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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세대 떡잎에 물주기

M.미카엘라 2001. 2. 8. 15:56
요즘은 소은이의 물오른 재롱이 한창이라 도끼자루 섞는 줄 모르며 산다. 하지만
거기에 비례하여 저지레가 춘추전국시대를 만났으니, 내 얼굴은 하루에도 웃다가
한숨짓다가 화냈다가 다시 폭소하길 여러 번, 시시각각 변한다.

내가 화를 내려고 하면 소은이는 어디에 달렸는지 모를 꼬리를 일찌감치 착 내리고
씨익 웃으며, "엄마∼"하고 은근히 부른다. 그러면서 되는대로 내 몸에 착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내가 앉아있을 땐 팔에 매달리거나 목을 꽉 끌어안고, 서있을 땐
허벅다리를 두 팔로 꼭 껴안고 한쪽 볼을 붙이고 안 떨어진다.

내가 어쩌나 보려고 "소은이 미워" 그러면서 내치는 행동을 해도 내 몸의 움직임에
따라 딸려 다니면 다녔지 절대로 떨어지는 법이 없다. 울지도 않고 노여움도 타지
않고 꿋꿋하게 그대로 매달려 엄마, 엄마만 연발한다. 행동 그대로 귀엽게 봐달란
뜻인데 내가 거기서 어찌 더 화를 낼 수가 있을까? 저절로 웃음이 터지고 만다.

이제 막 만 19개월을 넘겼다. 누가 시킨 적도 없고 집에서 소미나 내가 그러는 편도
아닌데 저 혼자서 그렇게 능청을 떤다. 아직 아기 축에 끼는 어린아이인데도 그 애교가
수준급이다. 돌아서서 저지레만 하지 않는다면 좋으련만 오늘도 A급 저지레가 있었다.

씨리얼에 우유를 타서 주었는데 한참 잘 먹다가 조용해서 가보니 씨리얼 탓에 당분이
많아진 우유를 제 머리카락에 온통 치덕치덕 바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무슨 퍼포먼스를
하는 사람같이 진지한 표정으로. 너무 많이 발라서 머리카락이 착 달라붙고 나머지
우유는 눈꺼풀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엊그제는 아이스크림 먹고 녹은 물을 그렇게
발라서 밤중에 한바탕 머리를 감고 난리였는데 말이다. 요즘은 그런 식으로 먹을 걸
가지고 사고를 친다.

그래도 뭐니뭐니해도 이제 낮엔 제법 응가를 가린다는 게 기특하다. 오늘도 오줌을
싼 바지 두 개만 내놓고 쉬와 응가를 성공적으로 화장실에서 해결했다. 잘만 된다면
두 돌 전에 낮에는 너끈히 기저귀를 뗄 수 있을 것 같다. 아이가 처음 "응가" "쉬"하고
말해서 변기에 성공하는 것은, 처음으로 "엄마"하는 비슷한 발음으로 나를 부를 때의
감동과 맞먹는다. 희열이라고 말한다면 괜한 호들갑일까? 기저귀를 떼면 육아노동이
반으로 줄어드는 것 같은 느낌 때문일 것이다.

거기다 소은이는 요즘 컴퓨터 게임까지 한다. (에라, 이왕 이렇게 된 거 오늘은 소은이
자랑이나 모두 하련다.) '듣자듣자 하니 애어멈의 거짓말이 좀 지나치군'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사실이다.

소은이는 I세대다. 요즘은 N세대와 함께 한창 주가가 높은데 I세대는 인터넷이 널리
퍼진 1994년 이후에 출생한 최신세대로 완벽한 사이버 세대를 말한다고 한다.
태어날 때부터 인터넷에 친숙한 세대라 마우스나 키보드를 장난감처럼 가지고
논다고 하니 딱 소은이다.

거실에 있는 컴퓨터를 못 만져서 안달이다. 요즘 아기들이 전화, 리모콘 같은 것을
무척 좋아하는 것은 기본이니 컴퓨터도 예외는 아니다. 빈 김치통 하나 들고 와선
디딤대로 쓴다. 의자로 올라와 다시 키보드가 있는 책상으로 올라가서는 온갖 것을
만진다. 오죽하면 남편이 어디서 고장난 구형 키보드와 마우스를 구해왔을까.

