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한 뼘 성장드라마
내려놓음 VS 들어올림 본문
“엄마, 교복 치마 세탁소에 맡겨서 길이 좀 다시 늘여주세요. 늘일 수 있는 데까지.”
“아니 왜? 기껏 줄인 걸.”
“짧으니까 아침에 교문 앞에서 걸리고, 에이 귀찮기만 해.”
“교문 들어갈 땐 골반에 걸쳐 입으면 된다더니 참 별 일이다. 이런 날도 있네.”
“에휴~ 내가 교복 치마 짧은 걸로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다 귀찮아졌어요.”
“벌써? 너무 빠른 거 아냐?”
“엄마, 요즘 우리 반 애들 머리 다 짧게 자르는 추세예요.”
“왜?”
“귀찮대. 아침에 일찍 나오는데 감기도 귀찮고 말리는 데도 시간 걸리고. 나도 그래서 짧게 잘랐잖아요.”
“하긴 너 이번에 머리길이 짧아진 거 보고 나도 놀랬다.”
“다 놨어요. 살도, 헤어도, 미용도, 교복도.... 고등학교 들어가니까 이게 별로 부질없어. 난 야자하고 10시에 학교에서 나오는데 다 귀찮아. 이런 거 신경 쓰기에 할 일도 너무 많구.”
이게 고등학교 들어가서 1학기 지나고 나서 비교적 최근 소미와 나눈 대화다. 벌써 입시생 폐인 모드가 되어가고 있나 싶지만, 소미의 고딩 생활은 정말 다채롭게 바쁘다. 공부하랴, 수행평가 과제하랴, 동아리 활동하랴, 영상제 준비하랴, 공모전 준비하랴, 이건 뭐 몸이 서너 개라도 모자랄 것처럼 보인다. 그래도 할 수 없다. 영상동아리 활동은 자기 학교생활의 가장 큰 즐거움이고 보람이고 힐링하는 시간이라니 바빠도 줄일 수 있는 스케줄이 아닌 것 같다. 2학년까지는 이 모드로 ‘빡시게’ 갈 수밖에 없다고 말리지 말라 하신다. 말릴 생각도 없었구만 선수를 친다.
“진짜 내가 학교 하나는 잘 간 거 같애.”
이 말은 한 서너 번은 한 것 같다.
“우리 학교 진짜 빡세! 뭐 하나 그냥 넘어가는 게 없어. 그래서 좋기도 해요.”
이 말도 두어 번 한 것 같고.
“우리가 영상에 대해 생각보다 꽤 전문적으로 배운다 싶어요. 특히 우리 미드그레이(Mid grey 영상동아리 이름)에서 배우는 건 대학생 수준 이상일 거예요. 좋은 영상 기자재도 맘껏 이용하고.”
이 말도 버전만 달리 해서 두어 번은 한 것 같다.
“우리 학교는 뭘 안하고 놀려면 얼마든지 편하게 놀 수 있는 학교기도 하고, 뭘 해보겠다 하면 일반고보다 정말 바쁘고 힘들지만 보람 있게 보낼 수 있는 학교예요. 자기 적성과 주관이 없이 입학하면 적응이 어렵고 쉽게 멘붕이 되는 학교라 생각은 잘 하고 와야 돼요. ㅎㅎ”
그래서였는지 1학기를 마치고 반 친구 하나가 자퇴하면서 교실이 눈물 바다가 되었다 했다.
“학교 특성상 애들 성향이 다들 비슷해서 진짜 마음이 잘 맞고 하나같이 명랑하고 착해요. 우리 반에 오신 어떤 선생님은 ‘암튼 영상과, 특히 너희 반 수업은 리액션이 거의 방청객 수준이다’ 그랬어요. 잘 웃고 대답도 잘 하고 박수치고 활발하다고. 히히”
우리 소미를 보면 소미 같은 애들이 모인 교실의 그림이 절로 그려져 웃음난다.
“진짜 살이 안 찔 수가 없다구요. 급식이 정말 잘 나와요. 석식은 더 잘 나오는데, 그렇다고 절반만 먹을 수도 없고. 아예 굶으면 굶었지 급식실을 가서 보고는 안 먹을 수가 없어 정말.”
살찌는 것 때문에 스트레스 받고 별 짓(?)을 다하다가 결국 비만에 대한 고민 따위도 다 내려놓고 진정한 고딩으로 안착했다.
요즘은 포기할 것 빨리 포기하고 해야 할 것에 집중하려는 게 보인다.
“빅사(소은)! 내가 너 이해한다. 나도 중2 때 암 것도 하기 싫었어. 중2가 원래 그래. 근데 그렇게 노는 것도 중2 때까지만 해라. 중3 때도 놀면 너 후회해 분명.”
네가 후회해서 그런 말 하는 거냐 물었더니 조금 후회한단다. 왜 그때 그랬는지 모르겠다며, 이미 자긴 ‘(사)춘기시절’ 졸업한 걸 기정사실화했다. 진짜 그럴까?^^
요즘 소미는 참 보기 좋다. 결과야 어떻든 열심히 하고 즐겁게 하는 모습이 기특하다. 이미 영상에 대해 대단한 전문가가 된 양 열정적으로 이야기할 땐 정말 귀엽다. 네 식구가 같이 극장에서 영화보고 영화 끝나자마자 벌떡 일어나서 나가버리는 남편 따라 나온 우리는 소미에게 잔소리를 좀 들어야 했다. 동아리 샘이 엔딩 크레딧 다 올라가는 거 꼼꼼히 보고 나오랬는데 아빠 때문에 제대로 못 봤다고. 그 다음부터 우리 식구는 엔딩 크레딧 다 올라가는 거 보고 맨 마지막에 나오는 ‘훌륭한’ 관객이 되었다. ㅋㅋ
얼마 전엔 한 영상 공모전에 출품한 작품이 청소년부 우수상을 받고 기분이 한껏 고무되었다. 비록 처음 공모전 나가자고 제안한 친구가 감독에 이름을 올리긴 했지만, 팀 내 친구들이 낸 아이디어를 수렴하고 찬반 투표해서 소미 아이디어를 영상화하기로 결정하면서, 콘티 짜고 촬영까지도 자기가 하게 되었단다.
“트로피에 감독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친구 이름이라 좀 아쉽긴 했지만, 그래도 내가 만든 작품이 인정받았다는 게 정말 기분 좋아요.”
이제 1학년인데 좋은 경험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들어보니 친구들과 의견을 조율하고 함께 준비하고 뭔가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이 그대로 산 공부였다. 영상동아리의 꽃은 2학년이라며 내년에는 더 잘해보겠다며 의지를 불태운다.
“언니는 사람들하고 골치 아프게 그런 일이 하고 싶냐?”
뭔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는 일을 즐기는 소미와 달리 혼자서 사브작사브작 뭘 하는 걸 좋아하는 소은이가 한 소리 한다.
“넌 그런 생각이 안 돼. 살면서 자기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되냐? 다 여럿이 도움 주고받으며 하는 일이 대부분이지. 요리는 뭐 안 그럴 꺼 같냐? 니가 혼자 다할 수 없어”
나는 소은이 생각에 개인적으로 동조는 하면서도, 지금까지 살아보니 소미 말에 더 손을 들어주고 싶다. 근데 그냥 아무 말도 안 했다. 어차피 누가 뭐래도 다 자기에게 맞는 제 좋은 일을 하며 살 것이다. 난 그냥 두 딸이 일찌감치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찾아가고 있다는 게 마음이 한가하고 기분 좋을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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