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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에 실린 두 편의 글

M.미카엘라 2003. 5. 16. 20:11
***** 군인가족의 평화로움

'군인과 의사를 싫어한 어떤 여자가 군의관한테 시집갔다'는 우스개 소리가 있다. 나 역시 군인을 그리 좋아하진 않았지만, 어쩌다보니 군인과 결혼한 셈이 됐다. 정확히 말하면 결혼할 때만 해도 '민간인'이었던 남편이 결혼한 지 5개월만에 늦깎이로 군인이 된 탓이다. 결국 그는 지금 최선을 다해 성실한 군인으로 살고 있다.

나는 군인가족이 되기 이전부터 해온 일을 지금도 하고 있다. 재택근무로 집에서 사보나 웹진에 기사를 쓰는 일이다. 이를테면 '자유기고가'쯤 될까? 꼭 24개월 터울로 태어나 지금은 다섯 살, 일곱 살이 된 두 딸을 기르면서 늦은 밤에 일했던 순간들은 지금 생각해도 아득하기만 하다. 하지만 이사 다닐 일이 잦은 군인의 아내로서 이만큼 안정적인 일을 갖기 어렵기에 밤샘 일도 견디곤 했다.

다른 군인가족에 견주면 형편없이 적은 횟수지만 우리 가족은 지금까지 다섯 번의 이사를 했다. 지금은 서울 언저리에 살고 있는데, 그동안 두 아이를 데리고 눈 많이 내리고 추운 강원도 전방에서 두 차례나 살다 오기도 했다. 그러나 전방생활의 힘겨움을 탓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탓하기는커녕 그곳에서 좀더 오래 살지 못한 점이 오히려 아쉽기까지 하다. 그곳은 어린 두 딸들에게 더없이 평화롭고 맑은 환경이었기 때문이다.

군인관사의 특징은 대도시라고 해도 게 외진 곳에 위치한다는 점이다. 지금도 서울을 바로 옆에 둔 위성도시에 살지만 전혀 도시 같지가 않다. 우리 집이 4층에 있다보니 계단 오르는 일이 힘들기는 하지만, 여기서 내려다보면 마치 시골동네처럼 산과 논이 함께 있는 마을이 훤히 보인다. 하지만 아파트를 '하늘에 걸린 집'이라고 느끼는 큰아이는 늘 '땅에 붙은 집' 타령이다.

"엄마, 난 아파트에 살지 말고 그냥 땅에 붙은 집에 살았으면 좋겠어요. 외할머니네 집 같이. 물 부어서 진흙놀이도 할 수 있고 강아지도 기를 수 있잖아요."
"그래. 네가 한 살 때 우리도 그렇게 땅에 붙은 집에서 살았어. 소미는 그때 기억이 잘 안 나지? 설악산도 보이는 곳이었는데. 지금 그런 데서 살면 좋겠다, 그치? 그래도 소미는 넓은 놀이터와 산이 가까우니까 흙이랑 나무, 꽃들을 많이 볼 수 있잖아. 땅에 붙은 집에 살아도, 산이 너무 멀거나 흙이 없거나 공기가 나쁜 데서 사는 사람도 많거든."
"히잉, 그래도∼"

군인가족의 애환 중에는 부모를 따라 이사를 다녀야 하는 아이들의 문제가 늘 빠지지 않는다. 하지만 내 의지와 관계없이 자주 바뀌는 환경이 늘 자연과 가까운 곳이라는 점만은 마음에 든다. 해가 다 지도록 흙강아지가 되어 밖에서 뛰노는 아이들을 찾으러 나간 길에 보는 노을……. 한적한 자연과 가까이 있기에 아이들과 주변 풍경이 한층 아름다워 보이는지도 모른다.

- 월간 <좋은 엄마> 6월호

***** 군인 아빠의 폭탄

두 딸이 이제 잠들었다. 나는 원복 안에 입힐 하얀 블라우스 두 장을 다림질했다. 아이들 흰옷의 세탁과 다림질을 날마다 어찌 당해내나 걱정했는데 의외로 한 이틀, 잘하면 사흘도 너끈할 정도로 말끔히 잘 입어준다. 참 많이 컸다. 흰옷을 하루종일 입고도 그렇게 깨끗할 수 있다니….

소미가 일곱 살, 소은이가 다섯 살인 것이 난 아직도 신기할 때가 많다. 특히 오늘처럼 비오는 날은 5년 전 6월이 생각나서 애틋한 기분마저 든다. 남편이 군인인 탓에 이사가 잦은 우리 부부는 옷을 꺼내놓은 큰 상자에 11개월 된 소미를 넣어두고 짐 정리했다.