남편은 얼마 전 애들이랑 가끔 놀겠다고 '보글보글'이란 게임을 어디서 가져와 깔았다.
아기공룡 입에서 비누방울이 막 나와서 나쁜 나라(?)를 없애고 버찌, 바나나, 아이스크림
같은 것을 먹어서 이기면 다음 판으로 넘어가는 게임이다.

소미는 좀 컸다고 남편이 자주 데리고 놀아줬다. 비누방울이 나오게 스페이스 바를
계속 누르게 해주었는데 처음엔 아주 재미있어했다. 그러나 몇 번하더니 "맨날 똑같아서
재미없다"며 시들해했다. 혼자 해보라고도 했더니 화살표로 공룡을 이리저리 움직일
줄 몰라서 게임은 금방 끝나버리기 일쑤. 그때마다 다시 하게 해주려고 다른 키를
눌러줘야 했는데 그게 성가셨다. 이걸 누르라고 가르쳐줘도 못한다고 남편이나 나보고
때마다 해달라고 했다.

그런데 소은이는 달랐다. 빈 김치통을 의자 위에 놓고 거기에 앉혀 책상 높이를
맞춰주었다. 게임을 열어주고 제 언니처럼 몇번 가르쳐주고 아주 맡겨버렸더니 좋아서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렇게 나를 못 만지게 하더니 이게 꿈인가 생신가 싶은지
자주 뒤에 앉은 나와 남편을 돌아다보았다.

소은이는 스페이스 바를 한참 잘 누르다가 게임이 끝나면 다시 다음 몇 개의 화면으로
옮겨가서 게임을 새로 시작하는 법을 금방 알아냈다. 역시 공룡을 움직이는 화살표
키는 쓸 줄 몰랐지만 비누방울 퐁퐁 몇 개 내보내서 놀다가 게임 오버하면 다시 새
화면을 띄워 노는 것이었다. 남편과 나는 너무 신기해서 보던 열심히 보던 드라마도
작파하고 소은이 노는 뒷모습을 구경했다.

배경음악에 맞춰 엉덩이도 씰룩대다가, 내가 하는 양을 흉내라도 내는지 옆에 놓인
전화기에 이따금씩 손은 왜 그리 갖다대는지. 그러다가 한번은 전화 받는 시늉까지
하면서 게임을 했다. 우린 너무 웃겨서 클클 소리 죽여 웃었다. 내가 부엌에서 식혜를
가지고 오니 그제야 "내이(내릴) 거야" 했다.

사실 그 과정을 지켜본 나는 '어이구! 우리 딸 기특하고 영특하도다, 하나를 가르쳐주면
열을 아네'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 구석엔 걱정스럽고 쓸쓸한
맘도 일어났으니 쓸데없이 앞서가는 생각이 아닌가 싶어 조금 부끄럽다.

주변 이웃을 돌아보면 아직도 가정주부가 인터넷을 자유로 활용하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다. 나 역시 이 육아일기나 써서 겨우 올리고, 필요한 물건을 인터넷 쇼핑몰에서
한두 가지 구입해서 쓰는 정도지 아직도 왕초보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중요한 건 내 머리와 가슴이 디지털화하기는 좀체 힘들겠단 점이다.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많겠지만 그래도 아날로그에 코드를 꽂고 말하고 듣고
숨쉬는 편이 편하다. e-북이라고 하는 그 전자책만 해도 종이책이 주는 정서의
향기로움은 영원히 따라가지 못하지 싶은데.

늦게 태어날수록 디지털화하는 속도는 어지러울 정도로 빨라지는 게 요즘 세상이다.
그 속에서 소미나 소은이가 '접속'을 즐기기보다 나와의 '접촉'을 더욱 즐기는 걸 바라는
건 헛된 욕심일까? 미리 꿈 깨야 사는 게 수월한 것일까? 보글보글로 신이 난 제
잔등 위로 그런 에미의 짧은 한숨이 내려앉는 걸 소은이는 알까?

I세대와 컴퓨터, 혹은 인터넷은 이제 수능시험 치르는 학교 교문에 붙은 엿보다 더
단단하게 붙어버린 관계임을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이 시간에도 접속보다는 어떻게
사람과 눈을 맞추며 교류하는 즐거움과 멋을 아는 아이로 키울 것인가 앞선 고민을 한다.

소은이가 또다시 식혜를 손으로 찍어 머리에 바르려고 했다. 비명을 지르면서 팔을
꽉 잡았는데 벌써 식혜 밥알 몇 개가 송송 달려서 끈적였다. 아무래도 저지레 춘추
전국시대를 날려보내는 일이 더 급하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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