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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추석 이야기

M.미카엘라 2000. 9. 13. 12:23
전화가 왔다 남편이 잠을 좀 잤느냐고 물었다. 소은이는 자고 있지만 소미가 안
자는데 내가 어떻게 자느냐고 했더니, 잘 보는 비디오라도 틀어주고 조금 눈 좀
붙이란다. 이른 아침결에 남편이 내 다리와 발을 주물러주는 걸 꿈결처럼 느꼈는데
참 마누라가 안되어 보이긴 했나 보다.

나는 큰며느리면서 아직까지 외며느리다. 언제쯤 동서가 생길지 지금 형편으론 알
수 없고 차례 준비는 거의 내가 알아서 혼자 한다. 만 이틀을 꼬박 준비하다보니
어머님이 돌아가신 이즈음엔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와 침대에 쓰러져 꼼짝도
하기 싫다.

사람의 직업 중엔 명절에 더 바쁘거나 고향에 갈 엄두를 내지 못하는 직업이 많은데
군인도 그런 직업 중 하나다. 부모님이 계신 집에 돌아가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남편처럼 추석날 근무를 서거나 대기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근무가 아니라도
집에 갈 엄두도 못 내는 병사들을 생각해서 중대장인 남편이 합동차례상
봐준다고 서둘러 나가는 날이 또 오늘 같은 날이다.

그러니 며느리 되는 가족들만 집으로 가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는 아예 생각을 달리해
어머님을 오시게 한다. 이곳에서 살기 시작한 2년 전부터 아들이 군 생활하는
동안은 우리 집으로 오셔서 명절이나 기제사를 지내시기로 한 것이다. 따라 이번에도
추석 이틀 전 오후에 어머님과 도련님이 오셨다.

나는 내 손에 익은 살림으로 차례 준비하는 편이 훨씬 편하다. 어머님 집으로 가더라도
어차피 내가 해야하는데 살림하는 여자들은 다 아는 일이지만 그럴 땐 불편한
점이 많다. 친정에서 히히 낙낙 명절이 즐겁기만 한 막내였던 내가 뭘 배웠을까마는,
새언니들이 부쳐놓은 파전을 낼름 집어먹으며 건성 어깨 너머 본 눈썰미로
그냥 열심히 한다.

어머님은 외손주 보는 일에 너무 지쳐 계셨다. 그리고 얼마 전에 무릎을 좀 다치셔서
앉았다가 일어날 때 어려움을 겪으셨다. 나는 전에도 그랬지만 이번엔 더더욱
어머님 도움을 생각지도 않았다. 더구나 추석 전날엔 남편과 도련님, 어머님이
아버님이 계신 대전 국립묘지에 다녀오셨다. 소미를 데리고 가려고 했으나
소은이는 제 언니가 없으면 나한테 붙어서 징징대길 잘해서 둘다 두고 가시라
했다.

이래저래 악조건 아래서 아이들을 데리고 식혜, 수정과, 전 두 가지를 부치니 오후
해가 저물어갔다. 그리고 좁은 집안에서 또다시 종종종종. 그래도 우리 효녀 소은이가
낮잠을 3시간 반쯤 자주는 바람에 큼직한 전기 프라이팬까지 내놓고 전
부치기 역사(?)를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소미는 내 옆에서 그림 그리며 말동무를 해주었다.
"엄마, 뚝딱이도 추석이라서 한복 입었나 봐. 솔이처럼. 근데 나는 언제 한복 입어?"
"엄마, 동구랑땡 진짜 잘 만든다. 참 맛있다."
"그런데 할머니하고 삼촌은 왜 안 오시는 거야."

이번처럼 체력이 달리는 일은 일찍이 없었다. 두통이 괴롭힌 일도 처음이고 일을
해도 해도 아마득한 생각만 들었다. 너무 장을 오랫동안 안 봐서 반찬이 없는 탓에
어머님 드릴 반찬이 마땅찮아 좋아하시는 콩비지까지 돼지등뼈 고아서 한꺼번에
해대니 정작 차례 음식 만드는 일은 진도가 안 나갔다.

그래도 어찌어찌 무사히 차례상을 보고 소은이 일어나기 전에 밥까지 다 먹을 수
있었다. 소미는 차례 지내기 직전에 깨웠더니 잠이 덜 깨서 절을 하래도 흐응!
내려서 음복을 하래도 으흥! 심술이 잔뜩 든 얼굴을 펼 줄 몰랐다.

제 아빠가 <솔이의 추석 이야기> 그림책을 펴들고 솔이처럼 절을 해야하는 추석이라고
설명해도 듣질 않았다. 에구, 나는 속으로 책 백날 읽어야 헛 거라고 실소했다.
한참 동안 식구 모두가 모른 척하다가 남편이 근무 교대하러 가야 하는
바쁜 와중에 밥을 좀 떠 먹여주자 겨우 심술이 풀렸다.

오전에 남편만 빼고 모두 성당에서 선조를 위한 합동 위령미사를 드리면서 우리
집 한가위 공식행사가 막을 내렸다. 어머님과 도련님은 그 길로 돌아가시는 차에
오르시고 나는 집에 돌아와 침대에 쓰러져 멍했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남편의
전화를 받은 것이다.

어머님이 집에 오시자 마자 한 말씀이 생각난다. 외손자가 제 아빠 엄마 따라서
친할머니 댁에 가려고 나설 때, 그렇게 자기를 평소에 업고 안아 돌본 어머님을
아쉬움 하나 없이 싹 떨어져 가더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외손주는 하나도 쓸데없단
식으로 서운함을 표현하셨다. 그때 용기 있게 내가 한 말.

"어머니, 친손주도 다 쓸데없어요. 소미, 소은이도 크면 지들밖에 모를 테니까 다
마찬가지예요. 저희들도 사실 저희밖에 모르는데 손주가 다 무슨 소용이시겠어요?
외손주라도 잘할 놈들은 잘하고 친손주라도 못하는 놈은 제 부모도 몰라라
할 텐데요 뭘."
"그래 허긴 그렇다. 니 말이 맞다."
내가 두 말도 못하시게 한 것 같아 죄송했는데, 나도 모르게 콩을 갈았던 믹서를
수돗물 틀어 닦으면서 뒤로 고개를 쭈욱 빼고는 주절주절 할 말을 다하고 말았다.

차례준비에 정신없는데 엄마가 전화를 하셨다. 소미 뭐하냐고 목소리 좀 듣고 싶다고
하셨다. 추석 밑인데 막내딸은 코빼기도 보일 생각도 안하고 먼저 생각이 나셔서
전화를 하셨던 듯하다. 이렇다. 나만 해도 엄마가 먼저 전화하시게 했다.

또다시 태풍이 올라온다. 보름달 구경은 힘들어졌다. 이 밤에 휘영청 달이 밝으면
엄마 얼굴이 생각날 것 같아서 아예 잘 되었다 싶은 생각이다. 마흔 셋에 날 나으시고
이젠 귀도 조금 어두우신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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