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한 뼘 성장드라마
특별한 숙제 본문
오늘 학교에서 돌아온 소미의 가방은 2학기 때 공부할 새 책으로 가득했다. 국어 <읽기>책이 재미있다며 열심히 새 책을 읽는 소미는 두고 알림장부터 챙겨보았는데, 거기엔 금방 읽어선 알 수 없는 특별하게 보이는 숙제가 하나 있었다.
반성문 써오기- 16명이 1명에게 따진 것.
줄 공책에 7줄. 부모님 싸인도 받아오기.
한참을 빤히 들여다보았지만 ‘16명이 1명에게 따진 것’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소미야. 이게 무슨 말이야? 16명이 1명에게 따진 것이 뭐야?”
“아, 그거요?”
“오늘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어?”
“네. 양예은 있잖아요. 엄마도 아시죠?”
“응. 저번에 전학 온 친구라고 했잖아. 너하고 짝도 한번 했던 그 친구. 엄마하고 성이 같아서 잘 기억해. 근데 예은이가 왜?”
“네. 예은이가 오늘 친구들에게 막 욕하고 거친 말로 화내고 거짓말 하고 소영이를 발로 차고 그랬거든요. 그래 가지구 우리들이 예은이한테 막 따진 거예요. 16명이 삥 둘러서서요.”
“따진 거라면 예은이한테 너희들이 한꺼번에 막 뭐라고 야단을 했다는 거야?”
“네. 예은이가 잘못한 거잖아요. 그래서 애들이 한 명씩 막 따지기 시작했는데 모두 16명이 되었어요. 그랬더니 예은이가 다섯째 시간도 안 하고 집에 가버렸어요. 예은이네 집은 학교에서 걸어가도 되는 데거든요. 가방도 다 두고 그냥 가버렸어요. 선생님이 전화를 하셨는데도 오지 않았어요. 그래서 선생님이 16명한테 반성문 써오라고 하신 거예요.”
“소미는 반성문이 뭔진 알아?”
“네. 선생님이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것을 써오는 거라고 그러셨어요.”
“근데 그 따진 16명 중에 소미도 있어?”
“네. 선생님도 예은이가 먼저 잘못했다고 하셨어요.”
“음. 그런데 왜 선생님이 반성문을 써오라고 하셨을까? 예은이가 잘못했는데? 반성문은 잘못한 것에 대해 쓰는 거라면서….”
“그거요? 그건…”
“그걸 모르면 반성문 못 쓰는 거지.”
“아! 엄마, 생각났어요. 예은이가 먼저 잘못했지만 예은이한테 한 명이 따진 거면 괜찮은데 16명이나 따졌던 건 너무 했어요.”
“맞아. 맞아. 바로 그거야. 그때 예은이 마음이 어땠을까?”
“화도 나고 슬펐을 것 같아요. 우리 반에서 다섯 명만 빼고 모두 자기한테 그랬으니 무척 슬펐을 거예요. 나도 그러면 집에 오고 싶었을 거예요.”
“넌 더 슬플 걸. 왜냐면 우리 집은 학교와 멀어서 걸어올 수도 없으니 엄마한테 이를 수도 없잖아. 그냥 어쩔 수 없이 그 속상한 기분으로 공부를 계속해야 했을 텐데, 어후~ 만약 엄마가 예은이였으면 아마 공부 다 끝날 때까지 엎드려 울기만 했을 거야.”
“맞아요. 나도 엄마같이 그랬을 거야. 엄마, 내일 예은이한테 미안하다고 말해야겠어요. 나라도 그러지 않았어야 하는 건데.”
“그럼 됐다. 이제 반성문에 쓸 거 다 나왔네 뭐. 지금 말한 거 그대로 쓰면 될 것 같은데.”
소미는 7줄을 넘겨 거의 공책 한바닥을 꽉 채워 반성문을 일사천리로 썼다. 먼저 낮에 있었던 일을 되도록 자세히 마음속에서 다시 한번 떠올려보고 쓸 말을 입으로 연습해가며 쓰라고 했더니, 생각보다 쉽다고 느꼈는지 글쓰기에 아주 신이 난 눈치였다. 엄마의 도움을 받아서 쓰라고 했다는데 내가 좀 다듬어주려고 하면 자기가 다 하겠다고 해서 난 본의 아니게 편해져버렸다. 다 쓴 후 틀린 글씨만 고쳐달라고 해서 그것만 했다.
반성문
<예은이에게 16명이 따진 것을 반성합니다.>
16명이 예은이한테 따지면 예은이 마음은 어땠을까? 아마 슬프고 화났을 거다. 내가 만약에 예은이였다면 무척 화가 나고 슬펐을 꺼다. 예은이가 아무리 잘못을 했어도 16명이 따진 것은 너무했다. 예은이는 외톨이가 되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선생님도 예은이 잘못도 있다고 했지만 우리들 잘못도 있다. 예은이는 전학 온 지도 얼마 안 되는데 우리가 이렇게 예은이에게 따지면 예은이는 그 전에 있었던 학교로 다시 가고 싶을 것이다. 예은이에게 내일 꼭 사과를 해야겠다. 끝. 2004년 6월 29일 반성문
나는 오늘 선생님이 아이들을 야단치지 않고 내주신 이 특별한 숙제가 마음에 든다. 형식적으로 후딱 해버리자면 별로 의미 없는 숙제일 수 있지만, 선생님의 진지한 의도를 알아챈 부모가 조금만 지도하면 아이들의 마음과 생활을 가꾸어주는 더할 수 없이 좋은 숙제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숙제를 하자면 낮에 있었던 일을 아이들이 한번쯤은 떠올리게 될 것이고, 거기서 자신이 예은이가 되어보면서 16명이 따져왔을 때의 심정을 어림잡는 노력도 하지 않을까.
“엄마, 근데 엄마는 왜 저 야단치지 않으세요? 친구한테 따져서 선생님이 반성문 써오라고 한 거 보면 제가 잘못한 건데…”
“조금만 생각을 더 해보면 이렇게 잘못한 거 곧 알게 될 거니까 야단 안치는 거지 뭐. 하지만 내일 예은이한테 사과하고 예은이가 그 사과를 어떤 말로 받았는지 잘 듣고 엄마한테 말해주기다. 그게 엄마가 내주는 숙제야. 그리구 뭐 남들이 소미 말만 들으면 엄마가 맨날 야단만 치는 사람인 줄 알겠다. 엄마 삐짐! 칫!”
근데 사실 맞다. 나 요즘 맨날 애들 야단친다. 한 가지 일을 점점 커지는 목소리로 세 번 이상씩은 말해야 말을 듣는 소미에게 소리도 버럭 지르고 매도 들었다 놨다 하고 협박도 한다. 그리고… ‘무쟈게’ 잘 따진다. 예은이에겐 친구들 16명이 따졌지만, 소미에겐 친구들 16명보다 넘치는 ‘어른’인 내가 맨날 따진다.
왜 학교 다녀와서 책가방 제자리 놓기가 안 되니? 말 안 해도 당연히 손부터 씻고 간식 먹는 거 아냐? 수건을 썼으면 제자리에 걸어야지 왜 꼭 욕실 앞 매트에 던져놓고 오가며 밟고 다니니? 책을 그렇게 막 밟고 다니면서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니?… 이건 왜? 저건 왜?… 사실 오늘 일기는 소미를 핑계대고 쓰는 내 반성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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