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한 뼘 성장드라마
안에서 새는 바가지 본문
소은이가 감기가 들어 병원을 찾았다. 심한 가래에 기침, 미열까지. 배즙을 먹이고
가습기를 틀어주고 해도 잘 낫질 않았다. 한 두어 달 병원 신세 짓지 않고 그 모진
추위를 잘 견뎠는데, 이제 바야흐로 환절기가 도래하는 걸 느낀다.
병원은 부부의사가 정형외과와 소아과를 나누어 보는데 같은 대기실을 쓰다보니
아주 복잡했다. 자리를 잡지 못한 어린이환자의 보호자는
아장아장 걷는 재미에
잠시도 가만히 있질 못하는 아이들을 잡으러 다니느라 바빴다.
할머니, 할아버지 환자들이 쭈욱 앉아있는 긴 의자 맞은편 벽에 기대서서 소은이
손을 잡고 기다렸다. 소은이는 조금 기다리다가 "빠방
가자. 빠방 가자"하며 집에
가자고 했다. 이리저리 달래가며 긴 시간을 기다리는데 내 앞에 있던 할아버지
한 분이 좀 볼멘소리를
하셨다.
"아이구, 열 시부터 와서 기다리는데 아직도 안 불러."
시간은 11시 반을 넘기고 있었다. 결국 그 할아버지는 진찰실에서 나오는
간호사를
불렀다.
"난 10시부터 와서 기다리는데 왜 안 불러? 접수가 된 건지 안 된 건지 원."
그랬더니 그 간호사가 툭
던진 말.
"10시 이전에 온 사람도 많아요."
옆에 있던 내 얼굴이 다 화끈거릴 정도로 무례하기 짝이 없었다. 민망해서 할아버지
얼굴을 볼 수가 없었는데, 할아버지는 "무슨, 다들
내 뒤에 온 사람들인 것 같은데…"
하면서 멋쩍음을 감추시려는 듯했다. 그러다가 잠시 주사실에 갔던 간호사가
다시 진찰실로 들어가려
할 때 할아버지가 때를 놓치지 않으셨다.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두 사람의 표정은 정면으로 보지 못한 채 소리만 들었다.
"아니, 이것 봐. 아버지나 할애비도 없어? 말을 그렇게 밖에 못하나?"
결국 간호사가 눈물을 찍 짜면서 2층 계단으로 올라가는
뒷모습만 볼 수 있었다.
내 속이 다 시원했다. 그 할아버지를 다시 뵈니 단정하게 싹싹 빗어 올린 머리며
깨끗한 안경이 끝내 한
소리 하실 분다웠다. 기분이 몹시 상하셨는지 진찰도
받지 않으시곤 휑하니 가버리셨다.
오후.
소미가 미술학원에서 돌아와 함께 이웃집 채구네 집에 갔다. 채구는 4월이면 돌이
되는 아기라 소미, 소은이는 누나가
된다. 소은이의 친구 선재가 엄마와 함께 와있었다.
넷이 뭉친 아이들은 이것저것 어지르면서도 아주 잘 놀았다. 소미와 소은이는
채구네 집에 처음 온 터라 집에 없는 장난감이 마냥 재미있는 눈치였다.
그런데 소미가 작은북의 끈을 목에 걸다가 잘못해서 북으로 눈두덩이를 얻어맞았다.
자지러지게 우는 소리에 놀라 옆에 있던 선재 엄마가
"소미야, 어디? 많이 아프니?"
하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려했다.
그 때 소미는 매몰차고 앙칼지게 성질을 있는 대로 부리며 선재엄마의 손을 뿌리쳤다.
선재엄마의 손과 마음이 황망했던 건 물론이고 나도
당황했다. 처음엔 그냥
좋게 선재이모한테 왜 그러느냐 하면서 달랬다. 눈과 눈썹 사이에 벌겋게 부딪친
상처가 있었다. 울음을 멈추길
기다렸다가 말했다.
"소미야. 선재 이모한테 사과해. 이모가 너 많이 다쳤을까봐 놀라서 그런 건데 왜
그렇게 화를 냈어? 선재이모가 아프게 했나 뭐?
잘못했지? 그치?"