이삿짐을 집안에 부려놓기 무섭게 쏟아지기 시작한 비는 밤새 이어졌고, 소미는 과자를 먹다가 상자 끝을 잡고 서서 바쁜 아빠 엄마에게 알 수 없는 소리로 훈수를 두었다. 지금이야 거의 포장이사를 하지만 그때만 해도 신접살림과 다름없는 단출한 세간을 큰돈 주고 포장 이사한다는 것이 적잖이 마음 불편할 때였으니, 이 추억은 남편과 내겐 이래저래 군인가족으로서 꽤 상징적인 풍경으로 오래 남아있다.

상자 안에서 새우깡을 먹던 그 소미가 일곱 살이다. 말이 빨랐던 두 딸의 야무진 수다가 한창 늘어지는 요즘, 어디서 주워들은 이야기에 서로 아는 척, 잘난 척이 넘쳐 귀가 시끄러울 지경이다. 하루종일 집에서 늘어지게 뒹굴다가 느지막하게 목욕탕을 다녀오던 일요일 저녁도 자동차 안은 두 딸의 수다와 고함과 환호로 비빔밥이 되어 고추장을 넣었는지 된장을 넣었는지 모를 정도로 정신이 쑥 빠졌다.

그런 와중에 남편이 두 번이나 잇따라 전화를 받았다. 며칠 후 다른 부대로 전출 가는 사람의 송별회 자리에서 호출이었다. 소은이는 집 앞에서 아빠를 따라가겠다고 달라붙고 남편은 순순히 데려가겠다고 했다. 그래야 술을 좀 덜 먹고 빨리 올 수 있을 것이라면서. 그런데 정말 약 40분쯤 후에 남편과 소은이가 돌아왔다. 남편은 그 사이에 벌써 얼굴이 벌개져 있었다. 그러더니 "늦게 왔다고 마구 폭탄주를 주는 거야. 나 소은이 데려다주러 왔어. 다시 가야 돼" 이러면서 또 가버렸다.

소미와 소은이는 자기 전에 읽을 책을 얌전히 준비해서 나를 기다렸다. 그런데 가만히 들려오는 두 아이의 대화가 걸작이다.

"소은아, 정말 폭탄이 팍팍 터졌어?"
"……?"
열린 방문 뒤에 가려진 소은이에게서 아무런 대답이 없다. 그 순간 나는 폭소를 터뜨릴 뻔했다. 당연히 소은이는 이거 언니가 뭔 소리하는 건가 하는 표정일 게 뻔했다.
"소미야, 소은이가 잘 못 알아들었나 봐. 다시 이야기해 줘!"
"박소은, 아빠가 그러는데 정말 거기서 폭탄이 팍팍 터졌냐구우? 아이 차암! 왜 대답을 안 해? 언니가 싫어?"
"그게 아니야. 언니가 뭐라 그러는 거야? 아이 참, 나두 몰라!"
"왜 몰라? 아빠랑 같이 있었잖아."

확 삐쳐버린 소미가 말한 것은 '폭탄주'였다. 일곱 살짜리가 그게 술이란 걸 알 턱이 없다. 그냥 밥 먹는데서 폭탄이 터진 건가, 아빠가 군인이니까 폭탄도 가지고 있겠지 하는 아이들다운 상상력만 날개를 달았을 뿐이다. 나는 소리 내서 웃었다간 자칫 화살을 내게 돌려 설명을 요구할까봐 속으로만 킥킥 웃고 못 들은 척했다. 소은이만 억울할 노릇이지만 곧 두 아이는 잠잠해졌다.

사실이다. 생후 20개월에 크레파스 색깔을 똑똑한 소리로 구별할 줄 알았지만, 겨우 3살 때 <노을>이니 <아기염소>니 <별>이니 하는 정통동요를 줄줄 꿰어 불러 어른들을 기쁘게 했지만, 또래 친구들보다 앞서는 말발로 혀를 내두르게 했지만, 그렇게 학습의 결과로 아이가 튈 때보다 이렇게 아이다운 모습과 상상력을 보일 때 나는 행복하다. 아이가 이만큼 컸다고 신기해하고, 요즘 한창 성장에 가속이 붙는 것 같아 서운하기도 하지만 아직 소미가 어린 딸인 사실이 행복하다. "엄마, 폭탄주가 뭐예요?"하고 묻는 게 아니라 동생에게 폭탄 터진 걸 봤느냐고 물으며 화내는 아이를 보며 이게 어른들이 말씀하시는 '애 기르는 맛'이란 거겠지 생각한다.

- 월간 <함께 가는 세상>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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