요. 여행도 가고 공연장도 가고 백화점도 가고 시장도 가고 그러면서 밥도 안 해먹고 맨날 뭉쳐서 외식하고 그러면서 한두 달을 보낸 것 같아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시간을 견딜 수가 없었을 거예요.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 좀 나아질 거다 말하지만 그건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이 그럴 거라고 추측하는 거죠. 저는 지금도 제사가 있는 달은 한 달 내내 울어요. 아들을 잃은 소미 이모님은 이루 말할 수 없으실 거예요.”

 

4년 전에 다정했던 남편을 떠나보낸 소은이 피아노 선생님 말씀이다. 그 사고 이후, 선생님은 소은이한테 맨날 “이모는 어찌 지내시냐? 소은이 네가 잘해 드려라”하며 매일 당부 하신다는데, 엊그제 만나 뵈니 다시 깊은 데서 우러나는 진심어린 마음을 나누어주신다. 내가 맨날 언니와 우리 세 모녀가 여기저기 함께 돌아다니고 뭐든 일을 만들어서 하고 그러면서 지낸다니까 저런 말씀을 하신 것이다.

 

우리의 요즘 슬로건은 ‘뭐든 하자!’다. 네 명이 똘똘 뭉쳐서 미친 듯이 어딜 다니고 뭘 만들고 이상하게 허한 속을 달래느라 이것저것 먹어댄다. 사정 모르는 사람들은 얼굴 좋아졌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괘념치 않는다. 그런 와중에 얼마 전 내 친구가 신년 선물이라며 돼지고기 큰 덩어리 하나와 아주 예쁜 다이어리 두 권, 그리고 ‘예쁜 카드 만들기’ 책 세 권을 퀵 서비스로 보내왔다. 가게 하는 동생 덕분에 생긴 고기라는데 돈가스나 장조림 해먹기 좋을 것 같아서 우리 집 생각이 났단다.

 

그런데 고기도 고기지만 우리를 사로잡은 건 세 권의 카드 만들기 책이다. 책띠에 쓰인 ‘꽃이 되고 싶은 종이’라는 홍보문구에 알맞게 종이로 정말 너무나 예쁘게 만든 카드들이 가득했다. 우리 넷은 감탄을 하다가 눈을 반짝이며 ‘우리도 이거 만들어보자’ 의견일치를 보았다. 언니는 솜손에게 재료를 몽땅 사주겠다고 하고 우리는 거기서 준비하라는 재료들을 구매하러 큰 문구점에 갔다. 색색깔 예쁜 종이들, 목공용 풀, 커팅 매트, 발포테이프, 파운스 윌, 송곳, 카드봉투, 모양 펀치, 콜크판 등 인터넷가게와 주변 오프라인 가게를 샅샅이 뒤져 샀다. 하얀 카드에 덜렁 공단리본 하나 붙여놓고 가격 4천원이 붙은 카드를 보고 어이 없어하며, 우린 재료값 딱 3일이면 뺀다, 그 다음부턴 돈 버는 일이다..... 뭐 이러면서 거기에 몰두했다. 큰 상을 펴고 머리를 맞대고 온 거실을 어질러놓으며 카드생산에 들어갔는데, 만들어놓고 서로 감탄하고 칭찬했다.  

 

 

   

 

   

 

   

 

 

아이들의 에너지는 참 고맙다. 솜손 없이 나와 언니 둘만 있다면 책을 보고 ‘이쁘다’하기만 했을 뿐, 진짜 만들어보자고 덤비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들기 신공’들인 솜손 때문에 ‘만들기 전설’인 이모가 더 기운내서 ‘우리 함 만들어볼까?’하게 된 것이다. 아이들은 즉각 호응했고 너무 즐거워했고 이모랑 있는 걸 행복해했다. 소은이는 오후엔 이모랑 카드 만들려고 그날 하루 해야 할 일을 오전에 부지런히 해놓고 기다리고, 하는 것도 없이 맨날 늘어져 피곤하다며 겨울잠 자는 곰돌이 같은 소미도 카드 만들자면 좋아한다.

 

언니는 만든 카드를 일 시작하면 고객 감사용 카드로 쓰겠다고 하더니 마음을 바꾸었다. 이번 큰 일 치를 때 찾아주신 분들에게 감사카드를 보내겠다고 했다. 오신 분들 모두 주소를 알고 있지는 못하지만 멀리서 와주신 분들에겐 되도록 빠짐없이 보내고 싶다고 한다. 나는 좋은 생각이라고 말했다.

 

우리 언니 참 대단한 사람이다. 나는 사실 그 일 이후 언니를 다시 보게 되었다. 나 같으면 이성을 잃고 억장이 무너지는 슬픔이 합리화해줄 그 어떤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했을 일도, 현명하고 지혜롭게 풀어간다. 무엇이 최선인지 생각하고 힘들더라도 최선의 길을 가려고 하는 모습에서 보았다. ‘난 이제 세상에 무서울 게 없다. 이보다 더 나쁜 일이 또 내게 일어나겠냐’며 삶에 대해 비장한 결기를 드러내지만, 나는 언니의 그 말 너머에 있는 마음을 읽는다. 이런 언니를 두고 ‘강하다’ ‘씩씩하다’ 혹은 ‘독하다’고 행여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잘못 안 거다. 언니는 강하고 독한 게 아니라 사람에 대한 배려심과 따뜻함이 넘치는 사람이다. 이제 하나밖에 없는 자식을 잃고 자기만 생각하며 좀 이기적으로 살아도 좋은 사람이지만 절대 그럴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럴 수 없는 사람이라 이렇게 카드를 만들고 우체국을 간다.

 

피아노 선생님을 뵙고 우리는 종이와 다른 재료를 더 사러 다시 문구점을 찾았다.

“아무것도 안 먹고 그냥 잠만 자고 그럴 수도 있어. 그게 더 쉬운 일인지 몰라. 근데 그러다간 우울증으로 바로 넘어갈 거야. 그렇게 되면 못 일어날 것 같애. 내게 남은 이 부조금이 장례비용이 아니라 치유비용이 아닌가 해.”

피아노 선생님 말씀을 전한 끝에 언니가 한 말이다. 그냥 고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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