그러나 아주 짜증난 얼굴로 으르렁거리듯 하면서 고개를 잘래잘래 흔들었다. 미안하단
말을 끝까지 안 하겠다고 하니
선재엄마는 괜찮다고 했다. 평소 내 급한 성질대로
라면 어떻게든 야단을 쳐서 그 자리에서 사과를 받아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성질을 한 템포만 줄이자 하고 속으로 다독거렸다.
즐겁게 사과도 먹고 귤도 먹고 그림책도 서너 권 읽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돌아왔다.
소미는 집에 돌아와서 텔레비전 어린이
프로그램을 보고 나는 저녁준비를 했다.
부대찌개 거리를 준비한다고 당면을 손질하다가 아까 채구네 집에서 벌인 소동이
생각났다.
"소미야, 잠깐 이리 좀 와 봐. 엄마가 할 얘기가 있어."
"네?"
"너 아까 왜 선재 이모한테 그랬어? 선재이모가 소미하고
소은이를 얼마나 예뻐하시는데.
엄마가 미안해서 혼났단 말야. 다시 생각하니 잘못한 거 같지?"
"아니요. 안 잘못했어요. 난 엄마가
달래주는 게 좋아요."
"그렇다고 그렇게 화를 내면 안 되지. 이모는 너를 걱정해서 그렇게 한 말이야.
화낼 이유가 아무 것도 없어.
오히려 고맙게 생각해야 될 일인데."
"그래도 안 잘못했어요."
(아니 요것이? 다 생각이 있으면서도 그러네. 오기를
부려보겠다?)
"아냐, 우리 소미는 지금 잘못했다고 생각하면서도 괜히 그러는 거야. 그치? 진짜
멋진 사람은 자기가 잘못한 것을
잘못했다고 말하는 사람이야. 어른이나 어린이나
다 마찬가지야. 진짜 멋진 어린이가 되고 싶으면 저기 가서 잘 생각해봐."
텔레비전을 보던 자리로 돌려보냈다. 그랬더니 효과가 금방 나타났다. 소파에 가서
엉덩이 한번 붙여보지도 않고 다시 돌아와
말했다.
"엄마 생각해보니까 소미가 잘못했어요."
"아냐, 더 생각해. 억지로 잘못했다고 말하지 않아도 돼. 엄만 야단 안쳐. 봐
아까도
야단 안쳤지? 채구네서 말야."
"아녜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래? 정말? 그럼 선재네 집에 전화해서 이모한테
말씀드릴 수 있어?"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선재네로 전화를 해서 이런 말을 했다.
"선재이모. 제가요, 아까요, 눈에 작은북이가
맞았을 때요, 이모한테 신경질 부려서
죄송합니다. 잘못했어요."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는 말이 있다. 소미 행동을 보고 내가 바로 잡아주지
않고 지나간다면? 그리고 그 횟수가
많아진다면? 하고 생각하니 오전에
그 간호사가 떠올랐다. 간호사의 그 행동 하나만 보고 지나친 생각인지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기분
나쁜 일이 있었다 해도 다른 사람도 아니고 노인 환자에게
뚝배기 깨지는 소리로 대답을 한 건 분명 잘못이다.
어쨌든 친절하지 못한 간호사에 대한 책임을 병원 오너의 몫으로만 돌리고 싶진
않다. 아주 부드럽고 사근사근하게 못한다 해도
"할아버지, 10시 이전에 접수된
환자도 많아서요.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한다거나, 아니면 할아버지의 꾸중
후라도 "죄송합니다.
앞으론 그런 일이 없도록 조심하겠습니다"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게 신세대식 말투라고 남편은 말했다. '요'자만 빠지면 반말이 되는 말투, 거침없어서
좋아 보이지만 대드는 것 같은 무례한 말투.
내 자식 남의 자식 할 것 없이
말한 당사자는 그게 잘못된 것인지도 모르는데, 어른이랍시고 꾸중만 하거나
고치라고 하면 엇나가는 건
필연적이라고 한다. 남편도 신세대 사병들의 말투가
몹시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아무튼 우리 '소미 바가지'나 밖에서 새는 일이 없도록 미리미리 가르치고 알려줘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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